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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입을 닫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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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입을 닫는 사람들

[김영종의 '잡설'·14] 유언비어의 사회학 ②

유언비어의 사회학 ②

억제된 에너지가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쪽으로 왜곡되면서, 현대인의 언어생활은 그 '형태'와 '아름다움'이 가꾸는 자의 손에 달려 있는 분재(盆栽)가 된 것이다. 여기서 가꾸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운영하는 자다.

분재의 이상형은 분재가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는, 자연성에 조금도 기대지 않은 완벽한 '합리성의 메커니즘'(원리) 위에 핀 황금 꽃이다. 언론 자유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느냐 저해하느냐의 구도 속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언론의 자유를 추구할수록 언론의 자유를 잃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고 만다.

무슨 말인지 궁금할 터인데, 이 아이러니에 대해 수학의 예를 빌려 살펴보자. 수학에 '리샤르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n이 리샤르적이지 않을 경우, 오로지 그럴 경우에만 n은 리샤르적이다. 따라서 'n이 리샤르적이다'라는 명제는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라는 내용이다. (<괴델의 증명>, 어니스트 네이글·제임스 뉴머 지음, 강주헌 옮김, 경문사 펴냄, 81쪽.) 이것은 수학이 합리성의 메커니즘 안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정초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율배반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러셀에 이어 힐베르트는 수학에서 '무모순의 절대적 증명'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을 교묘하게 피해가서 마치 이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었다. 자연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즉 n이 리샤르적이거나 않거나 하는 것이 논리적인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 의해서 먼저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청년 수학자 괴델이 나타나 기라성 같은 수학자들의 망상을 뒤집고 아주 간단한 '이 사실'(위의 밑줄 친 부분)을 수학식으로 정리한 것이 저 유명한 '괴델의 증명'인데, 그 증명조차도 모순을 안고 있는 추론 규칙을 사용해야 했다. 이것이 1세기 전에 수학에서 일어난 대사건이다.

'자연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추상으로만 구성되는 완벽한 수학의 형식 체계'='무모순의 절대적 증명'이라는 것은 자연을 완벽하게 이성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합리주의자들의 망상이다. 여기서 자연 대신 사람을 대입하면 시대의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수학자들이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던 당시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그들은 '절대이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세계정부'를 위해 이성의 기초인 수학에서 그 논리를 찾고자 했다. 이를 토대로 파시즘의 학문인 인종학·우생학·사회진화론 등이 융성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언론 자유의 이상형'이 '절대적 증명'과 동일한 욕망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자와 마찬가지로 전자('합리성의 메커니즘' 위에 핀 황금꽃)도 세상(즉 말의 세계)을 가상이 아닌 실체로 대한다. 그러나 후자('절대적 증명에 의한 무모순의 체계')가 세상을 실체적 토대 위에 완벽하게 구축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은 괴델의 증명 외에도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건축학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등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행해져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구조주의는 타격을 받았으며, 해체론이 탄력을 얻게 되었다. 해체론(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 즉 말의 세계를 가상으로서 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인 전자는 아직까지 세상을 실체로 대하면서도 비판받지 않은 상태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인간이 말로 산다는 것은 의미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를 위해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완전하게 만들려 할수록 (수학의 절대증명에서 본 것처럼) 형식화에 올인 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의미의 배제를 동반한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본질 추구의 결과물인데, 그 본질 추구가 의미의 배제라는 이율배반을 낳은 것이다. 이것이 앞서 살펴보겠다고 한 아이러니의 실체다.

그래서 '말의 자연성'을 '합리성의 메커니즘'으로 방해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4대강 사업 같은 것은 '말의 세계'에서도 하면 안 된다. 말의 다채로움은 사람이 생명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징표다. 자기생각을 '팩트나 증명', 곧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막혀서 썩지 않고 잘 흘러간다. 앞서 말한 구도, 즉 언론의 자유를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느냐 저해하느냐로 나누는 구도를 해체할 때에만, 말의 다채로움이 실현될 새로운 길이 열린다.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은 이 구도를 강화시켜주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옛날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말 못해 죽은 귀신이 없을 만큼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논리에 갇혀 과거보다 여러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말의 다채로움 또한 사라졌다. 물론 자신감도 당연히 죽었는데, 이것은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에, 논리적으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의 말이 아니다. 지식에 종속된 '죽은 시인의 사회(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로크는 언어의 가장 엄격한 사용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저작을 '자연 언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김용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기준으로 하는 이 구도를 떠맡고 있는 제도 언론의 기자부터가 민주화를 맞아 가시적인 언론 통제가 사라지자 자신들이 스스로 언론 통제를 하고 있다. 기득권층을 자발적으로 옹호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도(이마저도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자본에 허약하며 이익단체나 기득권층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가 경제의 손아귀에 잡힌 상황에서 내적으로는 보수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는 최근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 대한 광고 거부라든가, 한의사 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구당 선생의 책을 보도하기 꺼리는 풍토 따위를 들 수 있다.

조·중·동의 경우는 1970년대의 동아투위나 조선투위 같은 저항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됐는데, 회사 쪽의 장악력보다는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합리성은 보수에게나 진보에게나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유 언론을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무장하게 한다. 독재 시절의 죄의식 같은 것은 없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 것은 그쪽 입장일 뿐이다. 이것이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이른바 '합리적인' 근대언론관이다.

좌우 날갯짓으로 나는 새의 비상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실현하는 것인 동시에 운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재주는 '좌우의 날개'가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 이 체계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 근대언론이며, 여기에서 그 모델은 이른바 선진국의 언론이다. 그런데 한국은 비정상적인 좌우 구분과 독재의 유산 따위 때문에 아직은 좌우를 균형 있게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다.

근대 언론의 모델은 궁극적으로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확고해질수록 근대 언론의 모델은 견고해진다. 장기를 둘 때처럼 파란 말, 붉은 말 이외의 어떤 말도 개입을 불허한다. 게임의 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장기 놀이는 오직 장기 말을 가진 언론만이 노는 놀이다. 이 룰에 따라 소시민들은 장기 말을 가질 수 없으므로 구경꾼이며, 훈수꾼이며, 청팀이거나 홍팀이며, 팬이며, 아니면 기껏해야 불평분자다. 바로 얼마 전 치러진 6·2 지방선거에서 언론이 여론조사를 내세워 살아 있는 민심을 정확히 읽지 못한 것은 말(言語)의 실제 주인들을 말(言語)의 장기판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언론의 장기 놀이는 이미 소시민들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이 모델이 완전하면 할수록 (사전적인 의미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소시민들의 언론은 완전히 무시당할 뿐 아니라 유언비어조차 발붙일 곳이 없다. 유언비어가 존재하려면 그도 장기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독재정권 때는 관보(官報) 대 유언비어가 각각 흰 말과 검은 말을 가진 의사(擬似) 장기 놀이의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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