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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인공들의 공통점…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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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인공들의 공통점…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아이?

[김영종의 '잡설'·11] 소비 시대의 미학 ③

소비 시대의 미학 ③

둘째, '작가 데이트'는 헤게모니를 옹호하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내게는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습성이 있다. '광야를 경험한 자'와 '광야를 모르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미망과 허울을 전부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세에서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하는 시간적·공간적 배경인 셈이다. 예수도 부처도 한 시절 광야를 거친 연약한 인간이었다. '소설가 서유미'와 만나고 나서 나는 그녀가 광야에 선 경험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광야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기가 막히는데, 이는 헤게모니권 안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아닌가 싶다. 광야는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헤게모니권 바깥을 가리킨다. 작자 해이수도 그런 의미로 썼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작자의 의도와는 반대로 헤게모니권 안을 가리키는 정반대 결과가 돼버렸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헤게모니를 옹호하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런 전도(顚倒)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부터 바로잡자면, 예수도 부처도 광야에서 '세상'과 발가벗고 대면했지 결코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한 적이 없다. 광야는 세상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기 위해 자아의 번데기 밖으로 나오는 거듭남의 장소다. 이것이 마치 '발가벗은 자아와의 대면'처럼 보일 수 있는 까닭은 유심론(唯心論)의 맹위가 워낙 커서 '세상이 자아 속에 있다'는 오래된 속임수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자도 다르지 않다.

전도의 구체적인 결과는 이렇다.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하는 것은 곧 헤게모니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 과연 어느 독자가 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실직한 작중 화자 연수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두 번째 사춘기를 맞는 심정으로 졸업한 대학교를 찾아간다. 처음으로 자아에 충실했던 사춘기 때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 당시 외모나 연애 외에는 관심이 없는 속물적인 사촌을 보면서, 정신적인 성숙을 위해 음악을 들으며 새벽까지 잠들지 않은 채 깨어 있는 자신이야말로 사춘기를 겪는 거라고 믿었다. 어떤 사유나 고민도 정신적 성숙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고민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연수의 성격은 성인(成人)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작중 화자는 육체적 성숙과 정신적 성숙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서 사춘기를 후자를 위한 절대적인 시간으로 여긴다. 따라서 사춘기는 번데기에서 벗어나 나방이 되는 통과점이다. 연수는 그런 사춘기를 겪지 않은 사촌 연재가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 이분법은 견고하여, 실직을 앞두고 사표를 내던진 뒤 작중 화자 연수는 자기를 되찾기 위해 다시금 사춘기로 돌아간다. 작자가 작가한테서 확인한 '광야'란 바로 이 사춘기다.

그러나 그들이 평가하는 것과 달리, 사춘기는 육체적 성숙이 두드러지는 데 반해 정신적 성숙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생긴 불균형으로 인해 '에고'(자아)에 과부하가 걸리는 특성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아직 어리다는 얘기다. 이 시기에 유별나게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불균형을 해소함으로써 어른의 몸으로 타자의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산에 올라갔으면 내려가야 하듯, 사춘기에 자아를 온몸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자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서른세 살의 작중 화자가 인생의 난관을 세상과 부딪쳐서 뚫고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금 자아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사춘기의 통과 의례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부추기는 소비 시대 미학이다. '광야'를 들먹거리며 예수도 부처도 거듭 되돌아와 새롭게 태어나는 재생의 장소라면서 사춘기의 에고이즘을 마치 그런 '정신성의 원형'인 양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어지는 2절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이 '현혹'이야말로 좁게는 문화 장사꾼들이 넓게는 자본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갖 추악한 소비 현실을 만들어내는 허영의 시장이다. 여기서 여우꼬리가 현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낸다. 백화점, 인사동, 청담동, 로데오 거리, 학교 앞 작은 카페 그리고 아파트의 작은 방에 이르기까지 이 환영이 어른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무한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된 작중 화자 연수는 인생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마치 성지 순례자처럼 사춘기의 정신 상태로 돌아간다. 연수는 영화 비평 공모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녀가 정말 원하는 영화 비평도 사춘기적인 정신 상태로는 영화 자체가 아닌 자아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응모를 준비하는 과정은 '나를 향한 주파수'라는 장에서 실감나게 그려지는데, 작가가 제목을 얼마나 적절하게 뽑았는지 참으로 놀랍다.

'나' 말고는 중요한 게 없고, 중요하더라도 '나'를 위해 중요한, 인생에서 가장 자기중심적인 시기가 사춘기라는 것은 독자 여러분이 두루 경험해봐서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런 정신 상태에 놓인 주인공에게 영화 비평이 그렇듯, 작가 서유미에게도 ('작가 데이트'에서 확인된 것처럼) 소설 쓰기는 자아실현의 수단이다.

주인공이 영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서 공모에 당선돼야 하는 것처럼, 작가도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공모에 당선돼야 한다. 이들한테 영화 비평이나 소설에서 다루는 세상은 당선을 위한 세상이다. 이들은 애당초 당선되지 않을 세상은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작품 속의 세상은 헤게모니가 평가하는 세상이다. 이들이 작품을 쓰고 작품을 만드는 것은 헤게모니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주인공과 작가는 바깥세상과 대면하는 대신 자아를 응시한다. 앞서 본 '삶의 구겨진 여백에 대한 응시'라는 것은 차라리 ⓑ가 아니라 '자아'라 하는 편이 옳다. 바로 이것, 그러니까 자아의 재발견을 통한 자아실현이 주인공과 작가에게는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진정한 세상이다. 그래서 이들은 헤게모니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에서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자는 작가를 만나 그 사실을 체크했다. 작자는 "그래,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며 문인다운 시적 감개에 젖어, "작가가 기꺼이 가장 낮은 자세로 임했다"는 관찰 기록을 남겼다. 이는 예수회를 능가하는, 헤게모니에 대한 구성원의 충성도 평가로 보인다.

