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주요 언론은 삼성 관련 칼럼 게재를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 변호사의 책 광고까지 거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삼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등 기업 삼성은 왜 공포의 대상이 됐을까. <프레시안>은 독자들로부터 삼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듣는 기획을 마련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독후감을 포함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의 글이건 소개할 계획이다. 독자들이 삼성을 생각하는 글은, 이 메일 주소 mendrami@pressian.com로 보내면 된다. <편집자> |
1998년, 늦깎이 복학생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 하신 노(老)교수의 연구실에 들러 이런저런 한담을 즐기던 중, 선생님의 책상 위에서 낯선 청첩장 하나를 보았다. 얼른 열어보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주최하는 세미나 자리에 교수가 초대된 것이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교수님, 교수님마저 이런 데 다니면 어쩌자는 거예요?" 추궁하였다.
내가 목격한 것은 그야말로 한 장의 초대장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냥 별 것 아닌 일로 넘어가도 좋을 일이었건만, 마음이 순결한 노교수님은 서푼어치 비리를 나에게 털어놓고야 말았다. 이 날 목격한, 그 하찮은 청첩장 한 장은 나에게 '거대한 부패의 거미줄'을 드러낸 징표로 다가왔다. 재벌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른바 '민중운동 진영'의 교수에게마저 삼성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의 지도층 인사들 그 누구 하나 삼성의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것인가! 몸이 오싹해졌다.
경제학을 배우다 보니, 삼성경제연구소의 씽크 탱크들의 강의를 자주 접하였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임원을 지내신 모 교수로부터 한국경제론을 수강하였고, 그 분의 동북아물류 중심 국가론을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었다.
"동경과 북경 사이를 통과하는 원을 그어 보라. 희한하게도 이 원의 중심에 서울이 위치하지 않은가? 21세기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경제권은 한,중,일 동북아시아권이 될 것이다. 만일 일본과 한반도를 해저 터널로 잇고, 만일 남북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철로가 열린다면, 명실상부하게 서울이 동북아의 물류의 중심이 아니 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로가 길림으로 북경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르쿠츠크로 이어진다면? 부산에서 김밥 도시락 하나 챙긴 다음 모스크바로 파리로 런던으로 여행하는 시대가 불가능한 꿈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강의를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있다.
광주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그런 광주 시민의 염원으로 대통령이 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나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쳤다. 취임사의 절반이, 내가 학교에서 익히 들었던, 동북아 물류 중심국가론이었다. 이것, 누가 써준 원고냐?
2002년 대선에서 분명히 삼성은 노무현을 반대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을 반대한 세력의, 그것도 가장 반노동자적인 재벌의 앵무새 노릇을, 그것도 단 한 달만에 자임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신임 대통령은, 우리 서민들이 듣기에 참 답답한 말씀을 많이 하였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대통령이 무슨 애들 반장이람?"
2003년 나는 <레즈를 위하여>를 발간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남한 부르주아지의 국가주의를 폐기하고자 나온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이라고 본다. 취임사의 절반이 동북아의 중심국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찬양하는 수사로 덮여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전임 대통령들을 옆에 모시고 그들과의 단절이 아닌 그들의 계승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을 선진 강국으로 만들자는 이 사상이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하지만 국가주의는 성장주의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성장주의는 민중의 희생을 전제한다. 성장주의는 경쟁의 심화를 의미하며, 사회의 비인간화, 황폐화를 예고한다."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읽어도 재미가 없다. 왜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쓴 것이냐? 요는, 문제의 '남한 부르주아지'가 추상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구체성이 없는 단어, 생명이 없는 단어였다. 왜 나는 '삼성의 지배'라고 못박지 못하였던가?
나는 '삼성이 대한민국을 체계적으로 말아 먹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섣불리 공언할 수 없었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삼성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음을 입증할 '증거'가 내게 없었다.
2005년, 마침내 비리의 물꼬가 터졌다. 노회찬 전 의원이 삼성의 X파일을 공개한 것이다. 참 대한민국은 희한한 나라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간첩을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라, 간첩을 신고하면 거액의 포상금을 준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1996년 충남 부여에서 출현한 무장 공비 김동식은 내가 신고한 간첩이었다. 그런데 준다는 포상금은 오간 데 없고, 이 일로 안기부에 6개월 동안이나 불려 다니는 고초를 겪었다.
