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방산에 묻은 뼈항아리
2003년 4월 14일 오전. 전주시 서쪽 외곽에 위치한 황방산에 고(故) 이도영 박사와 월간 <말>의 김재중 기자, 전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고(故) 이순기 씨, 학살 희생자 유족 조병권 씨가 모였다. 이순기 전 형무관이 학살 장소를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건물을 지을 때 다량의 유해가 나왔을 거라고 추측되지만 행방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재팀은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납골당 건물 뒤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때 김재중 기자의 눈에 잡풀 속에서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흙 위로 드러난 유해였다.
전주형무소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 발굴에도 유해는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를 잃은 조병권 유족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발굴을 진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유해는 항아리에 수습해 다시 땅에 묻었다.
그로부터 16년 세월이 흐른 뒤 뼈 항아리가 다시 빛을 보았다. 2019년 8월부터 2020년 2월까지 6개월간 유해 매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황방산 일대를 집중적으로 발굴한 결과 20~4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해 34구를 수습했다. 2003년에 묻었던 뼈 항아리도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잠들어 있었다.
전주형무소에서 일어난 두 번의 학살
2009년과 2010년에 발간된 두 건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전주시 진북동(현 전주동부교회 인근)에 위치했던 전주형무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 등 소위 좌익사범들이 상당히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군인들에게 끌려 나간 후 공동묘지 등지에서 집단 사살되었다. 희생 규모는 1400여 명으로 추산되며 가해 주체는 육군 7사단 3연대 소속 군인들이다. 재소자들은 전주형무소 인근 공동묘지, 소리개재, 황방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대부분 전주시 외곽에 위치한 곳이면서도 도로를 이용해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학살이 끝난 직후 7월 20일 전주형무소 직원들은 모두 대구로 철수했다.
바로 이어서 인민군이 전주를 점령했다. 인민군들은 텅 빈 전주형무소에 우익인사들을 수감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9월 26일, 27일 양일간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1000여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며, 같은 시기에 전주소재 장로교신학병원(現 전주예수병원) 근처 채석장, 완주군수 사택 안마당 방공호, 천주교회 앞 방공호 등에서 6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학살 이튿날 28일, 인민군이 전주형무소를 전소키시고 시신을 방치한 채 철수했다.
이렇게 석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전주형무소에 수감돼있던 민간인 2400여 명이 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차례로 희생되었다. 국군에 의한 학살이 집단 총살 후 매장하는 방식이었던 데 비해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형무소 인근에서 곡괭이, 삽 등으로 가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75구를 제외하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갔다. 수습되지 못한 175구의 시신은 현재 황방산 학살 현장 바로 근처의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어 있다.
현장에서 되살아나는 기억들
2007년 10월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전국 4.3유적지 순례의 일환으로 전주형무소 터와 황방산을 찾았다. 4.3사건 당시 전주형무소에 제주도민 132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모두 20살 안팎의 여성들이었다. 이들 중 석방되거나 이감되지 않은 33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58년 만에 전주형무소 자리에 선 수형인 생존자 박춘옥 할머니는 자신의 복역 기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섣달(1948년, 음력) 14일에 전주형무소에 끌려와 10월에 풀려났다. 내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산사람에게 쌀 한 되 줬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박 할머니는 형무소 안 우물에서 만났던 앳된 처녀들이 떠올랐다. 그네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014년은 전주형무소 사건에 있어서 특별한 해였다. 6월 6일 제주4.3도민연대가 수형인 생존자 할머니 여섯 분을 모시고 전주동부교회 뒤편 골목에서 조촐하게나마 진혼제를 올렸다. 한편 9월 26일에는 전주 효자공원에서 인민군 점령기에 희생된 '애국선열' 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1950년 7월과 9월 전주형무소에서 일어난 두 번의 학살은 오랜 세월 동안 흉흉한 소문에 머무르다가 2003년 목격자의 증언과 유해 발견으로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2009년과 2010년에는 국가기관에 의해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2014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희쟁자를 위로하고 기억하는 위령제가 열린 것이다.
전주시와 유족회가 힘을 합쳐 시작된 유해 발굴
2018년 3월 5일 전북 고창에 거주하는 육군 예비역 소령 성홍제 씨(1949년생. 전주형무소사건유족회 회장)는 초등학교 2년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부친이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된 선배는 성홍제 씨의 아버지도 같은 경우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성홍제 씨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흔이 넘도록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었고 제적등본에도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다. 더구나 본인은 일반 직장도 아닌 3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라고만 할 뿐이었다.
성홍제 씨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아버지가 좌익 활동가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아버지 죽음의 전말이 평생토록 감추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성홍제 회장이 더욱 큰 충격을 받은 때는 아버지를 희생시킨 학살의 가해 주체가 바로 자신이 근무했던 육군 7사단의 헌병대임을 안 순간이었다.
