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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가 혼자서 못 깨어난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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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가 혼자서 못 깨어난 진짜 이유는?

[김영종의 '잡설'·12] 소비 시대의 미학 ④

소비 시대의 미학 ④

예술 분야 내부로 들어가 살펴보면, 미술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인테리어든 소설이든 사진이든 시적 분위기가 들어가면 장사는 잘될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C급으로 전락해버린다. 워낙 중요한 논의이므로 여기서도 두어 가지 정도는 예를 들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사진은 다큐멘터리의 전통이 강하다. <미명의 새벽>은 전시기획자 진동선의 말처럼 한국 사진의 주춧돌이 되었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일곱 명의 작품을 모아놓은 사진집이다. 작가는 강운구·김기찬·육명심·주명덕·한정식·홍순태·황규태이며, 시대 배경은 개발 독재가 한창이던 1960~70년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대에 맞선 작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관망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시대의 풍경화다. 시대를 질러 들어가는 작가의 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 옛이야기에서처럼 호랑이 뱃속에 들어가 간이나 콩팥을 따 먹는 변형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징의 기호를 찾아볼 수 없다. 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성은 모더니즘 미학의 미덕인 '내면화'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언뜻 보기에 내면화=주관성, 외면화=객관성으로 이해되지만 작업 현장에서는 정반대다. 작가들이 한결같이 시니피앙(이미지의 표면)에서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시니피에(이미지의 의미)는 내면화로 작업했기 때문에 이미지는 모두 풍경화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독특성은 보이지 않고 화면 전체를 매너리즘이 지배한다.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헤게모니에 지배된다. 이들에게 헤게모니는 넓게는 공기와 같은 시적 분위기이고, 좁게는 동아사진콘테스트를 비롯한 당시의 규범적 사진 미학이다. 작가의 주관성은 구체적으로 이 헤게모니와 싸우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내면화는 사진의 이미지를 향수로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사실 향수야말로 다큐멘터리 사진의 적이다. "향수가 역사를 대체해 부드러운 회상으로 감정을 사로잡으면, 파괴자는 책임을 면제받고 그가 마치 구경꾼인 것처럼 되어버린다." (<난곡 이야기>, 김영종 지음, 청년사 펴냄, 94쪽)

물론 <미명의 새벽>에 실린 작품이 다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나 '고발'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도 위상이 다르지 않으며, 단지 경우만 다를 뿐이다. "예술성과 격 그리고 창작 의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시대인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본다. 전시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전시기획자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영화가 소설에 비유된다면 사진은 시에 비유된다. 그러나 시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현실에서 사진이 서사성을 찾는 문제는 용어부터가 낯설기만 하다.

국악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겠다. 창작곡 분야에서 가야금의 황병기와 신예 작가들이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데, 이 또한 앞서 말한 다른 분야와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산조는 서사성이 가장 높은 수준에까지 도달한 양식이다. 시나위와 판소리에서 나왔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산조 정신의 계승은 창작자가 내면의 외면화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황병기의 초현실주의는 반대로 외적인 것을 내면화하는 작업이다. 국악의 내면화 작업은 다른 장르에 견주어 현대화, 고급화, 세계화로 규정될 위험 요소를 훨씬 많이 안고 있다.

앞의 글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에서 산조 정신의 내면화가 현대화 내지 세계화로 비칠 위험에 대해서는 충분히 지적하였다. 창작곡 거개가 시적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뭣보다 산조의 광대(예능인)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기방과 잔칫집, 장터, 굿판에서 놀았던 광대의 소리와 연주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이다.

거칠고 탁한 소리가 실종돼가고 그 자리를 매끄럽고 맑은 목소리가 대체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광대성에 대한 기피', 그리고 '서양 클래식처럼 고급 음악의 대우를 받고 싶은 욕구'와 관련이 깊다. 이런 분위기 속에선 '시적 서정'이 산조정신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가장 손쉬운 도피처다.

지금 우리 국악계는 전통을 고수하자는 보수주의자의 입장과 현대화를 추구하자는 진보주의자의 입장(교육계를 비롯한 엘리트 그룹)으로 갈려 있다. 국악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 구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있다. 그러지 않으면 비생산적인 논의만 어지러울 뿐더러, 산조 정신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우려된다.

다른 장르의 예를 빌려와 부족하나마 내 견해를 보완해보겠다.

카프카는 옛이야기의 특성인 내면의 외면화를 통해 가장 현대적인 작품을 썼다. 얼핏 그의 작품은 외적인 것을 내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심리를 말로 표현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서사 문학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내면화로 읽히는 이유는 옛이야기와 달리, 매트릭스처럼 개인들이 인식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세계가 카프카의 주인공들을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옛이야기에서는 마음껏 들락거린다). 그래서 개인들의 불안하고 절망적인 행동은 현대인의 심리로 읽히는 것이다. 내가 이정표로서 제안하는 '현대적인 내면의 외면화 작업'이란 바로 이와 같다.

이제 드디어 문제의 장본인 앞에 섰다. 바로 뫼비우스 띠인 '사춘기의 정신적 원형성'. 띠의 한쪽 면은 자아이고 한쪽 면은 세상이어서 최고의 발전형인 나선형으로 진보해간다 해도 영원히 에고이즘을 벗어날 수 없다. 띠 자체가 에고이즘('사춘기의 정신적 원형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비 시대 미학의 기하학적 표상인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김용철

그러면 <찔레꽃 공주> 이야기로 이 장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는데, 개구리의 도움 덕분에 왕비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왕비는 예쁜 딸을 낳았다. 왕은 잔치를 벌여 많은 사람을 초대했으며, 아이에게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줄 수 있도록 요정들도 초청했다. 그러나 요정은 열세 명인데 금접시가 열두 개밖에 없어서 요정 한 명을 초대하지 못했다.

