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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잘 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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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잘 사는 사회

[의제27 '시선'] 경제정책 목표·방향·수단 모두 확 바꿔야

1. 시대와의 '불화'

난 아무래도 이 시대와 '불화'하고 있다. 물론 지난 정권에서도 불만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고소영 내각, 4대강 사업, 공공기관 민영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부자 감세, 금산분리 완화, 재벌규제 완화, 노조 탄압,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격 살인, 신문법과 방송법, 싹쓸이 인사, 용산 참사, 서울광장 폐쇄 등 모든 '정책'과 '행태'가 나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가끔은 내 '상식'이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자신의 인격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주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 청와대와 여의도가 발신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살벌하다. 이미 충분히 '유복'하고 '실력' 있고 '수완' 좋은 사람들만 행세하는 그런 사회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제개발의 목표, 방향, 수단 모두 확 바꿔야 한다. 토건과 재벌중심 경제, 비민주적 정책결정과 실시, 묻지마 대외개방을 벗어던져야 한다. 건전한 시장이 작동되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중소기업에 신경 쓰고, 사회서비스 확대로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 모든 정책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지치고 힘든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확신과 논리를 가다듬어가야 한다.
▲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 전경련 회관을 찾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기업 총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회 사진기자단

2.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능력을 귀중히 여기는 성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21세기 시대정신에 맞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의 능력이 최대화되는가?

먼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능력이 최대화되지 않는다. 사람은 단순한 경제적 동물(homo economicus)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서로 즐기며(homo ludens), 이성적 결단에 의해 미래를 개척하는 현명한 존재(homo sapiens)인 것이다. '당근'과 '채찍'만이 아니라 사회 속의 '동감'과 '감동'이 곁들어져 처음으로 능력이 발휘된다.

그러나 애써 대학을 졸업해도 태반이 비정규직이며, 의료와 주택과 소득에서 불안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감동'이 들어갈 여지는 애초부터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능력을 개발할 수도 없으며, 눈앞에 닥친 생활의 해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학습과 참여'도 중요하다. 학생들은 입시와 입사지옥에 시달리며, 여성들은 가사노동에 매이며, 직장인들은 나이 40이 넘으면 구조조정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창조적 지식이 축적될 리가 없다. 만약 기업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한다. 복지, 교육, 환경, 의료의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며, 그 일자리에 맞게 사람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모두가 '학습'하고, 학습된 지식을 생산 활동 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

오바마가 대학 장학금을 증액하고, 미국인 모두에게 평생학습 계좌를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정책을 펴는 것도, 또한 하토야마가 직업훈련기간 중 최대 월 10만엔 지원금을 지급하려는 것도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가 21세기 경쟁력의 기반이기 때문이다(<오바마의 그린 뉴딜 vs. MB의 그레이뉴딜>, <하토야마 민주당의 불안한 진보실험>, www.knsi.org).

3. 복지는 경쟁력의 기반이다.

확인해야 할 것은 복지는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안정감을 확보하고 자신을 더욱 개발시켜 가도록 하는 지식사회 경쟁력의 중요한 '수단'이다.

혹자는 '복지병'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복지국가를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 정부가 지출하는 복지예산 규모는 GDP대비 6.9%로서 OECD 평균인 20.6%(2005년)에 비해 턱없이 낮다. 또 다른 혹자는 복지예산을 걱정한다. 걱정되면 당연히 세금을 걷어야 할 것이다. 애초부터 한국의 국민부담율(세금과 사회보험비의 GDP비율)은 26.8%로서 OECD 평균인 35.9%(2006년)에 한참 못 미친다. 정부가 별로 해주는 것도 없지만 '고맙게도' 별로 돈도 안 걷는 것이다. 세금이야 '있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상식이나 '세금폭탄'이라고 사방에서 아우성친다.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다.

일부 식자층은 증세를 하면 경제적 활력이 줄어든다고 제법 전문지식을 동원한다. 그리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감세를 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런 분들에게는 제발 부탁드린다. 이론이든 사례든 증명해 주시길 바란다.

적어도 나의 지식 속에서는 감세의 경제성장효과란 이론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각국이 직면하는 실질적, 경험적 사실에 입각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1990년대 혹은 2000년대에 벌어진 일본과 미국의 감세정책은 경제적 효과로서 발현되었다고 평가하기 어려웠다.

가령 부시 행정부 시절 2003~2005년까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하버드대학 교수 N.그레고리 멘큐(N. Gregory Mankiw)는 자신의 경제학원론 초판에서 감세를 중심으로 한 공급경제학파를 '괴짜 사기꾼들'이라고 평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정책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3월10일, 기획재정부의 대통령업무보고에서는 조세연구원의 연구(2008년1월)를 인용하며, 법인세율 1%p 인하시 국내투자 2.8% 증가, 고용 4만명 증가, 외국인투자 4천억원 증가, 명목GDP 0.2% 증가라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정확한 계산의 근거는 제시된 바 없었다.

혹자는 한발 더 나아가 경제통합 이후 유럽 각국에서 벌어졌던 감세경쟁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그 규모도 크지 않을뿐더러 대상도 주로 법인세감세에 한정되는 경향이 강했다. 법인세, 소득세, 상속세, 양도세 모두 다 대대적으로 감세하는 경우를 적어도 지난 20년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더구나 감세 속에서도 복지국가 유럽의 기본틀이 흔들린 것도 아니었다. 재정건전성과 복지국가와 경제성장이라는 3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버린 스웨덴의 사례도 존재한다.

