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산업연수생 제도 도입된 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한국사회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문제로 떠오르자, 2004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됐다. 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도 침체에 빠지면서 노동시장의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은 더욱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다. 네팔에 살면서 평생 바다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시얌(35. 가명) 씨와 마가르(37. 가명) 씨는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건너와 어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지난 5-6개월의 한국 생활은 생전 처음 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못지않게 낯설고 두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1920년대 일본 어업노동자들의 끔직한 노동 현실을 담아 최근 뒤늦게 화제를 모았던 <게공선>의 주인공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최근 천안함 수색을 돕던 금양호 선원들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어선 선원들의 열악한 생활이 알려졌다. 힘겨운 노동과 열악한 보수로 선원들을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 '빈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뉴시스 |
어업비자로 들어온 이주노동자, 한국판 '게공선'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각각 작년 10월과 11월에 고용허가제(EPS)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조업 비자가 아닌 어업 비자를 받았다. 그래서 공장이 아니라 충남 대천의 한 고기잡이배에 선원으로 취직했다. 시얌 씨가 입국할 때는 71명 중 2명이 어업비자로 입국했고, 마가르 씨가 입국할 때는 106명 중 7명이 어업비자로 들어왔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주위에서 한국이 좋다고 들었어요. 또 한국에 오기 전 두바이에서 2005년부터 2년간 호텔 종업원으로 일했어요. EPS 시험을 볼 때 서비스업종으로도 올 수 있다고 들어서 한국을 선택했죠. 말레이시아 등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경제수준도 높으니까 대우도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네팔에서는 보험회사에 다니던 시얌 씨는 한국에서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1지망 서비스업, 2지망 제조업, 3지망 어업, 4지망 농업을 적어냈다. 네팔에서 가구공장을 하고 있던 마가르 씨는 한국에서 연관된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왔다. 하지만 그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어업노동자로 일하게 됐다.
이들은 한 어선에서 한국인 선원 3명과 함께 일했다. 새벽 3-4시에 바다에 나가 일찍 돌아오면 오후 2시, 늦게 돌아오면 저녁 7시까지 있었다. 하루 평균 14시간 정도 일했다. 휴일은 따로 없었다. 한달 내내 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날씨가 안 좋아 조업이 불가능한 날이 휴일이었다. 하지만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육지에 있을 때는 고기잡이 그물을 손보는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작업복만 입고 맞는 칼바람도 큰 고통 중 하나였다. 이들이 일한 배는 9월부터 12월까지는 멸치를 잡고, 1월부터 지금까지는 꽃게를 잡았다. 꽃게철이 지나면 오징어, 물메기 등을 잡는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휴식 시간은 따로 없었다. 끊임없이 그물을 던지고 잡힌 고기로 묵직해진 그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수십킬로그램의 그물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평지에 비해 몇 배 더 고된 일이었다. 자칫 그물의 무게에 중심을 잃고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실제 고기잡이 배에서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마가르 씨는 그물을 끌어올리다가 그물추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30분 정도 의식을 잃은 일이 있었다. 시얌 씨도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쿵'하는 충격에 갑판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진 적이 있다.
그물을 올리는 속도가 빨라지면 휴식은커녕 끼니를 때울 시간조차 없었다. 배에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에 속했다. 선장의 기분과 날씨와 조업 속도, 이 삼박자가 갖춰져야 라면을 먹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날엔 생으로 굶거나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일이 거친 만큼 사람들도 거칠었다. 욕을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뱃일에 익숙한 한국인 동료들에 비해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체력도, 체격도 형편없이 뒤졌다. 파도가 거세지면 일하는 이들의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시얌 씨가 작은 실수를 하자 한국인 동료는 그의 멱살을 잡고 배의 가장자리로 끌고 가 "이대로 바다에 밀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출렁이는 배 안에서 그의 목숨도 출렁이는 것 같았다. 마음은 철렁 가라앉았다.
