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선거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점은 이제 상식이어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뿌리내린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스위스조차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 100년 전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황당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흔했다.
"누구나 투표권 갖듯, 누구에게나 기본소득 보장돼야"
20세기가 보통선거권 확립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 도입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이들이다. 판 빠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 수플리시 브라질 노동자당 상원의원, 블라슈케 독일 좌파당 연구위원 등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주도한 이들이 대거 참가한 행사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서, 투표권을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기본소득 역시 노동 여부와 관계가 없다. 부(富)를 창조하는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평생 도박에 미쳐 지냈던 이라도 매달 일정한 소득을 보장받는다. 거꾸로,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들에게도 매달 똑같은 돈이 지급된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최저 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무조건 보장돼야 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주장과도 통한다. 예수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저녁 늦게야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씩 나눠준 포도원 주인에 대해 말했었다. 생산에 덜 기여한 사람도, 기본적인 소득은 누릴 수 있어야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되는 내용이다.
▲ 한국에서도 진보진영 일각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다. 지난 27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사람연대 |
'모든'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아야 하는 이유
'가난한 이들에게 최저 생계비를 줘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굳이 돈이 필요 없는 부자들에게도 왜 똑같은 돈을 정부가 지급하지. 그 돈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이 주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크게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는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를 판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판정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오히려 낭비 요소라는 것. 판정 과정에서 각종 비리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닌 일부로 한정하는 순간 생겨날 반발이다.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부자들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높아지는 게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일에 자신들의 세금이 쓰이는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기본소득 수급자 수를 계속 줄이도록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작동하면, 기본소득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힘들다.
보편주의 복지를 택한 북유럽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이들 국가에선 부자든, 가난한 이든 똑같은 병원을 가게 된다. 부자들이 병원 서비스에 불만을 느낀다면, 이들은 공공의료 전체를 강화하는 쪽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기 어렵다. 자신들만 이용하는 병원을 따로 세우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겨난다면, 부자들은 공공의료 확충에 관심을 끊게 된다. 세금을 더 낼 의향도 사라진다. 결국 공공의료는 점점 축소되고, 질도 나빠진다. 기본소득 역시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같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권 차원의 접근이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 당위의 문제라는 논리다. 마치 선거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라는 것. 따라서 어떤 식으로건 기본소득 수급자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다.
우파도 도입 주장하는 기본소득
▲ 브라질 상원에서 시민기본소득법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의원이 방한해 강연을 했다.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주최팀 |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시민기본소득법'이 지난 2002년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뒤 하원을 거쳐 2004년 룰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올해부터 점진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이 법에 따르면, 브라질 국적자 외에도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까지 모두 일정금액을 받게된다. 당시 법안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상원의원은 이번 학술대회에 참가해서 "시민기본소득 제도 도입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미국에서도 기본소득이 도입된 주가 있다. 알래스카에서는 석유 매각대금의 일정액을 적립한 알래스카영구기금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일정하게 나눠준다.
독일에서도 기본소득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우파 성향을 띤 독일 기업인인 괴츠 베르너 지난 2006년부터 "소득세 등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소비세를 인상하여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을 해 왔다. 기본소득 도입 주장이 반드시 노동자와 좌파 사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 기본소득을 둘러싼 이론적 논의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도 보여준다. 실제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기본소득 도입이 성별에 따른 분업을 더 고착화 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를 없애려는 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도입 논의는, 자칫 가사와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를 만났다. 경제철학은 전공한 그는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안현호 대구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등과 함께 국내에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소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무상의료와 기본소득, 어느 쪽이 더 실현 가능성 클까"
▲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서강대 다산관에서 만난 곽노완 교수. ⓒ프레시안(성현석) |
곽노완 :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둔 이들이 많다. 사회당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도 실현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잠깐 생각을 돌려보자. 과거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런 공약과 기본소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손쉽게 도입할 수 있을까. 당연히 기본소득이다.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리므로, 적극적인 반발은 덜 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도입을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전체 국민의 90% 가까이가 이익을 본다. 압도적 다수가 명백한 이익을 누리는 제도를 왜 도입하기 힘들다고 보는가.
프레시안 : 모든 국민에게 현금으로 일정액을 나눠주는 제도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물가가 안정돼야 한다. 예컨대 서민에게 매달 100만 원씩 나눠준다고 해도, 주거비나 대학등록금, 의료비 등이 덩달아 뛰어오른다면 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정부가 국민에게 지급된 기본소득 총액만큼 통화량이 늘리는 경우에도, 물가상승은 피하기 어렵다.
곽노완 : 기본소득 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나눠준다는 핵심 내용에 동의하는 이들끼리도 구체적인 실행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내 입장은 기본소득이 현금과 현물로 이뤄져야 한다는 쪽이다. 현물이 포함돼 있으므로 물가 인상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주거, 교육, 의료 등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영역에 대해 공공성을 높여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기본소득 논의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국가 안보, 공교육 등을 모두 기본소득 범주 안에서 파악하는 학자도 있다.
또 기본소득이 현금으로만 지급되는 경우에도 지급액을 물가와 연동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통화량 증가 가능성에 대해 물었는데, 이 경우에도 꼭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부가 국민에게 직접 돈을 지급하는 경우에 대해 시뮬레이션해보면, 국민들의 구매력이 늘어난 것으로 나온다.
흔히들 걱정하는 게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주거비가 폭등하면, 기본소득을 도입해 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기본소득 논의를 조금만 뜯어보면, 이런 걱정은 사라진다.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어디서 확보하겠나. 대표적인 게 부동산 투기로 인한 소득이다. 투기 소득을 세금으로 전액 거둬들이는 것은 기본소득 도입의 전제 조건이다. 기본소득 도입과 부동산 가격 안정은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다.
▲ 부분적으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브라질은 2010년부터 전 국민에게 이 제도를 도입한다. ⓒ프레시안 |
"기본소득, 경제 활성화의 새로운 계기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기업가 정신도 활기를 띨 듯하다. 창업이나 발명 등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이들이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실패에 따른 부담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기본적인 생계가 유지된다면, 많은 이들이 혁신을 쫓는 도전에 뛰어들 듯하다.
곽노완 : 물론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경제가 활성화되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 구매력 증대로 인한 내수 활성화, 창업 증가로 인한 고용 증대, 도전 정신 고취로 인한 기술 혁신과 문화 생산 증가 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쟁점이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문제다. 원칙상으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한이 불가피하다. 특정 국가에서만 거주자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다면, 몰려드는 외국인을 감당하기 어렵다. 브라질 등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이라는 제한을 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여기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몰려드는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주면 국가가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제도를 면밀하게 다듬으면, 반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금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부족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외국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개방하는 것은 인구 부족에 대한 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또 잘만 활용하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이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어 교육 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경제적 이익도 커진다. 이런 이익 가운데 일부를 다시 기본소득으로 돌리는 선순환 구조가 생길 수 있다.
"노후 불안감 사라지면, 부동산에 집착할 이유 없다"
프레시안 : 문제는 재원 확보일 게다.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서 반대 여론이 인다면, 결국 이 대목일 듯하다.
곽노완 :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투기 및 불로소득을 거둬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소수 자산가 집단이 강력히 반대할 게다. 그러나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부동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늙고 병들어서 노동 수입이 사라진 뒤에는 불로소득이 있어야만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다. 이런 이들에게 기본소득 도입은 새로운 환경을 열어준다. 늙어 죽을 때까지 기본적인 생활비가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불로소득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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