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 독재 정권이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무릎을 치는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아무튼 이 방면의 학자들은 이 진실의 문턱에 거의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기에는 민주주의라는 절대이념의 권위가 이들을 너무나도 압도하고 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기우의 <25시>에 나오는 '잠수함 토끼'처럼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자가 저 스스로 절대이념의 심연을 헤치고 나올 수밖에 없다. 독재 정권의 가시적인 통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공적(公敵)으로 인식되지만, 통제가 내면화하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통제보다는 자기 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가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주역이다. 강제는 항체를 길러주어 건강한 저항을 하게 하지만, 자기 검열이 계속되면 자가 면역에 걸리게 되고 마침내는 항체가 자신을 적으로 인식해 공격한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는 자가 면역 질환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가 자신을 공격해 자멸하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항체가 적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일부러 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오히려 알레르기(자가 면역 질환)가 줄어들듯이, '북핵'(한국) 또는 '테러'(미국) 등의 기생충을 체제 내로 끌어들임으로써 자본주의(우리 논의에서는 '합리성의 메커니즘')는 피할 수 없는 자기 붕괴의 위기를 연기시키고 있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곧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다. 보도, 거래, 계약, 토론 등 언어 생활의 공적인 부분은 '생각'이 아닌 '팩트', 곧 '사실'을 요구한다. 팩트는 증명 체계에서 근거로 작용한다. 누가 대학 등록금이 비싸다는 의견을 말할 때 '팩트'가 아닌 '생각'을 얘기하면 공적 효력을 상실한 채 사적인 견해로 떨어져버린다. 공적인 부분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사적인 부분은 이성의 성(城) 밖의 천민 구역처럼 취급당한다.
팩트와 증명에 의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겠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천안함 침몰을 들 수 있다.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이 내용은 차차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증명 작업은 언제나 뒷북을 치게 마련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활약으로 악당들이 다 죽고 상황이 끝난 뒤에야 사이렌 울리며 몰려오는 군경(軍警)처럼.
"여러분은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삽니까?"
공포가 느껴지는 정치적인 사안 등은 제외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구체적으로 물어보겠다.
"미나리가 얼마나 몸에 좋아요?" 이렇게 물으면, "향이 좋아 식욕을 돋우고, 매운탕 끓일 때 넣으면 숙취에 좋고, 아마 간에도 좋다는 것 같던데······."
이렇게 평소 생각한 것 또는 아는 것을 말하더라도, 상대가 조금만 전문적인 지식을 꺼내면 그만 주눅이 들어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주 세세한 분야에까지 오만 가지 전문가가 있어서, 일반인의 말은 살아 있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초라한 낙엽 신세다. 자기 생각을 활기차게 표현하지 못한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말에는 생명이 없다.
인간에게 사물은 말을 매개로 해서만 인식된다. 예컨대 돌은 '돌이라는 말'을 떠나서는 동물 수준에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의미이므로 자연히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데, 의미란 다름 아닌 가상이다. (2부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가상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말의 세계'를 근거를 명확히 하는 증명 체계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기만'인데, 지금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식이다. 교육을 받은 현대인은 모두 합리성에 입각해 사회 활동을 하고 있어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스스로가 배척한다. 세상이 확고한 근거 위에서 움직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 착각이 일종의 신앙(믿음)에서 온 것인데도 '객관적 사실'로 믿고 있다. 때문에 말의 세계를 증명 체계로 움직이려 하는 근대 체계를 위해 자신과 타인을 불철주야 감시하며 통제한다.
말을 지배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잘 알려진 경구가 미진하게 들릴 정도로 현대의 언론은 기능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가동시키는 표제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예컨대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는 책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표제에 해당한다는 것으로, 입법·사법·행정에 이어 언론이 제4부의 권력이라든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다.
사전적으로 '언론'에는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나 글' 또는 '언론기관을 통한 활동',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사회의 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말을 언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후자만이 언론 행세를 하는 사이, 전자는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유랑자처럼 떠돈다. 말이 힘을 잃은 시대는 육체도 영혼도 없고 그림자만 있는 시대다.
ⓒ김용철 |
현대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거의 폐인 수준에 가깝다. 팩트를 말하도록 길들여진데다가, 팩트를 말하느냐 아니면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떠드느냐가 사회적인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층민은 중·상층보다, 촌사람들은 도시인보다, 일반인은 전문가보다, 아이는 어른보다 '팩트로 말하는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팩트를 말하는 목소리는 재미없고 무미건조하다. 풍부한 육질이 느껴지지 않아 씹는 맛이 제로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말을 할 때도 논문투를 연상시키는 문어체를 사용하는 까닭에 마치 표준화한 공산품처럼 느껴진다. 말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모두들 비슷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제품 매뉴얼을 읽는 기계음 같은 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요즘에는 <롤러코스터>라는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 그런 목소리가 유행하고 있다. 어느덧 현대인들은 감정이 배제된 소리를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추종한 나머지 생물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말끝에 "~인 것 같다" "~해 보인다" "~일지도 모른다" 같은 말을 많이 쓰는 것도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결과다. 자신의 생각을 팩트화하려면 '증명을 기다리는 어투'(~일지 모른다)가 객관적으로 보여 자기도 모르게 쓰게 되는 반면, '단정하는 말'(~이다)은 독단적인 성격 또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비합리적인 인격으로 낙인찍히기 쉬우므로 피하게 된다. 덕분에 세상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인간들로 넘쳐나고 있다.
각 개인의 육체가 내뿜는 생명의 에너지는 합리적인 어법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고 되레 억압될 뿐이다. 그것은 사물과 자유자재로 소통·변신하고, 시공을 넘나들며,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과 합리적인 어법 바깥에 있는 웃음과 익살과 풍자와 열변과 쾌변, 그로테스크한 과장 같은 야생의 표현 속에서만 만족할 수 있다. 현대인은 육체가 내뿜고 싶어 하는 '에너지로 충만한 말'을 이성이 통제하는 기형적인 상태에서 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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