지난 3월 5일 황방산에서 만난 성홍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보니 7사단 3연대라고 나오더라고요. 저는 다른 연대에 근무했지만 … 무엇보다 나라를 지켜야 되는 군인이 국민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였다는 것에 너무나도 분노가 치밀었어요." 감정이 격해져 울컥하는 그의 말에서 군인의 사명감과 유족의 슬픔이 함께 느껴졌다.
그 후 성홍제 회장이 알음알음 유족들을 찾아다녔다. 전국에 흩어진 유족들을 만나고 설득해 현재 120명이 참가한 유족회가 구성되었다. 유족회 활동이 전개되자 전주시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2018년 10월 10일 '전주시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고 2019년 8월 29일 시가 주관하여 황방산에서 역사적인 첫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렸다.
70년 넘게 묻혀 있던 진실은 지표 거의 바로 아래에 묻혀 있었다. 유해는 경사면에서 3열로 나란히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학살 당시 수감자들은 길게 옆으로 일렬로 비탈을 내려다보며 무릎 꿇고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쏘아 이들을 살해한 후 흙을 덮어 흔적만 지운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8월부터 2020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진행된 1차 발굴에서 두개골과 치아, 다리뼈 일부 등 유해 237건과 M1 소총과 권총의 탄피, 벨트 등 유품 129건을 수습해 2020년 7월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
계획적인 학살 현장이 드러나다
2020년 10월 28일 2차 발굴 보고회가 열렸다. 전주 효자동 황방산과 산정동 소리개재 등 유해매장 추정지 약 400㎡를 발굴한 결과 황방산 매장 추정지 1~3열 중 3열에서 다리뼈와 팔뼈가 발견되었다.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허리벨트와 단추 등 유품도 출토되었다. 특히 허리벨트(버클)를 보면 희생자가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미결수이거나 보도연맹 관련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1, 2열에서는 심하게 토양화된 두개골 뼈와 치아, 일부 다리뼈와 팔뼈가 확인되었다. 희생자 주변에 M1 소총 탄피와 칼빈 소총 탄피 등이 발견되어 당시 군인이나 경찰이 1차 살해 후 가까이 접근해서 2차로 확인사살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 1차 발굴에서는 살해 후 흙을 덮어 흔적만 가린 정도였다면 2차 발굴 현장은 더 계획적인 학살이 일어났음을 보여주었다.
박현수 전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실장은 "구덩이를 파고 매납한 행위는 일정한 계획에 의해 학살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며 "매납 형태의 차이로 매장 당시와 매장 전후 상황 등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드릴 수 있게 어서 우리 곁으로 나오십시오"
지난 4월 12일 황방산 기슭에서 조촐한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렸다. 김승수 전주시장이 참여했던 기존 개토제와 달리 현 전주시(우범기 시장)에서는 담당 공무원만 나와서 자리를 지켰다. 나무를 벌채해서 흙바닥이 휑하니 드러난 발굴 대상지를 바라보며 차려진 제상 앞에 유족들과 전주대학교 박물관 발굴팀이 둘러섰다. 성홍제 유족회장이 인사 말씀을 올렸다.
"우리의 봄은 왔지만 우리 마음에 봄은 언제 오려는지 답답한 마음입니다. 아픈 상처에 치유의 봄이 올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황방산 산신이시여! 억울하게 죽음 당하신 우리의 선친을 굽어 보살피시어 구천에서 떠돌고 계시는 영령들이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나오셔서 평안한 세상에서 영면하실 수 있도록, 자손들이 모실 수 있는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또한 이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들은 강력하게 투쟁하여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유족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선친들의 얼굴도, 그 모습도 보지 못한 채 7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1,400여 분의 학살되신 모두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곁으로 나오셔서 따듯한 밥, 국 한 그릇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 높은 구름 위에 떠돌고 계실 영령들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유족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차디찬 흙더미 속에서 따듯한 우리 곁으로 나오십시오."
전주형무소 사건은 전쟁 상황에서 두 개의 적대적인 군대(국군, 인민군)가 점령과 후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형무소에 수감된 민간인을 대규모로 살해했다는 점에서 두 국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국에서 일어난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가운데 전주형무소 사건은 국군과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동시에 일어난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발굴이 제대로 완료되면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된 '모든 분들을 함께' 추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진실규명 이후에 지역 사회가 기억해야 할 그분들의 이름은 좌익과 우익, 혹은 애국지사가 아니라 전쟁 중 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진실과화해위원회(2010년) 『광주·목포·순천·전주·군산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과화해위원회(2009년) 『전주형무소 등 전주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월간 『말』 2003년 5월호 「발굴특종 1950년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 "흩어진 퍼즐 위엔 학살이 있었다"」
제주의소리(2014. 6. 4) "66년만에 형무소 찾는 4.3할머니들의 증언"
뉴데일리(2014. 10. 14) "1950년 전주는 한국의 킬링필드였다!"
연합뉴스(2020. 6. 16)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강산 7번 바뀌고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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