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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한 '우리' 병원 없는 것은 수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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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한 '우리' 병원 없는 것은 수치였는데…"

[근대 의료의 풍경·7] 의학교의 설립

한국사는 한국인만의 배타적, 폐쇄적 역사가 아니다. 한국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공간에서 한국인뿐 아니라(물론 한국인 자체도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여러 민족과 인종이 어울려서 삶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연출해온 것이 바로 한국사이고, 19세기 후반의 문호 개방 이래 그러한 점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또 무대가 되는 공간도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세계사 속의 한국사로 변모, 발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이 한국사의 주역이라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인은 외부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제도들을 받아들여 점차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기존의 전통적 요소들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왔다.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1870년대부터 근대 서양 의술을 접해온 조선 사회는 초기의 피동적 체험에서부터 점차 능동적인 선택과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중원뿐만 아니라 일본인 병원과 선교 병원이 그러한 변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종두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던 정부와 선구자들의 역할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데에 의사의 국적과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보건 의료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서는 자국인 의사의 존재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 의사들이 아무리 헌신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목표가 조선 정부의 그것과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1880년대부터 의료인 양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국가 사업으로 우두 의사를 배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제중원 학당에서의 의학 교육은 의사 양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제중원과 학당이 국가 기관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책임은 조선 정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제중원 학당, 동문학,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의 운영 경험은 1894~95년 갑오을미개혁기 이래 근대식 교육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1895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국가를 견고케 하기 어렵다"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국왕의 <교육입국조서>가 공포되었고, <한성사범학교 관제>(5월 10일), <외국어학교 관제>(6월 11일), <소학교령>(9월 7일)이 반포되었다.

▲ 1895년 12월 28일(음력 11월 13일)자 관보에 실린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명단 47명. 함태영과 이선재 등의 이름이 보인다. ⓒ프레시안
특기할 것은 다른 법률들에 앞서 <법관양성소 규정>이 4월 19일에 반포되고 25일부터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5월 17일부터 교육을 시작한 법관 양성소는 12월 25일 제1회 졸업생 47명을 배출했다. 초기에 법관양성소의 교육 기간은 6개월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법률가는 성직자, 의사와 더불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대표적인 전문 직업이다. 근대적 국가를 지향함에 있어 근대식 교육을 받은 법률가를 양성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법관양성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법관양성소와 더불어 새로운 의학 교육 기관과 의료 기관도 준비되고 있었다. 1896년초 발표된 정부 예산에 의학교 및 부속 병원과 종두의양성소 비용이 책정되었거니와 그보다 7개월 앞선 1895년 6월 14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미국 의사 에비슨(芮斐信)에게 빌려준(借給) 전(前) 제중원 관사를 되돌려달라(推返)는 문서를 보냈다.

▲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과 "순국"으로 유명한 이준(李儁·1859~1907).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으로 그 당시 이름은 이선재(李璿在)였다. ⓒ프레시안
제중원은 설립될 때부터 외부(외아문) 소속이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초기인 8월 18일 내부(내무아문)로 소속이 바뀌었다. 그런데 내부와 협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1894년 9월 외부대신 김윤식은 이미 자신의 소관이 아닌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겨주었다. (설령 외부대신이 월권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선 정부의 책임이다.)

그러한 사연을 가진 제중원을 "앞으로 쓸 일이 있으므로" 되돌려 받게 해달라는 것이 내부대신이 보낸 공문의 요지다. 용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정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의학교와 부속 병원으로 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내부 소속의 병원인 광제원이 1900년 10월부터 재동의 옛 제중원 건물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부대신의 요청이 이루어졌으면 제중원은 의학교로 재탄생하였을 것이다.

어렵사리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받은 에비슨과 선교 본부는 1년도 안 되어 반환하라는 데에 크게 반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에비슨이 계속 병원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내부대신의 요청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때, 1894년 9월 외부대신과 미국 공사 사이에 맺은 "조선 정부는 1년 전에 정식으로 (제중원의) 환수 통고를 하고 양측이 합의한 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언제든지 환수할 수 있도록 한" 협정 내용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기 어렵다.

▲ 내부대신 박영효가 외부대신에게 전 제중원 관사를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1895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자 공문. ⓒ프레시안
제중원을 되돌려 받지 못해 약간 차질이 생겼을 수는 있지만 의학교와 부속 병원은 2만여 원의 예산을 확보하는 등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으로 의학교 설립 계획은 좌초되고 말았다. 즉 총리대신 김홍집이 국왕과 친러파의 계략으로 광화문 앞에서 참살됨으로써 친일적인 을미개혁 정부는 붕괴되었고, 법관양성소와 더불어 전문 직업 교육을 담당할 의학교도 실종되었다. 법관양성소 역시 4월 22일 제2회 졸업생 39명을 배출하고는 1903년까지 장기간의 표류에 들어간다.

