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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 살리는 '소년 검객'이여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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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 살리는 '소년 검객'이여 나오라"

[김영종의 '잡설'·3] 검객과 제관

검객과 제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칼을 벼리고 검법을 익혀서 검과 한 몸이 되어 거대한 우상을 베어버리는 예술가를 찬미하고 싶다. 하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런 예술가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혹시 선비의 겸손이 인격의 기준이 된 오랜 전통 때문일까? 공자는 자신의 저술이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일 뿐 창작이 아니라고 했으니, 유서 깊은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예술가의 혼이 자유롭게 날려면 먼저 알을 깨고 나와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혹시나 누가 알을 깰까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기존의 가치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버리지 않고는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작할 수 없다. 이것을 예술가로 거듭 태어남, 즉 재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당이 되는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무당 역시 신이 내리는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가마솥에 끓여지고 등등의 체험을 견뎌내면서 조각나고 용해된 그 몸이 새로운 몸으로 다시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 새로운 몸에 대한 예술적 비유가 있다. '노퉁(Notung)'이라는 검이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니벨룽의 반지>, 리하르트 바그너 지음, 엄선애 옮김, 삶과꿈 펴냄)에 나온 신의 검. 이 검만이 세계를 지배할 권능을 지닌 '반지'의 소유자 용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검은 오래전에 두 동강이 난 채 접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가 반지를 차지할 욕심에 자신의 모든 기술을 쏟아붓지만 허당이다. 신의 검 노퉁이 용접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노퉁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 것이다. 어떤 최고의 기술로도 용접만 가할 뿐 새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신은 어느 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대장장이에게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만이 노퉁을 새로이 불리리라"고 예언하는데, 그 직전에 대장장이는 이렇게 자조 섞인 한탄을 늘어놓았다.

"제일가는 대장장이도 도리가 없네!
내가 하지 못하는데, 이제 누가 그 칼을 용접하랴?
기적, 그것을 내가 어찌 알리!"


신이 가고 난 뒤 대장장이는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만이 노퉁을 새로이 불리리라.' 그런 일을 하기엔 난 너무 현명하지"라며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를 젖먹이 때부터 거두어 키우고 있었으니,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 지크프리트다.

소년은 대장장이한테서 조각난 노퉁을 가져다가 자신이 직접 칼을 불리고자 화덕 앞에 앉는다.

대장장이 : 네가 부지런히 기술을 연마했더라면 지금 정말로 도움이 되었을 것을. 그렇지만 너는 항시 배우는 데 태만했으니, 이제 와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니? 소년 : 매일 복종만 했다면, 대가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소년이 할 수 있겠어? 이제 꺼져. 일에 끼어들지 마. 안 그러면 함께 불 속에 떨어지고 말걸!

소년은 칼을 조각조각 나누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집어넣고 용해시킨다. 노퉁은 힘차게 되살아난다. 그사이, 대장장이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부엌에서 몽혼약을 만든다. 소년은 그런 대장장이를 보고 소리친다. "예술가 미메(대장장이)가 이젠 요리하는 법을 배우신다 이거지. 대장질은 더 이상 입맛에 맞지 않나 보군."

어떤가? 오늘날 예술가는 이 대장장이와 같지 않은가? 노퉁을 집어 들고 용을 죽이러 가는 소년. 소년은 공포를 모르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 숙달과 통달 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이 나온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자연주의적 신조를 더 철저히 관철시킴으로써 이루어진 진보의 국면이 아니라 '새로운 심미안'의 발달에 연원을 둔 것이다. (<미술사의 기초 개념>,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박지형 옮김, 시공사 펴냄)

