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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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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RevoluSong] 소히의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10년 뒤 한국사회는 또다시 두 개의 국가로 나눠질지 모른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는 엄격한 계급사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종적 특징을 타고 났을 뿐, 먹고 마시고 입고 살고 교육받고 놀고 즐기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한국 사회의 상위 10%와 나머지 90%의 삶은 너무나 견고한 벽으로 둘러쌓여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벽을 뚫기 어렵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 하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라고 불리기를 꺼려하고, 노동조합의 파업에 적대적이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오르기만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주류의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승자독식의 체제를 끊임없이 강화시켜줄 뿐이다.

가령 서울의 서북부나 동북부에 사는 사람들이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덩달아 오르기를 바란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변방의 아파트 가격이 올라간다 한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왜냐하면 다함께 급등한 아파트 가격으로 인해 결국 그들의 자녀들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는 미래를 맞아 변두리 도시로 쫓겨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평론가 L의 주장처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화, 그것은 어쩌다 길거리에서 정치적 유인물을 나눠 줄때도 금세 확인된다. 유인물을 가장 받지 않는 부류는 바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자신은 비정규직 문제와 관계없고, 용산참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들의 오해와 그 오해를 작동시키는 사회정치문화의 패러다임은 한국 사회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답변을 완성시켜준다.

밴드 잠에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해 활동중인 잔뼈 굵은 인디 뮤지션 소히의 곡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는 바로 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순같은 현실을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담아낸 곡이다. 지난 해 초봄 억울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한강 양화대교 옆 고수부지 송전탑에 올라가고 그 곁에서 작은 공연을 했을 때, 그들의 절박함과는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은 그저 조깅을 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다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 싸우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그녀는 송전탑에 올라간 사람과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무심함과 외면에 깊이 상처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것이다. 민중가요 음악인은 아니지만 지난 2년동안 촛불집회와 용산참사,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활동현장 등에 기꺼이 달려와서 자신의 1집에 담긴 따뜻한 노래들을 부르곤 했던 뮤지션 소히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놓치지 않고 노래함으로써 2009년의 한국사회를 아프게 증언해냈다. 누군가가 해고당하고,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그 일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승리에 대한 다짐에 주로 매달림으로써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을 오히려 이념적으로는 덜 철저하고 경험도 더 적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더 정확하게 기록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지난 2년동안 이런 저런 문제적 현장에 자주 와서 소박한 마음 하나만으로 노래하고 가면서 현실을 가감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리하여 어쿠스틱 기타와 미디로 찍은 드럼과 이펙트 사운드가 만들어 낸 투명하면서도 다소 몽롱한 사운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리얼한 그녀의 시선이다. 바로 그녀가 절감한 현실 인식의 차이와 무심함과 얄팍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탄식과 비애이다. 이처럼 현실을 냉정하게 기록하고 진심을 다해 표현해내는 것은 우리 시대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며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해도 좋은 노래는 다시 우리를 멈추지 않게, 아니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다. 뮤지션 소히가 보내온 편지를 덧붙인다.

"작년 봄, 겨울이 채 끝나기 전의 싸늘한 날씨에 양화대교 옆 한강 고수부지 송전탑에서 조그마한 공연이 하나 있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부당 해고한 회사에 맞서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자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 올라갔고 그 탑 옆에서 작은 공연과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가진 것이다. 내게 그 광경과 기억은 참 특별했다. 서늘한 날씨였는데, 위에 올라간 분들의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긴 줄을 이용해 공급했고 나머지 분들은 옆의 큰 천막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내 노래를 듣는 이는 서너 명만 빼고는 모두 콜트 노동자들이었고, 공연 하는 곳 옆을 동네 주민들이 조깅이나 산책을 하며 지나갔다. 그렇게 답답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어디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뿐만 아니라 용산도 그랬고 쌍용자동차도 그랬다. 그래야 사람들이 봐주니까. 관심 가져주니까.

▲ ⓒ프레시안
송전탑 위에서 용산을 바라보는 걸 상상해 보았다. 점점 더 욕심내는 사람들 때문에 삶이 서글퍼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것을…. 부자든 해고당한 사람이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든 모두 한강을 보며 살게 되었지만 참 다른 삶이다. 우리는 마치 각자의 삶인 양 살고 있지만 교묘하게 뺏고 빼앗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교묘함을 가리고 있는 것이 사회와 정부다. 그리고 가려진 장막 사이로 유유히 한강변을 운동하며 지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재판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도 그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못할 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긴 시간 지나지 않아도, 법이 재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인간성 회복의 시대가 어서 열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짜투리 마음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공존의 시대도 어서 열리길 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작사/작곡/노래/연주 소히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그 위에선 누굴 위한건지
폐허들이 보였어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법 앞에서만 고갤 떨구는
사람들도 보였어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송전탑 옆을 지나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였어
그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
시간 지나가도
잊혀질 수 없어
긴 시간 정말 힘들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매주 화, 목요일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될 이번 릴레이음악 발표를 통해서 독자들은 당대 뮤지션의 날카로운 비판을 최고의 음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다시 음악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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