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저 '~체하는 속물근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저 '~체하는 속물근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김영종의 '잡설'·10] 소비 시대의 미학 ②

소비 시대의 미학 ②

그러면 심사위원들이 언급하지 못한 환멸적인 일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문학과 예술의 본령은 축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 축제, 디오니소스 축제, 바보 축제 그리고 우리 민속의 백중(머슴들의 축제)에서는 우주의 재탄생, 새로운 시작, 역할 바꾸기를 통해 기존 질서의 전복, 해방의 기쁨, 풍자와 익살, 환상과 도취의 세상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축제 기간 내내 행해지는 '가상의 활동'이다.

축제와 함께 가상의 활동이 끝나면 일상의 현실로 돌아가지만, 다시 맞이한 일상은 당연히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찬다. 축제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이 아무리 우리한테 좋은 보상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인생의 지상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일신상의 충족을 만족시키는 데 공헌할 따름이기 때문에 노동이 전혀 없는 기간을 주기적으로 설정해 전래의 풍속을 쫒으면서 인간적 환락의 한 때를 즐겨왔다. 이것이 축제의 의의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은 인간적 생활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축제 자체가 목적인 것이요, 이를 통해 일상이 새로운 에너지로 다시금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하비 콕스, <바보제>)


소설이 목적으로 삼는 일상은 이와 같다. 소설을 픽션이라 일컫는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소설이 '가상의 활동'을 다루기 때문이다. 소설의 미덕은 축제처럼 환멸적인 일상을 가상의 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케 하는 데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만으로 축제('바보제' 같은 제의적인 축제)에서 경험한 '일상'을 맞을 수는 없다. 주인공과 독자들이 선망하는 그 직업에 도달한 심사위원 스스로가 지금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지 증언해주기 바란다.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기에 '주인공의 나이에 겪게 되는 또 다른 성장통이 가져다준 담담한 결심'이라고 고쳐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진정한 행복이란 단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초기에 생겨나 오늘날까지 가장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 '공리주의(=행복주의)의 최대다수 최대행복'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강변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행복이 물질적인 원인에 따라 좌우될 때 자유는 없다는 것, 노예화만 가속화될 뿐이라는 것을 자본주의의 현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은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멸적인 일상 너머에 설정하는 전망, 예컨대 그토록 원하는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의 현장인 바닷가에서 춤추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축제성이 바로 그 환멸적인 일상 너머에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축제성이야말로 소비 시대의 벽 바깥이다.

조르바는 박자를 맞추느라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조르바와 동업자인 주인공 '나'는 춤을 춘 뒤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애 그 같은 기쁨은 누려본 적이 없었다. (중략)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중략)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이 당선작 <쿨하게 한걸음>을 가지고 어떻게 소비 문학에 기여했는지 살펴보았다. 나의 비판이 심사평에서 말한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여는 데 실제로 기여했으면 한다.

다음으로 '작가 데이트'를 보자.

헤게모니를 농락함으로써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소설의 미덕일 것이다. 근대소설의 태동에 악동 소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악한, 광대, 바보는 현재의 질서와 가치를 고착화하는,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을 농락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존재다. 이들을 농락함으로써 고착되어 있는 현재는 미완결의 현재가 되고, 그에 따라 변화 가능한 현실이 독자 앞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다.

그런데 '작가 데이트'를 쓴 작자(이하 작자)는 당선자가 헤게모니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고, 입성을 위해 그 혹독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묻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작가 서유미가 작자 해이수에게 말한다.

"선배, 어느새 십 년이야. 나 97년에 대학 문학상 받을 때, 소설가로 살기로 결심했었거든. 아마 그때 누가 '너 십 년 뒤에는 반드시 되니까 소설 계속 쓸래?' 하고 물었으면 절대 아니라고 했을 거야. 어쩌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내년이면 되겠지 내년이면. 그렇게 꿈을 꾸면서·······."

이 말을 듣고 작자는 이렇게 감동어린 생각을 한다.

'그래,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이게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인가.

작가가 오래 흔들린 건 작품의 치열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험생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시련이나 마찬가지다. 당선자와의 대담인 만큼 형식상 후자를 통해 전자를 말하려는 것이라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어불성설이다.

첫째, 소설가인 체하는 작자의 글쓰기 투.

㉠ "수상작에 대한 내 개인적인 독후감은 '삶의 구겨진 여백에 대한 응시'로 요약된다."

대담 전체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삶의 구겨진 여백에 대한 응시'ⓐ라는 문학적인 수사는 뒤이어 다음의 알기 쉬운 문장으로 설명된다. "얼핏 보면 정상 같고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문제투성이인 데다가 애초 설계부터 부실한 인간군상의 초조한 시간, 그것도 구겨진 채 비워진 삶의 한 시기를 안정적인 시각으로 포착해낸 소설이었다."ⓑ

나는 처음 ⓐ를 대하고 약간 겁을 먹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삶의 구겨진 여백에 대한 응시'라니, 정말 그럴듯하지 않는가? 이 한마디로 독자는 작품의 문학성에 감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권위 아래 놓인다. 그 권위에 휩싸여 ⓑ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서 자리 잡게 된다.

