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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 소설을 보자마자 구토를 일으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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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 소설을 보자마자 구토를 일으킨 이유

[김영종의 '잡설'·9] 소비 시대의 미학 ①

소비 시대의 미학 ①

1

소비 시대는 삶의 수동성, 순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황금만능주의를 지탄하고 인간성 회복 따위를 외치면서 적어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작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각도 질문도 반발도 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가장 첨예해야 할 미학마저 오히려 이를 미화하고 있다. 나는 이 후자의 미학을 다루고자 한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소비 세계를 비판할 외부가 없음으로 해서 현실을 변화시킬 상상력 자체가 생겨날 수 없다. 소비 세계는 바깥 없는 완벽한 우주다. 이 세계 속의 개인은 자기 안에 갇혀 '자아실현'이라는 동력으로 소비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소비 시대의 미학은 자아실현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개인의 좌절과 욕망 그리고 도전을 일상에서의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우주적 사건(소비 세계가 우주이므로)으로 분식한다. 뒤에 보겠지만, 자아실현의 과정을 심지어 예수나 부처의 거듭남으로까지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비판함으로써 얼마나 사태가 심각한지를 독자와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2008년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쿨하게 한걸음>(서유미 지음, 창비 펴냄)을 읽은 뒤 '심사평'과 '작가 데이트'를 보고서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일단 심사평은 엉터리고, 작가 데이트는 구토를 일으켰다. 먼저 심사평을 보겠다.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인물들의 대화를 거쳐 이 소설이 도달하는 것은, 소비 현실의 바깥에서 주변화되는 소시민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가). 그것은 세태 소설의 외피를 통해 거꾸로 세태 소설의 성과를 뒤집는 성과를 보여주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나). 소비 사회의 일상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그려내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위악과 냉소의 화법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미덕을 갖는다(다).

낭만적인 연애와 화려한 결혼, 직업적 성공과 자아실현에 대한 판타지를 가로질러 소설 속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환멸적인 일상 그 자체이다(라). 결혼 적령기의 압박 속에서 실직의 위기에 시달리며, 은퇴한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소외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거한다(마). 우리에게 각별히 다가왔던 것은, 지치고 불안한 현대 여성들의 내면적 욕망을 향한 이 작품의 따뜻하고 정직한 시선 그 자체이다(바). 그것은 소설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실감과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신뢰하게 만들었다(사)." (괄호와 밑줄은 필자)


심사위원은 텍스트가 도달한 성과를 (가)부터 (사)까지 길게 나열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특히 (나)에서 세태 소설의 성과를 뒤집는 성과를 보여주는 지점까지 나아간다고 했는데, 그 지점이 무언지 오리무중이다. 애써 찾아봐도 문맥상으로 (다)의 '위악과 냉소의 화법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이거나 (라)의 '환멸적인 일상 그 자체를 확인한 것' 정도다. 만약 심사위원들이 이 점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시대 인식의 한계를 노출한 것이거나 장삿속에서 나온 속임수일 뿐이다.

첫째, 위악과 냉소의 화법이 수준 낮은 성과라는 건데 과연 그런가? 외려 텍스트의 주인공들에게는 분노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젯거리다. 모두가 체념하는 인물들뿐이니 말이다. 심사위원들은 '위악과 냉소를 넘어선 화법'이 뭔지는 언급하지 않고서, 대신 어물쩍 '작가의 진지한 태도' 운운하며 이 문젯거리를 은폐하고 있다.

전자('위악과 냉소를 넘어선 화법')는 뭔가 작가가 이룩한 성과의 구체성을 지적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후자('작가의 진지한 태도')는 '소비 사회의 일상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그려내는'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마치 전자의 구체성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도, 후자도, 그리고 수식어+후자도 전자와 아무 관련이 없다. 냉철하게 보면 위악과 냉소의 화법도 얼마든지 작가의 진지한 태도에서 나올 수 있으며, 소비 사회의 일상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그려낼 수 있다.

그렇다고 위악과 냉소의 화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심사평의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심사위원은 최원식, 은희경, 성석제, 진정석, 강영숙, 백지연으로 내로라하는 학자 또는 작가들인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걸까? 시대 인식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장삿속 때문일까? 그 이유는 불행하게도 최악의 경우로, 둘 다이다. 이 점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그나마 옳게 평가한 것은 유일하게 (마)뿐이다. 작가는 나름대로 정직하고 그래도 읽을 만한 소설을 쓴 셈이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 대한 결론으로 내린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사)을 되레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심사위원들이다. 무릇 한계를 정확히 짚어낼 때만 작품의 성과가 분명해질 터인데, 엉터리로 포장('마'를 뺀 '가'에서 '사'까지)을 해서 독자와의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

ⓒ김용철

둘째, 심사평에서 세태 소설의 성과를 뒤집는 성과를 보여준 그 지점이라고 말하는 '그 지점'이 아무래도 오리무중인데, 내가 애써 짐작한 (라)가 진정 작가가 넘어선 성과일 수 있을까? '환멸적인 일상 그 자체를 확인한 것'은 작가가 넘어선 성과가 아니라 넘어서야 할 '팩트'이다.