새로운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는 당대의 심미안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나타난다. 기왕 예로 든 르네상스 미술을 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16세기 고전미술은 그 정점(미켈란젤로)에서 예술가들이 자기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당대의 신화가 된 미켈란젤로의 양식으로 작업하기 위해 벌거벗은 육체에만 매달리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모조리 도외시한 채 거대 효과만을 추구하며, 또 쓸데없이 육체를 비틀고 뒤틀어 단순한 몸짓과 자연스러운 동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의 광풍 이후 모든 아름다움은 그의 작품을 척도로 측정되었다. 예술은 이제 완전히 형식화하여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무섭도록 눈이 멀어서 자기들의 타고난 풍요로움을 내던지고 거지처럼 가난해져버렸다.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가들은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채 현재의 세계 저편에 놓여 있는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도식화'한 작업은 훈련으로 익힌 고대 흉내 내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16세기의 찬란했던 고전기 르네상스 미술은 뿌리부터 죽어갔다. 최고 수준의 기념비를 만들어내겠다는 허영심이 이런 과정을 재촉했다. 예술은 스스로 젊어질 수 없고, 오직 밖으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했다. (<르네상스의 미술>,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295~301쪽)

여기에 소년이 노퉁을 들고 나타나 타락한 용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다.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바로크 미술의 작품에서야 비로소 화가의 직접적인 관찰과 체험의 느낌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매너리즘 화가들의 거짓된 진술은 이런 태양빛을 받자 황량한 꿈처럼 부서지고 만 것이다." (<르네상스의 미술>, 301쪽)

ⓒ김용철

한국의 화가를 배출하는 미술대학은 말 그대로 매너리즘의 전당이다. 석고 데생과 정물 수채화 등이 시험 문제로 나오고, 학생들은 몇 년 동안을 학원의 형광등 불빛 아래 팔이 떨어져나가도록 그리고 또 그린다. 그마저도 개성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대학이 원하는 그림을 공식처럼 외워서 그린다.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기는 이렇게 해서 구제불능으로 망가져버린다. 청춘이 구만리인 화가 지망생은 새로운 심미안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동하는 아름다움에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우상숭배자로 전락할 운명이 되는 것이다.

예술 교육을 전담한 대학은 거짓된 진술을 가르치고 등용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은 미켈란젤로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한국의 대학은 미켈란젤로 시대 이상으로 우상을 섬기는 기관이고, 거기에 빌붙어 먹고사는 자들은 우상의 위패를 모시는 제관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대장장이 미메처럼 예술을 빙자해 생기로 가득 차 있는 예술을 살해하고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소년 검객이 나타나 우상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죽은 예술을 다시 살리기를 대망하는 건 과욕일까? 과욕이건 뭐건 그전에 명심할 사실이 있다. 절대적으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감동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감동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는 것. "예술은 스스로 젊어질 수 없고, 오직 밖으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했다"는 앞의 인용을 상기하자. 다시 말해서,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은 알 속의 세계만을 전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알을 깨고 나올 수 없다는 것. 어미가 따뜻하게 품어주는 온기가 불가결한데, 어미의 이 온기란 바로 대자연이 아니고 무엇일까?

근대를 경과해오면서 경제 발전만을 중시한 결과는 예술 분야에서 특히 참혹하게 드러난다. 바그너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 지크프리트는 낭만주의의 예술가상(像)이다. 낭만주의는 세계 예술사에서 이처럼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 근대 미학은 낭만주의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 낭만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낭만주의는 다시금 비판되어야 한다. 주제가 산만해지므로, 여기서는 비판을 나중으로 미루도록 한다.)

시대와 사조를 불문하고 예술은 자연에서 활력을 얻으며, 중심을 뒤바꾸는 변화는 반드시 변두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중심은 매너리즘이 활약하는 무대이며 우상이 숭배되는 본처다. 예술가가 검객이 되어 중심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예술은 영원히, 비유컨대 죽은 부처, 죽은 예수를 봉향하는 우상숭배를 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교활한 손은 중심이 아닌 곳에서는 예술이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도록 모조리 학교로 거두어 가버렸다. 사정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서, 공포를 모르는 소년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제도화해버린, 진보한 자본주의의 위력을 실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눈만 뜨면 다시 밖의 구원이 아름답게 펼쳐진다는 진실에서 힘을 얻는다. 마치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가들의 거짓된 진술이 젊은 루벤스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가 빚어낸 태양빛을 받자 황량한 꿈처럼 부서지고 만 것처럼, 단 한 사람의 검객만으로도 그런 기적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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