작자 : 이번 수상작의 집필 배경과 모티브는?
작가 : (······) 삶이란 자신을 향해 일보 전진하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작자는 작가 서유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녀는 광야를 거쳐 어느덧 삶에 대해 매우 간명한 철학을 지니게 된 사람으로 보였다."

그저 이 결론이 헤게모니로 들어간 자의 간명한 철학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철학인지는 부연설명하지 않겠다.

장편소설의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창비장편소설상은 '서사 정신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서사 정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서사가 '자아'에 있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출판사야 사업하는 곳이라서 그런다손 치더라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걸출한 평론가, 문인들이 이런 이율배반적인 일을 백주대낮에 드러내놓고 하는 걸 보면 쓰디 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김용철

2

라디오에서 배경음악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시민들의 수많은 사연은 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음속 구겨진 여백'을 담담히 채워준다. 이것들은 모두 형식만 갖추면 시(詩)다. 라디오의 여러 프로그램은 시집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시적 분위기는 사회 어디에나 공기처럼 존재한다. 소시민이 소비 시대에 갇혀 있는 것을 조금도 자각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공기 같은 시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마치 공기를 호흡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각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사춘기의 정신적 원형성에 주파수가 맞춰진 소비 시대의 미학은 이러한 공기 같은 시적 분위기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특별히 시가 소비 현실의 주역을 맡게 된 이유가 있다. 위에서 "사춘기의 자아(에고이즘)를 마치 '정신성의 원형'인 양 현혹하고 있는 이 '현혹'이야말로 좁게는 문화장사꾼들이 넓게는 자본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갖 추악한 소비 현실을 만들어내는 허영의 시장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날 시가 그 '정신적 원형'(사춘기의 자아)을 토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자아라는 내면의 응시'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현재의 시는 궤도를 이탈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시가 고유의 서사성을 내던지고 내면화로만 치달은 끝에 마치 동굴 안에 감춰둔 '권력의 반지'(이를테면 자본주의)를 지키는 용처럼 돼버렸다. 우리는 이 용[詩]을 죽여 반지를 자연에 돌려주어야 한다.

"시의 전범(典範)은 옛이야기다. 옛이야기가 진정한 시문학이자 시문학의 궁극 형식"(막스 뤼티)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일반적으로 쉽지 않다. 교훈적이고 직설적인 옛이야기와 상징적이고 다차원적인 시문학이 잘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옛이야기는 외면적이고 시문학은 내면적이라는 오래된 오해의 결과다.

예컨대 시인이 파도가 되고 나비가 되려면 서사시나 옛이야기 등의 서사 문학에 담긴 '세계 변형의 능력'을 물려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변형의 능력이야말로 외면성이다. 현실 속에서 변형과 기적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하나로 일어나는 서사의 세계는 향유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세계다.

서정시에서는 그런 능력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신 은유나 상징이 된다. 그렇다고 시어의 '비유와 상징'이 외면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우주적 소통이라는 시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외적 지향성을 꿈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가 되어 님의 눈물이 되고 햇살이 되어 님의 기쁨이 되는가 하면, 거대한 파도는 분노한 민중이 된다.

현실 변형의 능력을 완전히 포기한 채 꿈꾸지도 않고 관념 속으로 퇴행할 경우, 시어 속의 비유와 상징은 더 이상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자폐증 환자가 실내에서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언어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소비 시대의 미학이 '정신성의 원형'인 양 현혹하고 있는 '사춘기의 에고'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적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폐증 환자와 똑같은 증상을 경험한다. 이때 시의 '비유와 상징'은 '자아라는 내면을 응시'한 결과로서 자신 안의 우주를 사춘기적 자기애로 노래하는 사치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시의 본령은 서사이며, 그 본성은 외면성이다. 이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시가 다시 사는 길일 뿐 아니라 세상이 다시 사는 길이다. 옛날에는 시를 채집하는 관리가 각 지방의 시를 모아 민심을 알아냈을 만큼 시는 세상의 정신 상태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시는 세상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여우꼬리가 되고 말았다. 소비 시대 안에서만 사람들을 놀게 홀리는 여우꼬리 말이다.

그 폐해를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자. 부호 안에 든 문구는 시적 이미지들이다. '연탄난로 위의 도시락'은 개발독재를 미화하고, '비상을 꿈꾸는 갈매기'는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고, '소외감'의 남발은 위로의 상품을 찾게 만들고, '국밥집 할머니'는 선거를 왜곡하고, '엄마를 부탁해'는 사회안전망을 위협하고,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건네는 온정'은 록펠러 문화재단의 인류애를 선전한다.

나는 이미지의 역기능만을 말했지만 이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권력자들이 죄 없는 이미지를 악용한 탓일까? 아니다. 자아의 우주에서 생산된 이런 이미지들은 근원적으로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생산자 개인을 위한 것이다. 자아실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두 감상자 또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다. 생산자 자신마저도.

이 모든 생산물을 자본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한다.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풍기는 시적 분위기가 공기와 같아서 용도를 미처 자각할 수가 없다. 시적 분위기는 이미지 안에 들어 있는 상징과 은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적 분위기는 정확히 사춘기의 '정신적 원형성'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 (다음 논의로 나아가기 위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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