독자가 헤게모니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를 배제하고 문학적 수사가 빠진 ⓑ와 대화해야 한다. 그럴 경우, ⓑ의 '비워진'이라는 단어를 과연 쓸 수 있을까? 여백은 일에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은 탈락의 공포 속에 있기 때문에 전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주인공은 '애초 설계부터 부실한 인간군상'ⓑ이 아니다. 이들의 인생을 누가 설계한다는 걸까? 주인공 자신? 사회? 아니면 신? 대담을 읽어보면, 주인공 각자가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외부 세계와 관련 없이 오직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글 '성기 관망파 예술'에서 보았듯이, 건축가는 청사진에 따라 집을 짓는 창조주적 롤 모델이다. 작자 해이수에게 '개인'은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창조하는 건축가적 신이다. 개인이 신처럼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는 발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 신은 모든 것을 자아 속에서 극복해야 하며, 이전의 부실한 설계를 자아를 통해 리모델링해야 한다. 이 신이 행하는 건축 행위의 이름은 '성장통'이다.

사회의 낙오자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30대 여성 연수(주인공)의 실직이 어떻게 인생의 '여백'일 수 있을까? 주인공 동남은 그런 '여백'의 시간에 성장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살아내야 할 삶은 환멸적인 일상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족쇄 채워진 삶이다. 이들의 낙오는 불연속선의 '여백'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무한경쟁을 해야만 하는 연속선상의 '사건'인 것이다.

주인공 연수가 설계가 부실해서 실직한 것이라고 공감하게 만드는 예술이 바로 소비 시대의 미학이다. 이 미학에 젖으면, 실직이라는 사회적인 문제가 사춘기적인 성장통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럴 경우 사회에서 도태되는 고통의 시간은 당연히 개인의 성장통을 위한 여백으로만 간주되고 만다.

소설가인 체하는 작자의 문학적 수사인 ⓐ에 주눅 든 독자들이 작자의 의도대로 ⓑ를 사춘기적 성장통으로 이해한다면, 현재의 고착화를 주도하는 헤게모니 세력에게는 그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런지는 차차 보게 될 것이다.

㉡ 이제 ⓑ에 바로 뒤이은 "일상에 깊이 잠입하여ⓒ 삶의 좌표를 뒤흔드는 동요와 조바심, 불안과 들뜸을 겪는 인물들의 내면을 담담하게도려냈다ⓔ는 인상을 받았다"라는 문장을 보자.

ⓒ의 '잠입하여'는 여기서 세련된 문학적 수사로 읽힌다. 그런데 '잠입하여'는 일단 ⓓ의 '담담하게'와 어울리지 않다. 또 '담담하게'라는 표현은 작가가 냉혈한이 아닌 한 ⓔ의 '도려냈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 서유미 스스로도 "각각의 인물과 사연이 조각보처럼 이어질 때 조화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결코 일상에 깊이 잠입한 소설이 아니다. 또한 그렇다는 것은 작자 자신도 잘 알고 있다("·····지나치게 소박하고 평범한 이야기로 간주될 수 있다는 평도 있던데" 하고 작자가 묻자, 작가가 바로 위에 인용한 대답을 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런데 왜 '잠입'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아마도 멋스럽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을 텐데, 이는 예기치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보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와 ⓔ의 충돌이다. ⓔ의 '도려냈다'의 경우, 도려낼 만큼 되려면 내가 앞서 진하게 표시한 '뚜렷하게'에 상응할 정도는 돼야 한다.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이들(악한, 광대, 바보)의 농락을 통해 고착된 현재는 미완결의 현재가 되고 그에 따라 변화 가능한 현실이 독자 앞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얽히고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것 아닌가. 이를 모면할 최상의 무기가 문학적 수사요 헤게모니의 권위를 빌리는 일이다. 밑줄 친 세 가지 중에서 유일하게 정확한 표현은 ⓓ의 '담담하게'이다. 수필도 아니고 명색이 소설이, 그것도 '문단의 관심사였던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작가 데이트에서 인용)이 '담담하게'에 그쳐서는 안 되므로 ⓒ와 ⓔ의 문학적 수사를 동원해 '소시민의 구겨진 삶'을 과거와 달리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을 통해(ⓒ) 래디컬하지만(ⓔ) 담담하게(ⓓ) 담아낸 새로운 형식이라는 인상을 풍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소비 시대의 소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오히려 명백해진 것은 아닐까?

ⓒ김용철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5·18 민주화 운동 직후 전두환 정권이 주택 500만 호 건설을 발표하는데, 그 의도는 자기 집 소유를 향한 중간층의 꿈을 실현시켜 체제 내로 편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해서 도시 빈민의 주거 공간을 중간층의 거주지로 대체하기 위한 제5공화국의 이른바 재개발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주인공들인 소시민 없이는 용산 참사를 부른 뉴타운 건설도 없고, 4대강 사업도 없고, 소비 문화도 없고, 소비 시대의 소설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완벽하게 체제내화 되어가는 소시민의 순응적인(소비 지향적인)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초래하는지 문학 헤게모니 바깥의 현실에 눈을 돌려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가뜩이나 ~체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작가 데이트'를 읽으며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을 일으켰다. 지적인 체하는 것을 미학적 용어로 스노비즘(snobbism)이라고 한다. 그것은 실제적인 삶의 절박성과는 아무 관계없이 형식화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풍토에서 나온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일본의 다도나 꽃꽂이, 노가쿠(가면악극) 그리고 사무라이의 자살이 스노비즘의 정점이라면서, "일본인은 모두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잃은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닌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비 펴냄, 176쪽)

과거 명동파를 비롯해 우리 예술계의 '~체하는 속물근성'은 일제 강점기에 흘러들어온 수입품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그 이전 선조들의 글과 예술품에는 그런 속물적인 지적 허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