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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싸워서 이기려는 사람들

[문화, 우주를 만나다] 절제, 현대인의 미덕

대륙 횡단의 종착지에서

재작년 여름이다. 미국의 동쪽 끄트머리인 케임브리지(Cambridge, MA)에서부터 장장 8500킬로미터를 줄기차게 달려 보름 만에 남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리버사이드(Riverside, LA)에 도착한 게 8월 하순이었다. 주위 경관이 온통 '초콜릿' 일색인 리버사이드에서 지친 육신에게 긴한 휴식을 48시간쯤 허락하고 났더니 역마살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한다.

더 쉬겠다는 아내를 유혹하여 무작정 하이웨이 I-710에 올랐다. 리버사이드를 출발한 지 반시간쯤 됐을까, 거대한 '흰 잠자리'들의 무리가 초콜릿 벌판을 질서정연하게 수놓고 있었다. 줄잡아 3~4000기의 풍력 발전기들이 샌고르고니오 길(San Gorgonio Pass)을 통과하는 바람의 거센 숨결을 차분하게 맞고 있었다.

▲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Palm Springs) 근처에 자리 잡은 샌고르고니오 길(San Gorgonio Pass)의 풍력 발전기를 멀리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 사진의 중앙부를 하이웨이 I-710이 거의 직선으로 좌(서)에서 우(동)로 달린다. ⓒ홍승수

나는 열병 식장에 들어선 군단장이라도 된 듯 늘어선 세 쪽 바람개비들 사이를 서에서 동으로 시원하게 달렸다(사진). 하지만 곧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하천의 이용 및 관리에 관한 법이 가장 잘 발달된 지역이 서남부에 몰려 있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주의 남부와, 네바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주들이 그렇다. 이 지역에는 물이 귀한 대신 바람이 거세게 분다. 그러고 보니까 바람의 이용 및 관리에 관한 법 역시 이 지역이 유명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윗동네 너희가 바람의 숨결을 다 죽여 놓으면, 아랫동네에 사는 우리는 물마저 없는데 무엇으로 어떻게 전기를 생산하란 말이냐!"

위아래 동네 사이에서 뭐 이런 식의 시비가 일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 으레 그랬듯이 아내는 내 상상이 터무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나는 바람의 '바람기'가 태양의 '충동질'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소비하는 에너지가 태양의 복사 에너지에 비해서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다.

비교의 대상이 왜 하필 태양인가. 화석 에너지의 사용은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기 식이다. 여태껏 인류는 '과거를 파먹고' 살아온 셈이다. 과거 파먹기는 핵에너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실질적인 에너지의 공급 측면에서 보면, 지구는 오직 태양에게만 열려있다.

우리가 태양 에너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빛 에너지의 청정성보다, 태양이 실질적으로 행성 지구의 유일한 에너지의 수입원(收入源)이기 때문이다. 지구에 실시간으로 직접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은 태양밖에 없다는 사실에 유의한다면, 태양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확실하다.

지구, 인구 120억의 요람

인구학에서는 지구의 최대 수용 인구를 120억으로 추산한다. 이 정도의 인구는 행성 지구에서 비교적 안락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인구 조사국이 추산한 2010년 1월 29일 현재 세계 인구는 67억 9930만 명이다. [그림 1]은 유엔의 2004년 예측과 미국 인구조사국의 그 동안의 연구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1800년에서 2100년까지 세계 인구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바로 가기).

2004년 이후의 세계 인구는 모형 분석에 사용한 가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초록색 선을 따르면 세계 인구가 2040년을 정점으로 약 76억 명에서 점점 감소할 것이다. 주황색 선은 90억 명 수준에서 크게 늘거나 줄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빨강색 선은 세계 인구가 2070년쯤에 120억 명 넘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림 1] 유엔과 미국 인구조사국이 조사·예측한 1800년에서 2100년 사이의 세계 인구 변화. 세로축의 눈금 값은 백만 명을 단위로 한 세계 인구다. 파랑색 선이 실제로 조사된 인구를 나타내고, 나머지 색깔의 선들은 추산한 결과다. ⓒ프레시안

바다가 차지하는 지구 표면적의 3분의 2를 제외한 나머지 육지 부분에 120억 명이 고르게 분포해 산다면 한 사람이 평균 120미터×120미터의 면적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60년 후라 하더라고 사람들은 추운 극지방, 뜨거운 사막, 숲이 짙게 우거진 밀림, 그리고 높고 험악한 산악지 등에서는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즉 태양광을 이용한 에너지의 실시간 현지 공급을 전제로 했을 때,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평균 면적은 앞에서 얘기한 대륙 면적의 5퍼센트를 크게 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평균가용 면적을 나는 대략 30미터×24미터로 잡기로 했다.

