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뒤면 노무현 대통령이 간교한 권력과 정치 검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지 1주년이 된다. 3주 뒤에는 지방권력과 교육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6.2 지방선거가 있다. 민주당과 일부 개혁세력들은 이번 지방선거의 분위기가 4년 전 한나라당의 압승을 가져온 묻지마 선거와 판이하다며, 그래서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에서 절반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가정이며 당사자들의 희망적 관측일 뿐이다. 이는 원칙도 신진인사도 없는 공천방식과 후보의 면면이 증거하고 있다. 다른 변수가 없는 한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
불길하게 선거를 앞두고 패배를 경고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야당이 선거구도의 설계자(agenda setter)가 아니라 수동적인 플레이어로 전락함으로써 6.2 지방선거의 정치적 동력이 점차 소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만해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친환경무상급식을 놓고 여권 일부에서조차 동요의 기색이 완연하였고, 다급한 한나라당은 무상보육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4대강 반대를 외치는 범종교계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한명숙 재판 결과 많은 국민들이 처음으로 검찰이 사법부가 아니라 행정의 하위부처임을 체감하게 되었다. 5+4 회담의 극적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천안함은 이러한 흐름을 일시에 바꿔 버렸다. 정부의 무능력과 부정직함만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MB정부 심판과 정책선거의 기본 구도를 안보이슈로 전환시켰다. 전교조 명단공개, 촛불 재평가, 검찰 개혁 등 정부와 여당은 주간 단위로 공세적 이슈 메이커로 변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목표는 하나이다. 이번 지방선거가 MB정부 심판이라는 단일 구도로 편성되는 것, 중간평가로 작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것이다. 2006년 5.31 선거를 상기해보라. '부패한 보수가 차라리 무능한 진보보다 낫다'라는 분위기 속에서 '무능한 노무현 정권 심판'이 선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한 달 동안 야당들은 무엇을 했나.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대응과정에서 야당은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일반 시민들과 다를 바 없이 동요하였다. 10년을 집권한 세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안이하고 분열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전국적 수준에서 5+4 회담의 타결을 선언함으로써 정치력의 복원을 과시해야 했지만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수도권과 호남의 상징적 지역에서 시민공천배심제를 공천개혁의 상징으로 활용하여야 했지만 지도력의 부족으로 내분만 심화시켰다. 압권은 한명숙과 이계안의 실질적 예비경선의 불발이다. 개구리는 확연한 판세와 같은 끓는 물이 아니라 서서히 달아오르는 온도에서 죽음조차 깨닫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간다. 오늘 야당의 결연하지도, 영민하지도 못한 무대응 속에서 개구리의 죽음을 예감한다.
서울시장 선거가 지방선거의 판세를 결정한다
서울시장 선거는 단순한 수도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아니다. 이게 무슨 중앙주의적 발상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래의 표가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역대 서울시장 선거가 그러하였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기는 정당이 당해 지방선거의 승리자가 되었다. 왜 그러냐고? 호남과 충청, 영남과 달리 서울은 전국 유권자의 표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시장의 득표력과 25개 구청장의 득표율이 거의 일치할 정도로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98년 선거에서 국민회의 고건 후보의 득표율(53.5%)은 25개 구청장의 합산 평균 득표율(53.2%)과 0.3%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2002년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과 25개 구청장의 득표율은 52.3%로 소수점까지 같다. 2006년 역시 그 차이는 2.5%에 불과하다. 정당공천제 속에서 시장과 구청장의 분할투표나 전략투표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간의 경험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25개 구청장 각각이 아무리 지역 기반이 강하고 열심히 뛰어도 선거의 기본 구도와 서울시장의 경쟁력이 약하다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온화한 진보'가 유일한 길이다
3주도 안 남은 선거에서 한명숙 후보의 승리 가능성을 제고하는 방법은 '온화한 진보 노무현'에 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을 거론하는 까닭은 서거 정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저열한 발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행정이나 미시 정책이 아니라 '정치'의 복원이 민주당과 한 후보의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시대의 결을 읽고 이에 맞서 싸울 줄 알았던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한명숙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온화한 기품과 인격이 아니라 수도권의 민주파 유권자층과 청년 세대의 투표 욕구를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적 언어와 행보이다.
▲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뉴시스 |
서울시장 후보로서 한 후보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역할은 민주당 자체를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의 길로 견인하는 것이다. 당장 이번 선거의 모토를 백화점식 정책 나열이 아니라 서울을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의 비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복지생태도시이며, 공간적으로는 낙후된 강북의 재창조에 있다. 강남을 버려도 좋다는 자세로 서민과 중산층 중심의 계급·계층 정책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 내용과 자세라면 노회찬 후보와의 연대를 늦출 이유가 없다. 현 시기 정책과 철학의 진보는 정책협약과 후보단일화의 전제 조건이다.
지방선거를 넘어서
지도부를 포함한 민주당 전체가 하늘나라의 노무현만 바라보며 상황의 엄숙함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공천과정에서 여실히 나타난 것처럼 아직 호남향우회와 노사모 중심의 근시안적 사고를 못 버리고 있다. 지도부와 후보의 정치력 부재로 서울의 구청장 선거에서 현역 단체장의 대거 공천 탈락으로 인한 여권 후보의 난립이라는 호재조차 못 살리고 있다. 사회정책의 확대를 통한 양극화 해소와 토건국가 중단을 전면에 내걸고 부도덕한 부자 정권인 MB정부 심판으로 각을 세워야 한다.
민주당은 선거 이후 안락사의 공멸이냐 아니면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그 한 중심에 서울시장 후보 한명숙 후보가 있다. 그 출발은 CEO형 행정시장 모델이나 최초의 여성 시장이 아니라 연대의 정치력과 새로운 진보 정책의 제시에 있다. 한 개인에게 과도하지만 그 역사적 책무를 이행하는 방법은 무소의 뿔처럼 대다수 서민과 청년에게 담대하게 다가서는 길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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