여기에 머무르면, 내가 이 글의 첫머리에 규정한 '소비 시대'에 갇혀버리고 만다. 예술작품은 모름지기 이 벽(소비 시대)에 대한 자각이자 외마디이며, 위악이든 냉소든 풍자든 익살이든 순수한 고발이든 아무튼 벽 허물기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예술 작품은 소비 시대 안에서만 놀게끔 사람들을 홀리는 여우꼬리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넘어서지 못한 게 무엇인지는 텍스트에 분명히 나타난다. 이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주인공)의 서른셋 이후는 과연 어떤 풍경이 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한번 멋지게 꾸려가 보기로 했다.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면서!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이 마지막 말은 '쿨하게 한걸음'이라는 제목이 된다. 그런데 주인공이 쿨하게 내디딜 구체적인 한 걸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른셋에 애인과 헤어지고, 직장에서 잘리기 직전에 사표를 내고, 백수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구직보다는 자기가 정말 무얼 원하는지 찾아보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영화평론가의 길에 도전한다. 바로 이 도전이 '쿨하게' 내디딘 '한걸음'인 것이다.

"나는 도전하고자 하는 무엇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252쪽)

심사평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며 완벽하게 행복하고 안정된 인생이란 없는 것이다. 실업 상태의 주인공 역시 현실적인 취직의 길을 접는 대신 꿈을 살려 영화평론가로 입성하려고 마음먹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주인공의 말대로 '크리스마스의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 나이'인 서른세 살이 겪게 된 또 다른 성장통이 가져다준 담담한 결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서 어물쩍 대체한 것과 유사한 엉터리가 보인다. 바로 밑줄 친 문장인데, 텍스트에서 주인공이 '크리스마스의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 나이'라고 한 것은 주인공이 크리스마스 날 남자와 헤어진 뒤 애정 문제에서 비롯된 자괴감 때문에 나이 푸념을 한 것이지(그래서 "차라리 크리스마스의 저주다"라고 뇌까린다), 심사평에서처럼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마법 같은 게 통하지 않는 나이여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심사평은 불 가져오라는데 물 가져오는 식으로 엉뚱한 데다 자기들의 논리를 성립시키고 있다. 원고를 읽지 않은 걸까, 고의적으로 왜곡한 걸까?

실제로 텍스트는 심사평의 오독(誤讀)을 지적하기라도 하듯, '우리에게 마법이 필요해'라는 장(장 제목도 얼마나 기막힌가)에서 작중 화자는 '자신이 영화 비평 공모에 도전해보려 한 것'이라든가 '자신의 엄마가 때늦게 대학에 가겠다고 나선 것'이 모두 30대뿐 아니라 50대까지도 마법이 통하는 거라고 강조하고 있다.

심사위원들이 왜 이런 착오를 일으킨 것일까? 문학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워낙 심오한 함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볼 때, 아마도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30대나 50대의 마법도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마법과 다르지 않은 '성장통'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서른셋의 나이가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 나이'이면서 동시에 '마법이 통하는 나이'가 되는 표현상의 모순을 뛰어넘어 같은 의미로 해석됐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읽는 맥락이 맞는다고 보고 이를 채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따뜻한 공감과 애정의 시선이라고 긍정(심사평은 바로 뒤이어 이 시선을 '진지한 성찰'이라고까지 말한다)한 것은 심사위원들이 지닌 시대 인식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좌절과 욕망 그리고 도전을 한 인간이 죽을 때까지 겪는 '성장통'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인식은 이 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 비판될 것이다.

이 소설의 독자들, 특히 이 책의 주독자인 여성 독자들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고 여긴다. 작가는 어느 대목에서도 독자들의 이 생각을 깨뜨리지 않는다. 사실 독자들의 이 같은 생각은 이 책의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대결해야 했다. 이 지점이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한 개인의 진정한 행복이라 여기는 주인공의 결심과 독자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이 대결은 상업성과의 대결이기도 하다. 이 대결에서 항복한, 또는 대결을 회피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심사위원들은 차마 이 지점을 명쾌히 승인하지 못하고 (그러면 소비 예술을 조장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밑줄 친 것과 같은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면서 상업적이라는 비난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이는 언어의 장난질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반은 알고 하는 장난질이지만 반은 모르고 하는 장난질이라는 점이 문제다.

또한 여기서 심사위원들이 (라)의 '환멸적인 일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즉 벽 허물기의 벽 바깥 말이다. 이것은 소비 시대의 벽에 갇혀 있어서 그 바깥을 모른다는 얘긴데, 앞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소비 현실의 바깥에서 주변화되는 소시민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가)'고 했는데, 실제는 이와 정반대다. 작가는 소비 현실의 '안'에서 '중심화'되는 소시민의 삶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주변화와 소시민은 아주 잘 연결되고 많이 쓰이므로 매너리즘에 빠져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소비 시대의 현실은 소외된 삶을 초래한 '배후'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자신의 우주가 소비세계로 국한돼버리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 심사위원들 말로는 '소비 사회의 일상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평범한 사람들'(다)이 소비 현실 주변이 아니라 바로 소비 현실 그것을 이룬다.

예컨대 소비 현실의 중심에 부르주아지가 있고 그들이 소시민들을 바깥으로 주변화시킨다면 당연히 부르주아지의 소비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뭔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소비 시대를 이끄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이 작동하는 '자각된 소비 시대'가 아닐까 싶은데, 만약 그렇다면 이건 변화된 시대를 과거의 프레임으로 보는 매너리즘의 확실한 본보기다.

그러면 심사위원들이 언급하지 못한 환멸적인 일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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