한 사람당 약 220평(坪)을 차지하게 된다. 참고삼아 이 값을 인구밀도로 환산하면 1제곱킬로미터 당 1400명에 해당한다. 현재 서울의 인구 밀도가 1제곱킬러미터 당 1만7000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뉴욕의 8배이며, 도교의 세 배, 멕시코의 두 배다. 30미터×24미터 당 한 명꼴은 뉴욕에서보다 약간 더 넓게 사는 셈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한 5퍼센트는 상황을 결코 과소평가한 결과가 아니다. 중국 대륙만 보더라도 해안을 따라 좁고 긴 지역에 사람들이 몰려 산다.

최근에 국립기상연구소가 우리나라의 태양광 자원 지도를 발표했다. 전국에서 태양광이 가장 풍부하다는 경남 남해안 지역의 1제곱미터 면적이 태양으로부터 1년 동안에 받는 복사 에너지가 5200메가줄이다(☞바로 가기). 태양 복사 에너지의 유입률 5200메가줄은 여러 해 동안 측정한 결과를 평균해서 얻은 값이다.

지구 대기의 상층 1제곱미터의 면적이 밤낮으로 1년 동안에 받을 수 있는 태양 에너지의 유입률은 이 값의 약 8배인 4만3000메가줄이다. 태양 광도와 태양-지구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서 계산한 결과다. 이 중에서 35퍼센트 정도가 반사돼서 다시 우주 공간으로 나가고, 일부는 지구 대기에 흡수되며, 위도에 따라 태양광의 입사각이 다를 뿐 아니라, 태양의 반대쪽은 햇빛을 받을 수 없고, 계절과 기후에 따른 일조량의 변화 등을 고려한다면 앞에서 얘기한 8배의 차이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 30미터×24미터 면적이 1초 당 받는 태양의 복사 에너지, 즉 에너지 유입률을 계산해 보면 약 118킬로와트가 된다. 어려운 계산을 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얘기한 5200메가줄에 면적 30미터×24미터를 곱하고 1년을 초로 바꿔 줬을 뿐이다.

하늘은 우리가 안락하게 살라고 각자에게 약 220평의 땅을 '하사'하시고, 그 땅에 에너지를 120킬로와트의 율로 거저 퍼부어 주신다. 하늘이 허락하는 양의 에너지만으로 우리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 땅 220평의 요람 여부는 각자가 하늘이 허락한 이 무상의 에너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디 한 번 본격적으로 따져보자.

소비, 과연 미덕인가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다. 난방이 되지 않는 연구실에 나와 앉아서 글을 쓰자니 좀 춥다. 그렇지 않아도 잘 써지지 않는 원고인데 실내 온도마저 내 사고에 분심을 일으켜 방해한다. 바로 옆에 전기난로가 보인다. 전기가 비싼 에너지라는 생각에서 약간 주저한다. 결국 용량 1킬로와트의 내 낡은 전기난로에 전원을 연결했다.

한 10분쯤 지난 지금은 견딜 만하다. 추위의 분심에서 해방됐다. 아, 하늘은 정말 너그러우시구나. 당장 필요한 1킬로와트의 무려 120배나 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공짜로 다 내게 주신다니 말이다. 전원을 넣으면서 주저했던 나의 좀스러움이 이제 무색해진다.

현재 자판을 두드리는 노트북 컴퓨터, 그 옆에 켜놓은 넓은 화면의 보조 모니터, 천장에 붙어 있는 형광등 네 개가 전기를 더 쓰고 있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를 연주하는 티볼리 오디오의 앙증맞은 모습도 눈에 띈다. 이들이 사용하는 전기를 다 합쳐도 1킬로와트를 넘지 않을 터. 그렇더라도 무려 60배가 아닌가. 그렇다면 더 흥청거려도 되겠네! 과연 그래도 좋을까……. 따져봐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

[그림 2] 지구인의 평균 에너지 소비율을 1980년에서 2005년까지 추적한 결과다. 세로축 눈금이 한 나라가 사용하는 1차 에너지의 총 소비율을 그 나라의 인구로 나누어 킬로와트 단위로 표시한 값이다. ⓒeia.doe.gov

[그림 2]를 참조하면 한국, 중국, 미국에서의 개인당 에너지 소비율이 198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의 세로축 눈금이, 한 나라에서 1차 에너지의 형태로 사용하는 총 에너지의 소비율을 그 나라의 인구로 나누어 킬로와트 단위로 표시한 값이다.

