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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선전에 정신 없는 한국 언론,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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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선전에 정신 없는 한국 언론, "정신 차려라"

[기자의 눈] 당근에 몸 판 '나귀 수준' 한국 언론

인류 최악의 전쟁 범죄자로 흔히들 손꼽는 아돌프 히틀러. 수많은 철학자를 낳은 국가로 잘 알려진 독일 국민들이 그의 인종청소와 세계 패권주의를 지지하게 만든 일등 공신(?)의 하나가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다. 그가 한 말 중 나름 인상적인 말이 있다.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에는 의심한다. 그렇지만 계속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 괴벨스는 언론 선전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각종 비판 언론을 줄줄이 폐간시키는 등 언론 통제를 선전전 제1호 목표로 삼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은 사실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괴벨스의 망령을 떠올리는 건, 언론 통제가 한국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채찍을 들 필요도 없다. 당근만 쥐어주면 된다. 당근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광고요, 다른 하나는 기삿거리다.

언론은 돈이 남지 않는 장사다. 신문 한 부를 찍을 때마다 적자를 보는 건 비단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145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서부의 정론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폐간위기에 처했다. 1면 광고를 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뉴욕타임스>도 경영 위기로 전면 광고를 받아들였다. 한국 언론 기자들이 흔히들 자조 섞인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표적 농담인 "기사로 엿바꿔먹기"는 광고를 따오기 위해 언론사가 광고주에 대한 홍보성 기사를 써주는 행태다. 언론은 광고로 통제 가능하다. 돈이 있다면.

모든 기자가 특종을 원한다. 기삿거리는 가장 매력적인 당근이다. "내가 당신한테만 특별히 하는 말인데…"하는 식도 필요 없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위력적인 상품이 되는 사람이 입을 열면 언론사는 '일단 받아쓰고 본다.' 이건 속성이다. 인터넷으로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파되면서부터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한 연예인이 "XX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면, 이게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기사화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보고, 그에 따라 광고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만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유명인이 입을 연다면? 언론을 통해 사회를 통제 가능하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 최대의 광고주다. 가장 매력적인 취재대상이다. 수많은 기자들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라간다. 그가 광고 게재 여부를 결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어떤 언론사는 회사 전체가 휘청거린다(이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당시 이 전 회장이 직접 언론사 광고 게재 여부를 지시했음이 알려졌다). 그가 입을 열면, 기사가 된다. 참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전 회장이 사면 후 첫 공식 행보를 가졌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박람회 CES다. 당연히 각 언론사의 삼성 출입 기자들은 줄줄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9일(현지시각), 그가 입을 열었다. "사회 각 분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가 그가 한 얘기의 핵심이었다. 유죄가 확정되고도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는 추상적 이유로 갓 사면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사실 좀 마뜩찮다. 어쩌면 그도 낯부끄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정신 차리라"니.

답답한 것은 언론의 태도다. 그의 과거 행적을 지적하며 이런 발언을 한 태도를 비판하는 기사는 없다. 그저 그가 한 말을 앵무새처럼 받아쓴 기사, 이건희 일가 중 누가 거기 참석했느냐를 찾고 나선 기사, 그가 과연 경영일선에 복귀할 것인지를 추측하는 기사, 동계올림픽 유치 준비가 잘 될지를 전망하는 기사 정도가 전부다. 이건희의 선전전에 모든 언론이 휘둘리고 있다.

이건희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이미 법정에서 밝혀진 '팩트'다. 그러나 어떤 언론에서도 '이건희는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한국 경제에, 한국 사회에, 한국 외교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를 강조하는 기사만 넘쳐난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참이 된다. 이건희에 대한 처벌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이건희를 칭찬만 하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접하면 어느새 '이건희는 처벌받아선 안 된다'는 의견에 동조하게 된다. 언론은 이건희의 괴벨스다. 이건희는 어떤 폭압적 방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언론의 눈앞에 대고 당근만 휘저어봤을 뿐이다. 한국 언론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그토록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다른 언론의 CES 관련 보도 내용을 종합해본다. 이건희는 "아들과 딸들이 더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 복귀 의지를 밝힌 셈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은 활동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가 사면 직후 출국하자 일부 경제지는 "이건희 전 회장이 벌써부터 올림픽 유치를 위해 해외로 나갔다"고 그를 칭찬했다. 정정보도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왼쪽부터)이부진 삼성에버랜드 전무와 이건희 전 회장, 홍라희 여사,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CES에서 이건희 일가는 마치 '셀러브리티' 같았다. 현장에 참석한 기자들은 그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세세히 취재했다. 그런데, 이건희 일가가 손을 잡고 다녔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중요한 기삿거리일까.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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