노회찬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이 벌여온 뇌물 공여의 테이프에 입각하여 노 의원이 관련 인물을 공개하자, 검찰은 오히려 노 의원을 고소하여 버렸다. 잡으라는 범인은 잡지 않고, 잡으라고 신고한 시민만 못 살게군 애꿎은 사건이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이 나왔다. 달포 동안 살까말까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폭로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종의 의무감으로 구입했다. 책장에 꽂아놓고 읽지 않은 것도 한 달이 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신문사들이 이 책의 광고를 거부한다는 소문이 귀에 들렸다. 그제서야 책을 잡았다.
나는 경악했다. 이건희-노무현의 고리가 이 책에 있었다. 노무현을 삼성의 품속으로 유인한 이는 노무현의 부산상고 동문 선배, 이학수였다. 취임사의 비밀은 이것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육성을 들어 보자.
"2002년 대선 당시, 구조본 팀장회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회창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면 반가워했고, 그렇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낙담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나와 이학수 실장이다. 하지만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이학수는 솔직하게 이유를 말했다. 이학수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과 인간적으로 아주 친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학수를 '학수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학수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삼성에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노무현 정부 정책 가운데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 (147쪽)
나는 이학수가 노무현의 동문 선배라는 것을, 이학수가 삼성 구조본의 실세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노무현과 이학수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김용철 변호사는 담담하게 술회하였다. 이어 그는 고백하였다.
"당시 이학수는 아침 모임만 하루 두 번씩 가졌다. 이렇게 일년이 지나니, 호남 출신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삼성과 인연을 맺게 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재벌이 주요 인맥을 장악하는 데는 일 년이면 충분했다." (180쪽)
이 대목에서 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푸념을 다시 떠올렸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이 말은 청와대의 인사들이 전원 삼성의 로비망에 포섭 완료되었음을 고백한 선언이었다.
▲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뉴시스 |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무려 400여 쪽의 지면에 삼성의 비리가 올올이 새겨졌다. 이제 이건희로 인하여, 국민은 "과연 대한민국이 법치 사회인가?"라는 아주 창피한 물음 앞에 머리를 잡아뜯게 되었다. 이건희로 인하여, 로스쿨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골치아픈 논제에 답변을 제출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헌법 11조 2항은 유효한가?"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한다. 나도 "자유와 평등"을 사랑한다. 이건희로 인하여 우리는 그 "자유와 평등"의 실체에 대해, 혹 이 위대한 문구가 빛좋은 개살구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나라 맞아?
진정 훌륭한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이건희의 탈법만큼은 단죄하고 넘어가야 한다. 10억원의 재산을 상속할 경우 4억원을 상속세로 국고에 귀속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법률이다. 200조가 넘는 매출을 자랑하는 삼성, 그 삼성의 소유권을 넘겨주기 위해 이건희와 이재용이 나라에 바친 세금이 고작 16억 원이었다는 것을, 우리의 어린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는 뭐라 해명할 것인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노동조합을 볼 수 없다"는 명언을 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은 유훈으로 남겼다 한다. 노동자의 단결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노동자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노동3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헌법을 부정하며 살겠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건희 일가만이 "자유와 안전과 재산"의 자연권을 부여받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서민들은 밤낮 일만 해야 하는 소이고, 주인에게 알이나 까바치는 양계장 닭이며, 평생 주인에게 충성하다 복날 비명에 가는 똥개라는 얘기다. 정말이지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세계사가 기록에 남겨두어야 할, 삼성의 야만이요, 한국의 치부이다. 삼성에게, 한국인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우리들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제 삼성독재에 항거하며 마지막 인생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나는 상상한다. 오는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 '자유의 여신상'이 삼성의 옷을 입고 나와 이렇게 말하는 거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났다. 유럽인들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특히 한국인들은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혹은 상상한다. 오는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 파리의 개선문에서 나폴레옹이 삼성의 옷을 입고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성취한 고고학상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로제타석의 발견이었다면,
이건희가 성취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혁신은 불법상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재용 씨에게 한마디 전하고 싶다. "인간은 서로 억압하고 착취하며 살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절대적 평등을 선물합니다. 그 선물은 바로 죽음입니다."
성북동의 길상사를 방문해 보길 권합니다. 길상사는, 시인 백석을 사랑한 고 김영한님이 평생 모은 재산 1000억원을 법정 스님에게 의탁하여 세워진 절이랍니다. 김영한님은 거액을 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내가 모은 재산은 백석 시인이 남긴 시 한 구절의 가치도 없다."
부디 일가의 오류를 성찰하고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다시 태어나길, 호소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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