여기서 언급한 에너지에는 필자가 오늘 아침 연구실로 오는 데 소비한 휘발유, 어제 밤에 아파트 난방에 쓰인 에너지, 포스코의 용광로에 들어가는 에너지, 국회의사당 내부 조명에 쓰인 전기 에너지 등이 모두 다 들어가 있다. 한 사람이 '안락한 삶'을 유지하는 데 전부 필요한 내용이다.

이 그림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들이 보인다. 우선 미국 사람들의 흥청망청은 세계 평균(빨강선)을 훌쩍 넘어 다섯 배가 된다.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는 수준이니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근검한 중국 사람들이 돋보인다. 하지만 저들의 에너지 소모율이 최근에 와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정은 인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너지 소비율의 증가를 놓고 볼 때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따라잡을 나라는 없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사람 한 명의 평균 에너지 소비율이 11.5킬로와트이다. 세계 인구가 120억 명에 이르는 2070년경이면 이 값이 20키로와트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떵떵거린다는 미국을 벤치마킹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씀씀이가 넉넉해지기 바라는 건 우리 모두의 소망일 터이니, 오늘 미국인의 삶을 '안락한 삶'의 잣대로 삼아도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태양이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는 에너지는 우리가 필요한 양의 60배가 아니라 6배라는 계산이 나온다.

아, 겨우 6배! 정신이 번쩍 든다. 필요한 양의 6배라고 느긋해질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 땅 220평 위에 쏟아지는 햇빛을 모두 모아도 빛 그자체로는 내 컴퓨터를 한 순간도 돌릴 수 없다. 물론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다. 빛에서 어떻게든 전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태양 전지가 필요하다.

오늘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태양 전지가 갖는 복사에서 전기로의 변환 효율이 12~18퍼센트 수준이다. 앞으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면 이 효율을 최대 42퍼센트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최고 성능의 태양 전지를 사용하면 120킬로와트 복사에서 최대 50킬로와트의 전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요한 양의 2.5배나 된다고 좋아할 형편이 못된다. 태양 전지판(solar panel)의 수명을 약 20~30년으로 잡는다. 그런데 전지판을 만드는 데 이미 들어간 에너지를 태양광에서 뽑아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2년이다. 그러므로 거의 10퍼센트에 이르는 효율 손실을 또 계상해야 한다.

아무리 현지·실시 공급이라 하지만 송전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 7~8퍼센트도 각오해야 한다. 동력 장치로서 전동기를 이용하려면 태양 전지에서 나오는 직류를 교류로 바꿔야 하는데, 이 과정에 또 적지 않은 손실이 따른다. 열기관의 효율도 문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에너지는 한밤중에도 필요하므로 낮에 만든 전기를 축전지에 잘 담아 둬야 밤에 쓸 수 있다. 이 과정에서의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결국 220평을 모조리 태양 전지 판으로 덮어야 할 판이다.

인류의 에너지 소비를 실시간으로 현지에서 직접 조달하기란 태양에게마저 버거운 과업인 것이다. 이 계산 결과에서 우리는 자연이 인류의 엄청난 소비 성향에 울리는 경종의 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소비가 미덕이 아니었다.

재생 가능 에너지의 허와 실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계속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나는 태양광, 풍력, 조석력, 지구 내부열 등을 재생 가능 에너지원이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만으로는 인류 문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전량 해결할 수 없다. 이 간단한 논지로 태양 에너지의 무용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태양 에너지의 활용으로 인류의 화석 에너지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읽어내야 할 메시는, 현대인의 소비 행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성인 것이다.

