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혹함과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모순과 탐욕을 생생하게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006년 영화 <아버지의 깃발>은 2차 대전 참전용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무지한 자는 전쟁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특히 전쟁터에 가 본 적이 없는 자들."
전쟁을 모르는 전쟁론자들
최근 우리는 정말 전쟁에 대해 무지한 자들을 주변에서 꽤나 많이 목격하고 있다. 최근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외교적, 지역학적 구조보다는 정책 결정자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들의 '오판'에 초점을 두어 전쟁 발발의 원인을 분석한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는 정책 결정자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오판'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국가'를 내세우며 안간힘을 다 해 천안함 북풍몰이를 하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과연 '국민'의 안위는 생각이나 하는가. 한국전쟁 때 사망자만 적게는 250만 명에서 많게는 400만 명이란다. 군인보다는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지금 전쟁이 나면 그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1994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뮬레이션 결과는 개전 24시간 만에 군인 20만 명 포함, 150만 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고 한반도라는 좁은 전선에 세계 최강의 화력이 집중되면 일주일 이내에 군병력 사망자가 100만 명, 민간인 피해 500만 명에 이를 것이라 예측했다. 그래서 클린턴 행정부도 그 계획을 접게 된다.
하물며 남의 나라 대통령도 우리 국민의 안전을 고려하는데 왜 우리의 지도자들은 우리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는가. 최근 목격하는 집권여당과 보수의 '전쟁불사'론은 국민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 이후 '전쟁불사'를 외치던 주전론자들은 지방선거 때 이 '전쟁'이라는 깃발이 잘 먹히지 않자 요즘 새로운 깃발을 찾아 꺼내들었다. 바로 '애국심'이다. 마침 참여연대의 유엔 서한이 논란이 되자 밤거리 동네 엿장수처럼 애국심을 외치고 다닌다. 그 선두에는 병역 미필에 빛나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있고 한나라당은 애국심 합창을 하며 따라 다니고 있다.
애국주의의 정체는
▲애국심인가 무조건적 국가에 대한 복종인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감사원 앞에서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라이트코리아 등이 천안함 사건 '참여연대 서한' 관련 감사원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애국주의를 불합리하고 해로운 감정이자 인류 고통의 거대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애국주의는 살인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그 결말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애국심은 길러서는 안 되고 억제해야 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정서로서의 애국심은 해롭고 신조로서의 애국주의는 우둔한 것으로 우리를 화합시키기 보다는 이질화시키기 때문에 그는 호전적, 전체주의적 애국주의 뿐 아니라 애국 그 자체를 부정했다.
또 그는 애국주의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면 이는 동시에 타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라 보았다. 자국이 타국에 우선한다는 주장이나 자국민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갖는 애국주의는 인류애에 반하고 따라서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국에 대한 공격을 합리화하는 애국주의는 악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러시아 민중의 땀과 노동으로 무위도식하는 탐욕스런 러시아 귀족을 비판하는 동시에 귀족이 결정하고 민중을 사지로 내몰게 되는 전쟁에 민중들은 비폭력주의와 병역거부로 맞설 것을 주문했다.
국가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헌신
우리는 국가의 중요성과 국가에 대한 사랑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근대 초기 식민 경험과 이후 전쟁 경험을 거치며 국가는 한국인에게 국가 이상의 그 무엇이었고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다른 모든 기능을 초월하여 계급지배를 유지하는 제도라 했다. 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관철시키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독점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정치 기구라 했다. 그리고 그 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사용을 독점한 조직이라 했다. 이러한 표현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여기에서 별로 틀림이 없다.
우리는 지금 국가의 틀 안에서 살고 있다. 이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고 숙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와 인식은 이러한 지리적, 법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종종 국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때론 부산적, 광주적으로, 때론 민족적으로, 때론 아시아적으로, 때론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애정 못지않게 지역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 세계애가 필요한 시대다.
정대세는 '빨갱이'인가
▲정대세의 눈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에, 누군가는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연합뉴스 |
그런데 그 정대세는 분명 남한 국적임에도 북한 축구대표팀으로 출전해 월드컵에서 뛰고 있다. 그렇다면 정대세는 '좌빨'인가. 안영학은 케이리그 팀인 부산아이파크와 수원삼성에서 뛰다가 지금 북한팀에서 뛰고 있다. 북한을 위해 뛰고 있다. '귀순'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영학은 '빨갱이'인가. 아니, 세상에, 정대세, 안영학 같은 초특급, 슈퍼 울트라 '좌빨 빨갱이'가 또 있을까. 정대세의 형(정이세)도 남한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형은 북한과 내통하는 것은 아닐까. 국정원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보안법은 어디 갔나.
우리는 정대세가 브라질과의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펑펑 우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그 눈물을 궁금해 했다. 많은 이들이 이를 다양하게 '분석'했지만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희망과 아픔의 뒤범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경기에서 멋진 헤딩 패스로 지윤남의 통쾌한 득점을 도운 것을 두고 북한을 고무, 찬양한 것이라며 보안법을 들이대진 않을 것이다. 우리 국민이 북한팀의 선전에 박수를 보냈다 해서 잡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떠들어 대는 애국심으로 우리들을 구분 짓지 말자. 우리 스스로 우리를 갈라놓지 말자. 그것은 저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사는 동네를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북쪽에 있는 사람이든 멀리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이든 그들을 미워하고 무찔러야 할 대상이 아닌,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볼 때 우리의 하루는 가볍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무겁고 고단한 삶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공동체에 자신의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다. 일부 정치인들이 애국심으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조종하려는 시도에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정치화, 상업화 된 애국심
이미 80년대 말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줄고 미국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나이키 신고 반미를 외치는 요상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저기서 애국주의가 비집고 등장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국산 브랜드 커피점보다는 스타벅스에 중독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다.
요즘 애국은 유행이고 트렌드다. '인스턴트 애국'이다. 지금 국내 월드컵 현상만 봐도 기업들이 애국을 가지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대~한민국'은 재벌기업의 마케팅 도구로 전락했다. 19세기 톨스토이도 애국주의가 이런 식으로까지 활용될 거라 미처 예상 못했을 것이다. 태극기가 일부 노출증 젊은이들의 패션 아이템이 된 마당이다. 굳이 애국심으로 따지자면 지금 우리의 애국심은 임진왜란, 한일병합 때보다 나을 게 있을까.
2010년 6월, 정치인이 애국심을 외치고 기업은 '대한민국'으로 돈을 번다. 나는 이들의 애국을 거부한다.
▲월드컵 응원전은 기업이 점령했다. 한국에서 애국주의는 가장 좋은 마케팅 기법으로 떠올랐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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