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이 씨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가 이른바 'SKY'가 아니라는 점만 빼놓고는 빠지는 '스펙(specification)'은 아니다. 토익 점수는 만점에 가깝고, 졸업 학점도 4점대다. 방학 때마다 인턴 경력을 쌓는데 주력하느라 대학 생활의 '낭만' 이런 것과도 담을 쌓았다. 그러나 그를 불러주는 데는 아무 곳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 말대로 눈높이가 높은 걸까? 그건 맞다. "지금까지는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정규직만 지원했다. 대통령 말대로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한 편으로는 억울하다. 대학 4년 동안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정규직이 되고 싶은 게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만큼 욕심을 부리는 건가?"
"그냥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싶은 것뿐인데…"
사실 이영선 씨가 정규직에 목을 매는 데는 까닭이 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닌 이 씨는 1년간의 구직 활동이 좌절되자, 지난 2008년 7월 보도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 배포하는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직을 했었다. 야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한 달에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은 130만 원. 물론 4대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이 기업에서 전문성을 쌓다 보면 더 좋은 조건의 기업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개월, 2개월, 결국 6개월이 흐르자 그런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평생 130만 원을 받으면서 영어 번역만 하다가 버려지는 '비정규직 인생'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앉아서 힘들게 학자금 융자를 받아가면서 학교를 다녔다. 백화점 판매원, 학습지 교사, 과외 등 여대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 안 해 본 게 없다. 시쳇말로 '술집'만 안 나갔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졸업 후엔 그래도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었는데…."
"어떻게 딴 대학 졸업장인데…"
▲ "우리는 인간이다.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이른 아침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대학생들. ⓒ뉴시스 |
"얼마 전 지인이 일하는 중소기업 구매팀에서 '대졸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언니 스펙이면 가능하다'는 지인의 독려에 원서를 냈는데 결국 2차에서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3000명이 지원했다. 최종으로 올라온 15명이 전부 남자였다. 내가 최종까지 못 간 이유가 여성이라는 이유라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다."
이러던 이영선 씨는 다시 비정규직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마냥 놀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말에는 보도 자료를 대신 써주는 홍보 대행업체 면접을 봤다. 월급은 역시 100만 원 조금 넘는 수준. 합격한다면 당분간 구직 활동과 병행하면서 이 기업을 다녀볼 생각이다.
"최근 한 중견기업의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사실 면접을 보러 이 기업, 저 기업 다니다보면 여러 번 만나는 친구들이 많다. 그 때도 아는 얼굴도 몇 있었는데…. 다들 사정이 딱하다. 또 다들 나 못지않게 준비를 많이 한 친구들이다. 나 같은 취업 준비생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 이제 올해 졸업한 친구들까지 더 많아질 테니…."
"좋은 일자리는 그나마 20대 남성의 몫"
이영선 씨의 말처럼 2009년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이 보통 기업의 정규직으로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질 나쁜 일자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3월 18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9년 2월 고용 동향'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이 자료를 보면, 2월 취업자는 20대 남성의 경우 174만7000명으로 작년 동월대비 5.6% 감소했고 여성의 경우 198만3000명으로 3.3% 감소했다. 취업자 수치의 감소 추이는 남성이 더 가파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은수미 박사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더 직장 선택에 까다롭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20대 남성이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수가 적어진 질 높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순번을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수미 박사는 "20대 여성은 대기를 해봤자 질 높은 일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자진해서 질이 낮은 일자리라도 선택하고 있다"며 "취업률만 놓고 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낫지만 일자리 질을 보면 결코 20대 여성이 좋은 편이 아닌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즉 임시직, 일용직의 대부분이 20대 여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은수미 박사의 분석은 현실과 들어맞는다. 경제 위기 속에서 30대 여성의 실업률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구조 조정을 할 때, 30대 여성 임시직, 일용직을 우선 정리하는 것이다. 물론 기업의 여건이 나아지면 그 자리는 20대 여성이 다시 차지한다. 악순환이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 넣는 물건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3월 19일 4조9000억 원 규모의 추경 예산을 편성 55만개 일자리 창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일자리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주목할 부분은 취약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책이다. 정부는 중소기업 빈 일자리에 취업할 경우 한 달에 30만 원을 지급한다. 신규 대졸자 교육 훈련 지원 등의 사업도 새로 추진한다.
하지만 이영선 씨는 답답하기만 하다.
"하다 못해 나사, 볼트도 딱 맞는 자리가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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