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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물속 어둠에 잠겨 있는 영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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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물속 어둠에 잠겨 있는 영령들

[살아남은 기억들](2)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사건

일제 강점기 수탈현장이자 한국전쟁 최대 민간인 학살의 현장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가면 오래된 폐광산인 경산코발트광산이 있다. 일제가 1941년에 광업권을 획득하고 채굴했는데 당시에는 보국코발트광산이었다. 이곳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코발트광산으로 채광, 선광, 제련시설을 모두 갖춘 대규모 광산이었다.

코발트는 포신이나 비행기 등에 사용되는 합금의 원료로서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전략자원이었다. 당시 보국코발트광산은 한때 광산 아래에 300여 호의 광산촌이 형성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가 해방 직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제가 버리고 떠났다. 산을 수평과 수직으로 거미줄같이 파고들어 간 갱도를 그대로 남긴 채였다. 지금은 코발트광산이 있는 대원골 일대에 요양병원과 2007년 개장한 27홀짜리 대규모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코발트 광산 수평 갱도 출입구 옆에 위치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공간이다.  ⓒ강변구
▲유족회공간 내부에는 최근에 만든 유족회 상징 문양이 걸려 있다. 유족회의 설명에 따르면 가운데가 갈라진 원형은 총탄을, 물방울은 슬픔의 눈물을 형상화했다. ⓒ강변구

코발트 광산의 수평 갱도 출입구 옆에는 컨테이너 사무실이 있는데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의 공간이다. 이곳 경산코발트광산은 일제 수탈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 전후 최대 민간인학살 현장이다.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짧은 기간에 무려 3,5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경산과 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1000명)과 대구교도소의 재소자들(2500명)이었다. 희생자들은 군과 경찰에 의해 트럭에 실려와 차례로 산으로 올려보내졌다.

목적지는 채굴한 코발트 광석을 막장에서 지상으로 운반하는 수직굴이었다. 일종의 광석 승강기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그 깊이가 무려 150여 미터에 달했다. 희생자들은 굴 입구에서 총살된 후 수직굴로 떨어졌다. 수직굴에 시신이 켜켜이 쌓여 더 이상 공간이 없어지자 현 골프장 자리인 인근 대원골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인근 주민들은 포장을 씌운 트럭이 한 달 내내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트럭이 들어오고 나면 여지없이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학살 이후 한동안 갱도에서 뻘건 핏물로 변한 지하수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수직굴 입구에서 당시 학살 상황을 설명하는 경산신문 최승호 대표. 최승호 대표는 2000년 전후부터 경산지역 시민모임을 이끄는 동시에 지역 언론인으로서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서 왔다. ⓒ강변구

▲채굴한 코발트 광석을 운반하던 수평갱도이다. 갱도 옆에는 유해 발굴 당시 나온 흙이 유해와 섞인 채 자루에 담겨 있다. ⓒ강변구
▲수직굴과 수평굴이 만나는 지점이다. 여전히 유해가 잠든 굴 아래에 지하수가 차 있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보강물 위에 진실화해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의 조화가 놓여 있다. ⓒ강변구

광석 운반용 레일이 복선으로 설치되었던 수평 갱도로 들어가서 100여 미터를 지나면 수평굴과 수직굴이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위를 보면 어두운 허공뿐이다. 그 어둠으로부터 총에 맞은 시신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아래쪽은 지하수가 고여 있다. 7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유해가 여전히 물속에 갇혀 있다.

한 유족은 이렇게 증언했다. 트럭을 타고 온 낯선 경찰의 '빨리 나오라' 한 마디에 남편은 입던 옷 그대로 끌려갔다. 그길로 경산경찰서에 수감되고, 아내는 사식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15일 만에 남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된 것이다. 그 후 유족의 꿈에 남편이 나왔다. 남편은 '춥다', '물가에 앉아 있다'라고 했다.

보도연맹원과 재소자 학살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발발하자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에 대한 학살을 계획했다. 그 대상 중 하나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지목되었다. 보도연맹은 좌익활동을 실제로 했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든 좌익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이나 혐의만으로도 가입시킨 조직이었다. 그러나 좌익활동과 무관하게, 지역에 할당된 가입자 수를 채우기 위해, 배급을 준다는 이유 등으로 가입된 사람들도 많았다.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학살된 사람들은 주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 정치범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전후하여 이러한 '예비학살'을 자행했다. 전국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어 갔다.

'빨갱이'라는 낙인과 침묵에 갇혀 산 세월

박무석 유족의 아버지는 농사일하던 중에 경찰 혹은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 네 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경산경찰서에는 이미 연행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인근 담배창고에 갇혔다. 당시 경찰들이 구금된 사람의 가족들에게 소 한 마리 값을 가져오면 빼내 주겠다고 했다. 박무석 유족의 할아버지가 소를 팔아 돈을 마련해 갔지만 이미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다.

박무석 유족은 그때 막 태어난 터라, 평생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살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왜, 언제 돌아가셨는지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고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야 외가 쪽 친척으로부터 아버지가 학살당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가 보수 색깔이 강한 곳이다 보니... 흔히 하기 좋은 말로 뻘갱이, 좌익활동하다 그리됐으니까 입도 뻥긋하지 마라카는 식이니까."

