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2일 2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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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구
rilover@naver.com
대학원에서 기록관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아카이빙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담은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신이 '유족'인줄 몰랐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사단에 임관했다
[살아남은 기억들] (8) 전주형무소 사건
황방산에 묻은 뼈항아리 2003년 4월 14일 오전. 전주시 서쪽 외곽에 위치한 황방산에 고(故) 이도영 박사와 월간 <말>의 김재중 기자, 전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고(故) 이순기 씨, 학살 희생자 유족 조병권 씨가 모였다. 이순기 전 형무관이 학살 장소를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여긴데 건물
강변구 작가 /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저자
정부가 허락한 '죽음의 보복' …태안 주민은 화합의 길을 찾고 있다
[살아남은 기억들] (7)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의 출발지, 사기실재 지난 10월 10일, 영화 <태안>을 보기 위해 태안작은영화관으로 향했다. 전주에서 출발해 두 시간 동안 차를 몰았다. 사실 더 가까운 대전에서도 공동체상영을 했 지만, 그래도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태안으로 갔다. 출발할 때부터 날이 흐렸다. 태안군으로 들어올 무렵에는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월미도 마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졌다"
[살아남은 기억들] ⑹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월미도의 '기억 전달자' 지난 9월 16일 인천 월미공원 제물포광장에서 "인천상륙작전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월미도 마을 주민을 추모하는 위령제다. 올해로 제72주기(14회)를 맞이했다. 광장 한 켠에 천막과 의자가 놓여 있고, 유가족 몇 분이 일찍 오셔서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그날 바다에 시신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살아남은 기억들] (5) 여수 안도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
그 여름날의 소년 2022년 8월 3일, 구름 한 점 없는 무더위의 절정이었다. 72년 전 이춘혁 옹이 열여섯 소년이었던 그날도 찌듯이 더웠다. 피난선에 타고 있던 일곱 식구 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7살, 3살 여동생 둘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3남매 가운데 누나와 남동생도 차차 세상을 뜨고 이제 혼자 남았다. 그는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g
이승만정부의 자국민 학살과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좌익의 극렬분자 처단하라"
[살아남은 기억들] (4)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소년의 눈에 비친 학살 현장 1950년 7월 초 한여름이었다. 옥천 군서면 사양마을에 사는 15세 소년이 곤룡재 고갯마루에서 아름드리 참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올라온 길을 등지고 앉아 대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래 길 끝에서부터 트럭이 올라오더니 골짜기 한쪽 공터에 멈추었다. 그곳은 일제 때 포탄을 쌓아두던 자리였다. 총을 든 사
미군의 폭격에 피난민의 흰옷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살아남은 기억들] (3) 노근리, 70년의 역사전쟁
1950년 7월 26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길과 쌍굴에서 피난민들의 죽음이 시작됐다. 미군은 민간인에게 공중 폭격을 퍼붓고 기관총을 쏘았다. 한 소녀는 머리에 후폭풍을 맞아 안구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의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 날아갔다. 3박 4일 60여 시간 동안 피난민들은 쌍굴에 갇혀 산발적인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받으며 조금씩 죽어갔다.
지금도 물속 어둠에 잠겨 있는 영령들
[살아남은 기억들](2)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사건
일제 강점기 수탈현장이자 한국전쟁 최대 민간인 학살의 현장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가면 오래된 폐광산인 경산코발트광산이 있다. 일제가 1941년에 광업권을 획득하고 채굴했는데 당시에는 보국코발트광산이었다. 이곳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코발트광산으로 채광, 선광, 제련시설을 모두 갖춘 대규모 광산이었다. 코발트는 포신이나 비행기 등에 사용되는 합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