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 쪽 컴퓨터에서 포털 사이트의 메일 서비스에 들어가 "안녕하세요"라고 입력해 나가자, 이 인터넷 회선을 감청하고 있는 또 다른 컴퓨터의 모니터의 빈 화면에는 복잡한 컴퓨터 명령어들과 함께 "안녕하세요"라는 글자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에 표시됐다. 인터넷 메신저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아웃룩에 접속해 비밀번호를 적으면 비밀번호까지 감청 모니터에 그대로 드러났다.
1일 오전 열린 민주당 우윤근, 박영선, 변재일 의원이 공동주최한 '패킷감청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토론회'에서 직접 시연된 '패킷 감청' 장면이다.
▲ 패킷감청 시연 모습. 왼쪽 화면에 감청된 내용들이 표시되고 있다. ⓒ프레시안 |
"전화감청과 패킷감청 차원이 달라"
이메일도 압수수색하는 세상에서 패킷감청은 왜 문제일까.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오동석 교수는 "통상적인 통신제한조치는 전자우편의 경우 이미 주고받은 것을 나중에 열어보는 것과 달리 패킷감청은 인터넷 회선을 통해 전기신호 형태로 흐르는 패킷을 제3자가 중간에 가로챔으로써 같은 내용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이메일 압수수색이 범죄혐의를 포착하기 위한 특정 매체에 수사 범위가 한정되는데 반해, 인터넷 회선을 자체를 가로채 들여다보는 패킷감청은 컴퓨터를 언제 켜고 껐는지, 접속한 사이트들, 온라인 쇼핑 목록, 범죄혐의와 관련 없는 제3자와의 메신저 대화 내용은 물론 감청 대상자가 인터넷 전화나 IPTV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면 통화 내용이나 시청하는 TV 프로그램 목록까지 전부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차별적 '감시' 행위는 명백한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규정(제18조)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오 교수는 "패킷감청의 적법성을 일반 전화 감청으로부터 유추하기도 하지만,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화 통화 내용과 인터넷 활동 내용은 그 범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국가가 행정작용과 사법작용의 본질적 한계를 뛰어 넘어 개인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침해함으로써 발생하는 '권력분립원칙' 위배, 기본권제한을 위해서 지켜야 할 목적정당성·수단적정성·피해최소성·법익균형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과잉금지원칙' 위배 등은 물론, 현재 시행되는 감청 방식은 절차의 적법성조차 갖추지 못한 위헌 투성이라는 것이다.
"민간 영역 감청 가이드라인도 필요"
이어 발제에 나선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이런 감청 기술이 비단 국가 기관에 의한 사생활 침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민간 영역에서 비슷한 형태의 '감청'이 이뤄지고 있으나 제도적 뒷받침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프린스턴 대학의 인지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이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후 소비자 심리를 분석하는 '타겟 마케팅'이 떠올랐고, DPI(Deep Packet Inspection)가 소비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새로운 기술로 떠올랐다"고 패킷 감청 발전의 배경을 설명했다.
즉 어느 기업이 소비자의 쇼핑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 이용 형태를 감청해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라면 자동차 광고를 주로 내보내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에게는 옷 광고를 내보내는 등 '맞춤형 광고'를 위해 패킷감청이 도입됐고, 이미 민간의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KT가 이와 같은 서비스를 도입한다고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임 교수는 "원자력도 이용하기에 따라 핵폭탄이 될 수도 있고,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면서 "원래 이와 같은 기술은 방화벽으로 사용될 때는 좋은 용도이지만, 타깃 마케팅에 오남용되면 프라이버시의 침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견제와 금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발전과 거리가 먼 우리나라의 제도 현실이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임 교수는 "이메일 압수수색을 안 받으려면 '지메일'(Gmail)을 사용하면 되고, 강력한 암호화가 이뤄진 스카이프 인터넷 전화를 쓰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 교수는 "정책이나 법률의 방향이 정해지면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구현할 수 있다"며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책이나 법률에 의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사용되는 가에 대한 투명하고 공적인 통제가 가능한 견제장치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 교수에 따르면 미국, EU는 민간 분야에서 DPI 관련 논란이 일자 데이터보호지침, 전자통신지침 등을 근거로 일단 제동을 건 뒤 발빠르게 입법 보완을 해 나가고 있다. 임 교수는 "일본도 2004년에 관련 법률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아무런 장치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국정원 '도감청' 고백 불과 5년
2005년 8월 국가정보원은 "중앙정보부 시절 이래 40여 년간 관행적으로 국내 주요 인사들에 대하여 불법감청을 행하였고, 이러한 관행을 끊지 못한 채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R2 및 CAS 감청장비로 불법감청이 이루어져왔다"고 고백하며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폐기처분했었다.
당시에도 '유선 전화는 감청하는데 휴대전화는 왜 감청 못하느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휴대전화가 갖는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의 특수성이 일반 유선전화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용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보다 더 광범위한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큰 인터넷 패킷감청이 별다른 논의도 없이 이뤄지고 있는 것. 특히 휴대전화 감청은 입법이 미비해 법원의 통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행했으나, 패킷감청은 입법 미비를 역이용해 포괄적 규정에 적용해 시행하고 있다. 오 교수는 "판사들에게 물어보면 '패키지 감청'으로 오인해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영선 의원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맞춰 우리 법제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감청장비 도입에 대한 법적 규제를 포함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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