을미개혁 시기의 계획이 무산된 뒤에도 근대적 의학 교육 기관과 병원을 설립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특히 평가해야 할 것은 그 방식이 종래의 하향식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활동을 통해 민중이 참여하는 상향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 친일적인 갑오을미개혁정부를 이끌었던 김홍집(金弘集·1842~1896)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을 때 김홍집이 유언처럼 남겼다는 말의 진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란이 없다. "나는 명색이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떳떳한 천명이거니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만 같지 못하리라." ⓒ프레시안
1898년 7월 15일 종로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는 의술 학교 설립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 뒤 목원근, 송석준, 홍정후 등 세 사람을 대표로 선임하여 학부대신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건의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이제 입헌군주제나 의회 설립 등 권력 구조 문제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 등 '생활 정치' 문제까지 거론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집회 열흘쯤 뒤 학부대신 서리 고영희가 답신을 보내왔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의술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장차 형편이 나아지면 의술 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만민공동회 활동에서 근대적 의술과 그것을 가르칠 의학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당시 민중들이 분명히 인식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주체적으로 요구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899년의 의학교 설립이 만민공동회 운동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러한 운동이 없었을 경우 바로 이듬해에 의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할 때, 그 의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의학교 설립 논의가 펼쳐지고 있을 때 더욱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지석영이다. 그는 정부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핵심 회원 17명을 체포한 사건으로 민중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있던 무렵인 11월 7일, 의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서신(上學部大臣書)을 학부대신에게 보냈다.

지석영은 숙망인 의학교 설립에 관해, 자신의 <우두신설>에 서문을 썼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건의서를 보낸 것이다. 그 서신에는 의학교의 교장으로 초기의 근대 의학 교육을 주도한 지석영의 의학(교육)관이 잘 나타나 있다.

7월 중순의 만민공동회의 건의에 대해서는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예산 부족 때문에 의학교의 조속한 설립은 어렵다고 답했던 정부가, 지석영의 건의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즉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이도재는 이틀 만인 11월 9일, 1899년 봄에 의학교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신서를 지석영에게 보냈던 것이다.

정부의 갑작스런 입장 변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급박한 정국,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경부터 조병식·이용익 등 무능하고 부패한 대신의 사임 요구, 의회설립 및 그것에서 한발 후퇴한 중추원(내각자문기구) 개혁 요구 등 본격적인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0월 29일에는 종로에서 사상 최초로 정부대신들과 민간단체들이 함께 참석하고 1만여 명이 운집한(당시 한성 인구는 약 20만 명)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가 개최되어 현안에 대한 민간의 요구가 담긴 <헌의 6조>를 채택했다. 그리고 국왕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중추원 의관(議官)의 절반을 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결정되었다. 정국의 주도권은 독립협회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상황이 급변했다. 한성의 여러 곳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대통령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정체불명의 벽보가 나붙었고, 조병식 등 일부 황실 측근 세력들은 국왕에게 독립협회가 국체를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고 허위 보고했다. 음모의 전말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국왕은 이상재 등 독립협회의 핵심 간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독립협회 해산 조칙을 발표했으며, 관민공동회에서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 대부분을 파면하고 조병식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민중들은 "철야 장작불 집회" 등으로 거세게 저항했다.

▲ 관민공동회를 묘사한 그림(<독립신문 다시읽기>, 독립신문강독회 지음, 푸른역사 펴냄). 10월 29일 집회에서는 백정인 박성춘도 연설하였다. 박성춘은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박서양의 아버지다. ⓒ프레시안

이렇듯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공론장과 시민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근대화란 근대적인 겉모습만을 갖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각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의학교'는 이러한 역사의 진행 속에서 설립되었다.

지석영이 건의서를 보내고, 이도재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하는 답신을 보낸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다. "채찍과 당근 정책"을 연상시키는 정황이다. 즉 황권(皇權)을 견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정치 운동을 탄압하는 대신, 그 밖의 개혁 요구는 어느 정도 수용한다는 황제와 새 내각의 전략이 엿보이는 것이다. 지석영의 의지, 그리고 지석영과 이도재 사이의 친분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당시의 정국 상황이 민중들의 의학교 설립 요구를 수용하게 된 더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의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 6030원을 예산에 배정한 데 이어 학부는 1899년 2월 28일자로 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명의로 <의학교 관제 청의서>를 제출했으며, 중추원은 수정 없이 이를 통과시켜, <의학교 관제>가 3월 24일 칙령(勅令) 제7호로 반포되었다.

교장(지석영)과 교관 등을 선임하고, 교사(校舍)와 설비를 마련하고, <의학교 규칙>을 제정하고, 공개적으로 학생을 선발하여 개학식을 가진 것은 반년 뒤인 10월 2일이었다. 그러한 조치는 모두 <의학교 관제>에 의한 것이므로 1899년 3월 24일을 의학교 설립일로 삼는다. <독립신문>은 3월 29일 의학교 설립을 아래와 같이 다루면서 <의학교 관제> 전문을 게재했다. <황성신문>도 같은 날짜에 <의학교 관제>를 수록했다.

▲ 1899년 3월 24일 반포된 <의학교 관제>. ⓒ프레시안
"인민을 위하야 의학교와 병원을 셜시한 것이 한 곳도 업난 것은 대한에 참 슈치가 되난 일이라 우리가 졍부에셔 의학교를 셜시한다난 말을 듯고 얼마큼 치하하며 고명한 의원을 고빙하야 잘 실시되게 하기를 발아더니 지금 의학교를 실시하랴고 반포한 규칙을 본즉 졍밀하기로 또한 반갑게 녁여 좌에 긔재하노라."


의학교는 1902년, 3년간의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고 법령으로 의사로서의 자격을 인정("의술개업면허장") 받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19명을 배출한 점에서도 의학사와 한국근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의학교가 민중의 참여와 우리 정부와 선각자들의 주도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3월 24일은 의학교가 설립된 지 111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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