박무석 유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서기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합격했는데 면접 때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다. 그때는 왜 불합격했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고 나서 다른 직장에 취직했다. 그때 신원조회 서류 밑에 붉은 글씨로 부친의 좌익활동 운운하는 문구가 적힌 걸 보았다.

90대 노모가 처음 털어놓은 아버지 이야기

이창희 유족의 아버지(당시 23세)는 모내기 준비하던 중에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온 동장에게 경찰에서 오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별생각 없이 가족들에게 말도 안 하고 그 길로 경찰서로 갔다. 그때 동갑인 마을 청년 세 명도 같은 식으로 청도경찰서로 갔다. 그러고는 그들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창희 유족의 할아버지가 면회하러 가니 갇혀 있는 다른 사람과 달리 아버지는 창고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고 집에 계시소. 며칠 안 있으면 집에 갑니다"라며 안심시켜 드렸다. 경찰은 역시 소 한 마리 값을 요구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당일 밤에 돈을 마련해 이튿날 아침에 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창고에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에 경찰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때 이창희 유족은 태어난 지 100일 정도 된 아기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올 것으로 믿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골목에 친구들하고 노는데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애비 없는 놈하고 놀지 마라. 빨갱이 자식하고 놀지 마라' 하면서 데려가더라고요. (...) 학교 들어가서는 마을 주민들이, 이장들이 캅디더. '니는 마 공부해봤자 취직 못 한데이. 느그 아버지가 빨갱이가 돼갖고.' 그런 소리 참 많이 들었습니더."

이창희 유족은 그때부터 '아버지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돌아가셨구나'라고 짐작만 하고 살았다.

이창희 유족은 아는 분이 서울로 오면 취직시켜 준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연좌제 때문에 1차 시험에 합격해도 면접에서 모조리 떨어졌다. 아버지 일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그는 점차 우울의 늪에 빠져 한때는 극단적인 시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경산코발트사건에 대해 조사를 개시했을 때였다. 이창희 유족은 조사관으로부터 아버지가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으로 확인된다는 답을 들었다.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온 막연한 의혹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2009년 진실규명 결정이 났다. 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사건을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 경산·청도경찰서,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가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를 적법한 절차 없이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규명했다.

진실규명 이후 이창희 유족은 당당하게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90세 노모는 지난해에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평생 입에 담지 않은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나도 이제 아버지 따라갈 때가 되었노라고.

철도 노조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끌려간 아버지

나정태 유족회장은 아버지가 1946년 대구 10월항쟁 때 부친이 대구역에 근무하면서 철도노조원으로 활동했다. 나정태 회장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아버지가 10월항쟁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년 후 풀려났는데,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나 또다시 직장에서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진술했다.

나정태 회장의 아버지는 다른 희생자와 달리 사망일시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1950년 7월 6일 트럭에 실려 경산 쪽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은 당시 대구형무소 간수로 근무하던 희생자의 사돈이었다. 그는 형무소 마당에서 경산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는 나정태 회장의 아버지를 보았다. 형무소 마당에서 아버지는 "사형, 저는 이제 갑니다"라며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정태 회장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집에서 엄마를 개가시키고 내 여동생은 남의 집에 주고 나는 큰집으로 갔는데, 큰집에 간 그날부터 마 배가 고파 몬 사는기라. 학교라카는 거는 꿈도 못 꾸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열서너 살 때 대구 섬유공장에 들어가 일하며 기숙사에서 살았다. 공장은 24시간 돌아갔다. 일주일 야간, 일주일 주간 근무였다. 그로부터 30년을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나정태 회장 역시 어릴 때부터 친척들에게 아버지가 '10.1폭동'에 가담하지만 않았어도 안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야들 아버지보다 즈그 엄마가 더 나쁘다. 아버지가 그러면 말려야 되는데 같이 저녁 되면은 풀 들고 밤에 벽보에 삐라 붙이러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 나정태 회장은 열여덟 무렵부터 '대구10.1'이란 말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았다.

▲ 2022년 4월2일. 유족들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좌로부터 이창희 유족, 박무석 유족, 나정태 유족회장. ⓒ진실화해위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아픔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이후 2기에서 추가로 피해자 신청을 받고 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신청률이 저조한 형편이라고 한다. 나정태 회장은 지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홍보해 줘야 하는데 현수막조차도 잘 걸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족들의 바람은 무엇일까. 나정태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우리한테 한 번만 미안해해주면 돼. 우리한테 와서 억울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코발트 광산에는 수차례에 걸친 발굴작업에도 아직 발굴하지 못한 유해가 남아 있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갱도의 수직굴 저 깊은 곳에 물에 잠겨 있는 유해들, 그 진실이 빛을 볼 날이 언제일지 아직은 모른다.

▲경산코발트광산 및 대원골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있다. ⓒ강변구

▲경산코발트광산 및 대원골에서 일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명단이 적혀있다. ⓒ강변구

<참고자료>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나정태 회장, 박무석 유족, 이창희 유족 구술. (2022년 4월 2일)

최승호, 『경산코발트광산의 진실 : 1950~2008』, 경산신문사(2008).

진실화해위원회, 사건별보고서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 2009.

진실화해위원회, 사건별보고서 『군위·경주·대구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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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기록관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아카이빙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담은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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