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고객이 만들어내는 '진상' 짓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골프 경기 중 타는 카트를 운전할 때, 고객이 '대신 운전해 주겠다'며 김 씨의 손을 잡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개인 연락처를 가르쳐 주면 봉사료를 주겠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많다.
공이 잘 안 맞는다고 짜증을 내는 건 기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김 씨에게 모욕을 주는 발언을 하는 이도 있다. 반말은 예사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그럴 때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런 말을 할까' 부아가 치밀지만, 김 씨는 내색 한 번 하지 못한다.
"한 번은 라운딩 도중, 고객에게 '몇 번 골프채를 드릴까요?'라고 묻자 고객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난 세 번만 줘'라며 3번 골프채를 가져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느낀 수치심과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웃을 수밖에 없죠."
공 찾아 삼만 리, 하루 종일 산 속을 헤매기도
경기보조원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골프채 등을 들고 경기를 보조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객이 친 공이 떨어진 상황에 따라 홀을 공략하는 방법부터 코스에 따라 골프채 선택도 조언한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고 보면 된다.
고객이 OB(Out of Bounds)를 낼 경우 그 공을 찾는 일도 경기보조원의 몫이다. 물론 공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골프장 라운드 주변은 대부분 산이라 공을 찾는다는 건 산 속을 헤맨다는 걸 의미한다. 재수 없는 날에는 공 하나를 찾고자 하루 종일 산 속을 돌아다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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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골프공이 얼마라고 이렇게까지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골프공은 고객 소유 공이기에 찾아야만 한다. 고객들은 OB가 나면 김 씨에게 "자장면 하나 날아갔다. 계란 한 판 날아갔다"며 우회적으로 찾아오기를 요구한다. 골프공은 대략 한 개 당 5000원에서 9000원까지 한다.
OB가 난 골프공을 찾는 건 어떻게 보면 차라리 낫다. 김 씨에게 날아오는 골프공은 공포 그 자체다. 김 씨는 고객이 잘못 친 공에 맞아 하루도 몸 성할 날이 없다. 늘 몸 어딘가에는 피멍이 들어 있다.
"골프공을 치는 방향으로 나가 있어야 고객의 공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볼 수 있고, 고객의 요구에도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요. 그렇다보니 고객이 친 공에 맞는 일이 빈번하게 생겨요. 하지만 회사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죠."
얼마 전에는 머리에 골프공을 맞아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치료비는 받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해서 공에 맞았으니 자신이 알아서 하라는 것. 결국 개인 보험을 찾았지만, 거기서도 푸대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 경기보조원은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가정 주부 임금으로 보상금이 처리됐다. 주부 임금은 하루 1만 원이다.
사고가 나면 회사는 "왜 거기에 나가 있었냐?"며 책임을 김 씨에게 돌리기 일쑤다. 고객도 "잘 피했어야지…"라고 말 끝을 흐릴 뿐이다. 그 때마다 김 씨는 "볼을 똑바로 치면 될 거 아니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그냥 삼키고 만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늘 위장병에 시달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제 때 가지 못한다. 골프장 라운드 안에는 식당이 상주해 있지만 김 씨는 이 곳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손님이 식사를 해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고객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자신도 식사를 할 수 없다. 재수가 없는 날엔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늘 위장병을 달고 다닌다.
화장실 사용이 자유롭지 못해 방광염에 걸린 경기보조원도 상당수 있다. 경기 중에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화장실을 간다 해도 다른 손님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화장실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김 씨는 라운드를 돌기 전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는 게 버릇이 되었다.
여름엔 햇볕으로 온 몸이 새까맣게 탄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를 몸에 바르지만 소용이 없다. 이로 인해 피부병을 앓는 보조원도 있다. 겨울엔 동상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특히 귀가 심하다. 귀 덮개를 하면 조금은 괜찮지만 고객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부득이 귀 덮개를 하지 못한다.
회사의 압박도 김 씨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창 고객들이 붐비는 3월부터 11월까지는 아예 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김 씨였다. 한 달에 네 번 쉬도록 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쉬지 못했다. 병가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 경기보조원들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동료 중 한 명이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회사에서는 택시를 타고 와서 얼굴을 보여준 뒤 병원에 가라고 했죠. 교통사고가 나서 경찰서에 있는데도 무조건 출근을 하라고 독촉을 하니 견디기가 힘들죠."
집안 빚으로 대학 중퇴 뒤 빚 갚기 위해 시작한 경기 보조원
김 씨가 이 일을 시작한 나이는 20살. 아버지 사업이 실패한 뒤, 고민 끝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빚쟁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집으로 찾아왔고 아버지는 이들을 피해 늘 숨어 다녀야만 했다. 어머니는 허리가 안 좋아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실질적인 가장 역할은 김 씨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찾고 찾던 중 눈에 띈 직업이 골프 경기보조원이었다. 주위 아는 사람이 "하루 너댓 시간만 일하면 5만 원을 준다"며 김 씨에게 경기보조원을 권했다.
하지만 경기보조원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 3개월 동안은 견습 기간이라며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골프장에서 일했다. 고작 밥값만 받았다. 견습 기간 후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김 씨를 괴롭혔다.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대학교 중퇴 여성이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몇 군데를 알아 봤지만 그 곳 월급으론 집안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경기보조원의 일이 고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돈 벌이가 됐다.
꿈도 많았지만 점점 현실에 순응하게 됐다. 그러다 결혼을 한 뒤,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기 보조원을 그만뒀다. 임신을 하면 무조건 해고되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김 씨 스스로가 직업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경기보조원으로 복귀했다. 다른 직업을 알아봤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학습지 교사를 뽑는 곳에 지원서도 넣어 봤지만 "대졸 이상이어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김 씨는 "나름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며 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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