잔치는 아주 호화로웠다. 요정들이 아기에게 차례차례 기적의 선물을 주며 축복해주었다. 그런데 열한 번째 요정이 축복을 막 마쳤을 때, 열세 번째 요정이 불쑥 들어와 공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공주는 열다섯 살 때 물렛가락에 찔려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모두들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열두 번째 요정이 앞으로 나와 그 저주를 누그러뜨려주었다.

"공주는 죽는 대신 10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왕은 이 불행을 막고자 자신의 왕국에 있는 물렛가락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아무튼 요정들이 공주에게 빌어준 기적의 축복은 모두 이루어졌다. 공주는 아름답고 착하고 총명하고 상냥해서, 어느 누구도 공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불행히도 열세 번째 요정의 저주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공주는 물렛가락에 찔렸으며, 곧 마법의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왕도, 왕비도, 신하들도, 온 백성도, 심지어 아궁이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던 불꽃까지 조용해지더니 잠이 들었다.

성 둘레에는 가시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그곳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왕자들은 비참하게도 죽을 때까지 가시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

정확하게 100년 뒤, 어느 용감한 왕자가 나타나 양치기 노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성으로 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으로 가는 길은 가시덤불 대신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왕자가 다가가자 꽃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비켜주었다가, 왕자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합쳐져 산울타리가 되었다. 성안으로 들어간 왕자는 탑에서 잠들어 있는 공주를 발견하고는, 어찌나 예쁘던지 공주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드디어 오랜 잠 끝에 공주가 깨어나고, 뒤이어 온 궁정이 함께 깨어났다.

왕자와 찔레꽃 공주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 뒤, 아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옛이야기는 열려 있다. 텍스트는 얼마든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내 나름의 해석인데, <찔레꽃 공주>에서 사춘기를 맞은 소녀의 성장통이 개인적인 사건을 넘어 어떻게 세상으로 확대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소녀는 열다섯 살에 사춘기를 맞아 자기 안으로 꽁꽁 숨는다. 마치 씨앗 한 알이 땅속에 깊이 숨되 땅을 뚫고 나올 때는 어른이 돼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처럼, 소녀도 그런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소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요정의 저주, 곧 필연으로 인한 것이다.

소녀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동안 성안의 모든 것은 활동을 멈춘다. 성은 소녀의 자기 세계다. 소녀는 아직 바깥세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나이다. 소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성안도 모두 잠들어버린다. 소녀한테는 자기 세계만이 우주인 것이다.

성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소녀를 잠에서 깨울 수 없다. 100년 동안은 바깥세상 사람도 소녀를 깨울 수 없다. 저주가 풀릴 때까지는 외부의 구원자도 모두 가시덤불에 걸려 죽게 된다. 이 시기에는 오직 잠만 잘 수밖에 없으니, 인간의 의지가 무용한 지점이라 하겠다. 운명을 거부하는 자라도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처럼, 열다섯 소녀의 잠(성장통) 또한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꿈은 소녀가 꾸지만, 잠에는 소녀의 의지가 털끝만큼도 미칠 수가 없다. 이 옛이야기에서는 소녀가 꿈을 꾸는지 안 꾸었는지, 또한 무슨 꿈을 꾸었는지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 스토리 전개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도 소녀의 성장통을 '과정'으로서 언급하고 있는 지금, 소녀가 자기 안에 꼭꼭 숨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불면의 밤을 지새웠는지,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하고 있었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소녀가 깨어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소녀는 때가 되어 성안의 사람이 아니라 성 밖의 왕자가 입을 맞추자 깨어났다. 소녀의 잠을 깨울 사람은 반드시 소녀의 자기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녀가 자기 세계에만 둘러싸여 있다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성장통을 겪는 것은 운명이지만 깨어나기 위해선 타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가 꼽추건 난쟁이건, 소녀를 깨운 사람은 소녀에게는 특별한 타자(他者)다. 찔레꽃 공주 텍스트에서 왕자는 '특별한 타자'를 상징한다. 이 왕자는 소녀와 소녀의 세계, 즉 부모도, 친구도, 정원도, 아궁이의 불도, 벽에 붙은 파리까지도 모두 다시 깨어나게 했다.

무릇 사람은 깨어나는 순간 자기만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생동감 넘치며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시작할 때처럼. 그러나 소녀는 아직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이므로, 이 텍스트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소녀의 세계는 타자를 통하여 타자가 있던 성 밖의 세상으로까지 확대된다. 소녀는 축복 속에 왕자와 결혼을 하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어른은 자기 세계 안에서 나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다. 난관에 봉착하면 이 경험을 거울삼아 의연히 겪어낸다. 여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타자이다. 이 타자는 자아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동료일 수도 있고 어린애일 수도 있고 이미 죽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태어나지 않은 후손일 수도 있으며, 거지나 부자나 정신병자일 수도 있고 새나 나무일 수도 있다.

현대는 자아 속에 잠든 나를 깨우는 타자가 없는 세계다. 성년식 같은 통과의례마저 없어져버린 나머지 자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며, 자꾸만 자기 안으로 기어들어가 결국 임종 때 이르러서는 완전한 에고 덩어리로 최후를 맞는다.

이 에고 덩어리를 어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는 어른이 돼보지도 못하고 죽는 불행한 시대다. 소비 시대의 미학은 인간이 어른으로 살 수 없게끔 찔레꽃 공주의 교훈마저 왜곡한다. '찔레꽃 공주'는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라고, 자아 외에는 아무도 잠자는 공주를 깨울 수 없다고, 왕자도 결혼도 깨어난 자아가 선택하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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