"그 순간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왜 낯선 한국 땅에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서글퍼졌어요. 한국인들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네팔인에게 한국음식 못 한다 타박하는 한국인 동료들
육지에서 생활도 선상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등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 '과욋일'을 해야 했다. 바로 한국인 동료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일이다.두 사람은 항구 근처의 여인숙에 묵었다. 선장은 방 2개를 잡아 하나는 이들 둘과 한국인 두 명, 다른 하나는 고참 한국인 선원 한명이 쓰도록 했다. 육지에 있을 때 식사는 선장이 장을 봐다 주면 직접 요리를 해서 먹었다. 당연히 한국음식이었다. 익숙지 않은 한국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더 힘든 것은 한국음식을 만들어 한국인 동료들에게 바쳐야 하는 일이었다. 동료들은 식사와 설거지 등 귀찮은 일은 이들에게 미뤘다. 네팔인들이 한국음식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얌 씨와 마가르 씨에겐 또 한번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 달을 일하고 두 사람이 받는 월급은 90만 원.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시간당 4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다 받지 못했다. 시얌 씨는 2번, 마가르 씨는 1번 밖에 월급을 받지 못했다. 올해 최저임금이 올라 92만8000원을 받아야 하는데, 작년 이후로는 월급을 받지 못해 법정 최저임금이 오른 것도 몰랐다. 한국인 선원들은 똑같은 일을 하고 한 달에 300만 원을 받았다. 그래도 일이 힘들어 한두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일을 그만뒀다.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선장이 임금을 주지 않으니까 아이들 학비도 제때 못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달 전에는 부인이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게 돼서 밀린 월급을 달라고 선장에게 얘기하니까 '내일 준다, 모레 준다' 하면서 지금까지도 안 주고 있어요. 선장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못 믿겠어요." (마가르 씨)
"한국에 올 때 EPS 시험도 치고 정식절차를 다 밟고 노동자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한텐 외국인등록증도 없고, 여권도 없어요.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난민이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시암 씨)
▲ ⓒ이주노조 |
"월급이나 제때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업비자로 입국한 이들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어업 밖에 없다. 지난 2005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업종 변경을 금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비자로 입국한 노동자들은 제조업 공장에 취업할 수 없다.
또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3회로 제한하고 있고 변경 사유도 고용주의 고용계약해지 및 갱신 거절, 회사의 휴폐업, 상해.산재 등 회사의 귀책사유가 분명할 때로 국한된다. 노동자가 원해서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근로 계약 갱신 거절'로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나 가능하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의 앞날이 막막한 것도 이처럼 일방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고용허가제 때문이다. 선장이 순순히 계약해지신고서에 사인을 해줘야 당장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데, 선장은 사인을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임금체불이라는 고용주의 귀책사유가 있더라도 노동부 직권으로 사업장 변경을 승인해주려면 다음달 15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돈도 없고, 당장 머물 숙소도 없는 이들이 한 달 동안 일하지 않고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회사를 그만두면 사장이 밀린 임금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
"우선 밀린 임금을 빨리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일은 힘들어도 월급이 제때 나오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의 바람이다.고용허가제의 취업기간인 3년이 끝난 뒤 네팔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재취업이 가능한 3년 동안 한국에 더 머물고 싶은지 묻자 시얌 씨는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네팔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음지의, 음지의, 농어촌 이주노동자 1996년 여름 일어났던 '페스카마호' 사건. 6명의 중국동포 선원이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 등 1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선상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포 6명은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인은 우리 보고 개라 부르고 마누라 보고는 암캐라 부릅니다.…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나며, 선원의 인권과 건강을 해쳤습니다. 음식 배불리 못 먹고, 눈칫밥,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텅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1996년 10월 1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중) 고용허가제 이전에도 산업연수생제도로 수산업협동조합을 통해 외국인 선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선원법'을 적용받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현재도 20톤 이상의 대형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들어온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처럼 20톤 이하의 연근해 어선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다. 노동부 외국인력정책과 관계자는 "지난해 농축산업으로 1000명, 어업으로 100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힘든 일에 비해 보수가 적어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농축산업, 어업 쪽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를 이유로 제조업으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 규모를 대폭 줄였지만, 농축산업과 어업 규모는 유지하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제조업, 농축산업, 어업,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들어오는데, 본국에서 친 한국어시험 결과에 따라 업종이 나뉜다. 제조업이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건설, 농축산업, 어업은 커트라인이 더 낮다.농어촌의 이주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시얌과 마가르 씨는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했지만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한 법정 최저임금만을 받았다. 시간외수당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 휴일도 보장받자 못했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할 것들을 이들은 보장받지 못했다. 농축수산업이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는 등 근로시간이 불규칙하다는 이유로 시간외 수당과 휴일, 휴계 적용 등을 예외로 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63조 1,2호 때문이다. 정영섭 이주자노동조합 사무처장은 "농축수산업에 대한 예외조항을 고용주들이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보니 제조업은 사업장 이탈률이 6.9%인데 반해 농어업은 15.9%로 2배 이상이다"고 말했다.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농장의 경우 겨울철 등 농한기에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장을 3번 이상 옮길 경우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데,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엔 사업주의 일방적인 해고로 원치 않게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외 근무 수당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2008년말 기준으로 국내 취업 중인 이주노동자는 70만 명에 이른다. 국내 총 취업자의 3%로 1991년 이후 12배 증가했다. 이들 중 체류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는 전체 이주노동자의 73.5%인 51만934명이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8만4377명이다. 이들의 절대 다수인 94.9%(66만83명)가 단순기능직 노동자로 일하며, 교수, 어학강사, 연예인 등 전문기술인력 이주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체류 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 중에는 방문취업제로 취업 중인 재외동포가 절반 가량인 29만8003명, 나머지가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파키스탄, 네팔 등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 이주노동자(15만6429명)들이다. 현재 한국과 인력도입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송출국가는 15개국이다. 이주노동자들의 88.9%가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고, 나머지는 농축산업, 건설업 등에서 일하고 있다. 1만5000여 명 정도가 농어촌이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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