과학자의 노력으로 방금 열거한 온갖 요인의 손실들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치더라도, 한 사람에게 주어진 220평의 적어도 절반에는 태양 전지판을 깔아 놓아야 '안락한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전량 태양광에서 꺼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상추는 어디에다 키울 것이며, 김장 배추와 무는 또 어디에서 키워야 하는가. 소와 양 들을 먹여 키울 초지는 또 어떻게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안락한 삶'의 질을 한 단계 희생할 셈 치고 태양 전지판을 바다나 사막으로 옮겨 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누가 믿거나 주장한다면, 그건 앞에서 얘기한 경종의 메시지를 그가 제대로 읽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바다 속에서도 태양빛을 '고파하는' 생명이 우글거린다. 바다의 표면을 온통 전지판으로 덮어 태양광의 유입을 차단해 보라, 어떤 일이 생기는가. 일부 어류들의 멸종은 불을 보듯 뻔하고 해류 이동에 큰 변화가 생겨 또 다른 형태의 '엘니뇨'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사막에 쏟아질 햇빛을 우리가 태양 전지판을 이용하여 모조리 가로챈다면, 그 지역의 기온이 낮아지면서 대기 흐름에 큰 변화가 초래 될 것이다. 우리는 한 동안 '사막은 살아 있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거기에도 햇빛 덕분에 생을 이어가는 생명이 널려있다. 태양 전지판이 사막을 점령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때 '사막마저 다 죽었다'고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위력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과학자와 기술자 들이 무슨 수단으로 태양의 광도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지구의 덩치를 단 한 치라도 더 키울 수 있겠는가. 과학과 기술이 산업 활동과 우리 일상에서의 에너지 이용의 효율은 높여줄 수 있겠지만, 인류가 행성 지구에 붙어사는 한 지구의 생래적(生來的) 한계는 과학과 기술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엄존할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절제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미덕은 소비가 아니라 절제인 것이다. 절제, 그 건 하늘의 명령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태양 에너지에 걸었던 나의 희망이 통째로 무너졌다. 한 발짝 물러서서 돌아볼 차례다. 행성 지구에게 주어진 자연의 '경계 조건'이 의외로 냉혹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굳게 맺었다는 약속은 본래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이었던 셈이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 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는 그 약속 말이다. 우리 은하수 은하 하나에만 수천억 개의 별들이 존재하는데, 지구가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총(人總)이 고작 100억 명에서 멈춰야 한단다. 에너지의 실시간 현지 공급이란 관점에서 볼 때, 120억 명에 그어진 상한선은 지구의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한 결과가 아니었다. 나는 이 계산을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동안 지구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깨달았다.

지구상의 인구가 앞으로 [그림 1]의 빨강 색 선을 따라 증가하게 된다면, 지구는 우리가 바라는 요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막과 밀림과 늪지와 영구 동토 등의 극한지 마저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과 아브라함이 맺은 약속이 숫자에 시시콜콜 얽매일 필요야 없겠지만, 인류가 1000억은 고사하고 수백억의 개체로 불어나려면 우리는 지금부터 절제를 미덕으로 받아들여 매일의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하늘의 약속이란 인간이 지켜야 할 절제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부서뜨려야 할 '원수의 성문'은 '소비를 미덕으로 알라는' 현대 물질문명의 유혹이었던 것이다.

이제 한 발짝 더 물러서서 페르미의 패러독스를 돌아보자. 지구 문명이 최근에 이룩한 급격한 발달 과정을 보면 우리보다 다만 1만 년이라도 앞서 출현한 외계 문명이 있다면 저들은 지금쯤 행성 간 여행을 하고도 남을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계 문명권의 지구 방문에 관한 기록이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흔적은 지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구형의 고체 행성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떠안게 된 물리적 한계가 저들에게도 '절제의 삶'을 강요했을 것이다. 저들이 진정 우리보다 앞선 문명사회라면 절제의 미덕을 삶에 실천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저들은 무슨 일이든 적정 수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외계인과의 뜨거운 악수를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유희를 마치면서

북미 대륙 횡단의 종착지에서 시작된 내 사유의 유희도 이제 마감할 차례다. 결론은 확실하다. 지구 생태계를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여 120억 명의 인총만이라도 안락한 삶을 영유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덜 쓰며 살아야 한다.

과학 기술이 동력 장치 등의 에너지 효율을 높여줌으로써 에너지의 절대 소비량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에너지 효율의 개선이 에너지 소비의 욕구를 오히려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혀 제 멋대로 살아온 우리의 마음을 근본에서부터 돌려놓아 '절제가 미덕'임을 알아야 한다.

나 한 사람의 절제가 지구와 인류를 살리는 길이다. 누가 우리에게 이 깨달음의 길을 열어 줄 수 있을까. 여태껏 종교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인간의 주요 덕목으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종교는 절제를 가장 중요한 현대인의 덕목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사족을 하나만 붙이겠다. 늘 '피식 웃음'으로 응대하지만 아내는 나의 대륙 횡단과 사유의 유희를 동반한 유일한 상담역이었다. 사운딩 보드의 반향을 듣고 싶어서 나는 '절제의 미덕'을 아내에게 역설했다. 내가 펼치는 논지를 조용히 따라 오던 아내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당신, 이 자동차 처분해야 하겠어. 휘발유를 너무 많이 먹는다며."

도리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멍한 정신을 추슬러 구차한 답을 하나 겨우 찾아냈다. "그래 우리 하이브리드 차를 사자고." 아내의 반격이 계속됐다. "그 때까진 그럼 어떻게 하고?" "나 이제 지공(地空)인데, 전보다 전철을 많이 이용해야지." 아, 실천! 고놈의 실천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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