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족적으로 표출된 해방과 독립의 의지는 이후 항일 무장 투쟁, 의열 투쟁, 교육 운동, 문화 운동, 노동운동 등의 원동력이 되었다. 해방은 이민족 압제뿐만 아니라 봉건적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함께 뜻하는 것이었으며, 독립 또한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의 독립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흔히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소련, 영국 등 연합국에 힘입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전혀 틀리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끈질기고 강력한 독립 투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와 그 뒤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3·1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수립된 망명 임시정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긴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독립운동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임시정부가 채택한 국체와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점이다. "대한"은 이어받았지만 경술국치 전의 "제국"을 벗어던지고 "민국", 즉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일한 합방"의 명분으로 내건 일제가 시대착오적인 "천황제 국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일제의 침략과 지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근대화 역시 우리가 자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사회는 국왕의 목을 베거나 매달지 못해서 진정한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했다고 한다. 프랑스대혁명과 비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16세의 목을 치고도 제정과 왕정 복고를 거듭 경험하고 나서야 겨우 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 3·1운동은 고종(高宗)의 죽음을 한 가지 계기로 하여 일어났다. 우리 선조들은 국왕의 시신을 땅에 묻으면서 왕정도 함께 과거에 매장시켰다. 그리고 공화국에서 제왕을 망상하는 자들의 권력은 근대적 시민들에 의해 번번이 박탈되었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3·1운동은 4·19혁명, 그리고 1987년 6월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거족적인 운동이었으므로 특정 개인, 집단, 지역, 단체, 학교, 종교, 계층, 직업 등의 역할을 특별히 내세울 여지는 없을 터이다. 때때로 이기적이고 사회적 역할에 충실치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 의학생들은 당시에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당시는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기 전이라 전문학교가 최고 학부였다. 6개밖에 없던 전문학교 가운데 의학전문학교가 둘로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이 그것이다. 경성의전은 총독부가 관할하는 '관립'이고 세브란스의전은 기독교의 여러 교단이 연합으로 운영하는 '사립'이었다.
조선총독부의 보고자료(1919년 4월 20일자)를 보면 구금된 학생 가운데 경성의전이 가장 많아 31명이고, 경성고보(22명), 보성고보(15명), 경성공전(14명), 경성전수학교(12명), 배재고보(9명), 연희전문(7명), 세브란스의전(4명)이 그 뒤를 이었다. 또 <매일신보> 11월 8일자에 의하면 검거되어 판결을 받은 학생 역시 경성의전이 30명으로 가장 많고, 경성고보(29명)를 비롯하여 여러 학교가 다음을 이었고, 세브란스의전 학생은 10명이었다.
경성의전 학생으로는 김형기(1년), 이익종(10월), 김탁원·최경하(이상 7월) 등이,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는 배동석(1년), 김병수(8월), 최동(7월)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경성의전 학생이 특히 많은 데에는 전문학교 중에서는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것도 이유였을 터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아래의 학적 변동(생도 이동) 상황이다.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21년판). ⓒ프레시안 |
1919년(대정8년)말 경성의전의 학생 상황을 보면 조선인 재학생이 141명이었고 퇴학생은 79명(전체 학생의 36퍼센트)이었다. 일본인은 재학생 93명, 퇴학생은 단 1명이었다. 79명 모두가 3·1운동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닐 터이다. 다른 해에도 많게는 22명(1916년), 적게는 1명(1918년) 2명(1920년)이 퇴학을 했기 때문이다.
▲ 이미륵. ⓒ프레시안 |
한위건 역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한때 귀국하여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주로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벌였다. 유상규 또한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오른팔 격으로 흥사단과 임시정부 일을 하다 1925년에 경성의전으로 복학하였고, 졸업 뒤에는 모교의 외과 강사로 활동하였다. 백인제는 바로 다음해에 복학하여 1928년 조선인으로는 김현주(병리학), 유일준(미생물학)에 이어 세 번째로 경성의전의 교수(외과)가 되었다.
세브란스의전도 상황이 비슷하다. 1919년 말 재학생이 50명이고 퇴학생은 16명(전체의 24퍼센트)이었다. 그런데 퇴학자가 1917년 9명, 1918년 8명, 1921년에는 19명이나 되어 1919년에 3·1운동과 관련하여 학교를 그만 둔 학생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경성의전보다 비율로도 적은 것은 확실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을 되도록 퇴학시키지 않으려는 학교 방침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21년판). ⓒ프레시안 |
3·1운동은 우리 민족사, 나아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거니와 개개인들에게도 못지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의 경험과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 사람들은 근대시민으로서 점점 더 단련되고 성숙되어 갔을 것이다. 이 점은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들에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음 회에서는 일제에 굴복하거나 적극 협조한 의사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올해는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또 6·25 한국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광주민중항쟁 3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또 연초부터 <제중원>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근대서양의료 도입 과정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다 좋은 현상일 터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주역은 한국인이다. 이것은 당위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근대 사회의 핵심을 건설해온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국적이나 민족으로 구별하는 것보다 그들을 근대화 과정의 동지, 동료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같은 한국인, 한민족이더라도 근대화와 민주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의료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개항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전통 의료도 오랜 동안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발전해왔다. 우리 공동체 내부의 소통과 교류, 토론과 비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전통 시대 의료의 교류는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다시 일본으로의 방향이었다. 그렇다고 일방향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일본에서 배우는 것도 적지 않았고 또 중국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밖에 동남아, 인도, 이슬람권 등과의 교류도 우리 전통 의료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문화와 학문 기술은 항상 외부와 교류를 갖고 내부에서 소통이 될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리(한국인)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미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근대 의료를 도입하고 소화하여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모습은 그대로 평가하고 부정적인 것은 공정하게 비판하는 것이 의학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역할이고 몫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와 너, 우리와 너희, 한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하고 차별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근대 의료의 풍경'이 다룰 시기는 1876년의 개항 무렵부터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이다. 대체로 시대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지만, 시의나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조금씩 변경되기도 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비판을, 그리고 성원을 기대한다.
<프레시안>은 서양 의학 수용 과정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2009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형우·박윤재 교수(의사학)가 '의학사 산책'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연재는 최근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사이언스북스 펴냄)으로 묶여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관련 기사 : 드라마 <제중원>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2010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의사학)가 '근대 의료의 풍경' 연재를 시작합니다. 황 교수는 앞으로 1주일에 두 차례씩 근대 의료가 수용, 정착되는 과정을 되짚고, 그 의미를 살필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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