대체 그들은 하는데 왜 우리가 못하는가? 복지국가도 만들고 국민소득도 3만 달러로 늘리고 노동도 안정화된 그런 사회가 왜 우리의 미래가 못 되는가? 중요한 것은 토건과 재벌과 특권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정책체계를 바꾸어 가는 것이다.



4. 수출만이 능사는 아니다.

수출입국의 망령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시대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어야 함은 당연하다. 수출은 잘 되는데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중소기업은 여전히 어려운 현실은 단순한 수출증가가 경제정책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GDP 대비 수출입의존도는 이미 90%를 넘어서고 있다. 2008년 현재 한국의 수출입의존도는 92.3%로서 중국(59.2%), 일본(31.5%), 미국(24.3%), 프랑스(46.0%), 독일(73.1%), 영국(41.1%)을 크게 앞질렀다. 2000년의 63.7%보다 무려 30%p 가까이 증가한 것이었다(통계청통계, www.kosis.kr). 이에 따라 수출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가 고착되었으며, 대외요인에 의해서 우리 경제가 크게 좌우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일본에서 수출입의존도가 30%를 넘어서면서 내수중심의 경제로의 전환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수치는 과도하게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수가 제대로 성장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빈부격차의 증대로 국민대다수인 서민대중의 가처분소득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대기업간의 산업연관관계가 무너짐으로서 대기업의 수출증대가 중소기업의 생산증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 서민생활안정과 내수성장

먼저 서민생활의 안정이 내수확충의 기반임을 인식해야 한다. 자녀수당, 육아수당, 공사립고등학교의 수업료 감면, 연금 수급자의 감세, 최저임금 인상, 농가호별소득보상제도의 도입 등과 같은 하토야마 신정부의 정책은 바로 국민의 가처분소득을 올림으로서 경제를 재도약시키려는 의도이다. 오바마 정부의 서민감세, 의료비보조 등의 정책도 정책목표는 마찬가지다.

혹자는 이러한 정책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경제적 양극화에 의해서 지탱되는 경제성장은 과도한 대외의존적 성장, 혹은 금융 및 부동산의 투기에 의한 비정상적인 성장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의 말처럼, 성장이 평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 안정된 성장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2) 중소기업과 내수성장

지난 10여년간 개발연대의 국가권력이 사라진 곳에 재벌의 시장권력은 더욱 비대화되어갔다. 재벌대기업은 이미 전자, 철강, 조선, 자동차 산업에서 세계적인 강자로 부상한 반면, 성장의 군불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전파되어가지 않았다. 투자율, 영업이윤율, 생산성, 임금수준 모두 중·대기업간 격차는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도 제한되어 갔다.

정책담당자들은 중소기업정책이 중요하다고 모두 말한다. 지난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소기업은 어렵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호·육성 되어져야만 할 대상조차도 시장권력에 그대로 노출시켜 결과적으로 경쟁력의 총체적 약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참여정부 중소기업정책의 기본노선인 '시장친화적 지원정책'은 기존의 중소기업 3대 보호막(단체수의계약, 지정계열화, 중소기업고유업종 제도)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대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한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정책도 정책실시수단이 주로 대기업의 자발적 참여와 자율시행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그 실효성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제부터라도 영세소자영업까지 포함한 중소기업에 대해서 제대로 지원해 나가야 한다. 가령 고학력자의 중소기업취업에 대한 지원(장학금마련), 중소기업제품 정부구매의 획기적인 증대, 중소기업청장의 장관급 승격, 대기업횡포에 대한 강력한 제제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지금 같은 중소기업의 몰락추세는 막을 수 없다.

(3) 사회서비스 육성과 내수성장

의료, 교육, 복지 등 사회서비스를 키워 새로운 내수증가의 경제성장을 이룩해야 한다. 사회서비스 일자리의 고용비중은 OECD 평균 21.3%로 우리의 13.8%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2005년). 더구나 토건과는 달리 사회서비스의 투자는 고용창출효과가 무척 크다는 점도 장점이다.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2006년 현재 취업유발계수가 사회서비스(복지·환경 등)는 25.0명, 교육·보건은 20.2명인 것에 반해 제조업은 9.6명, 건설업은 17.3명에 불과하다(한국은행 <2006년 산업연관표>). 고용창출, 내수증가, 복지증진으로 이어지는 사회서비스분야의 투자가 더욱 확대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5. 재벌공화국은 한국경제의 '독'이다.

재벌을 효율적으로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의 권력화'라는 말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경제학의 표준이론에 따르면 시장기구를 통해서 자원은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된다. 또한 경제발전을 가져오는 기술진보는 기본적으로는 치열한 시장경쟁을 통해서 배출된다.

지난 민주당 정권 10년의 가장 큰 성과는 개발연대를 통해서 배양된 기업의 비효율적 투자패턴이 상당히 정상화되었다는 점이다. 대우그룹의 해체에서 보이듯 재벌대기업의 '대마불사' 신화는 사라졌으며 정부 지원을 전제로 한 방만한 경영도 사라졌다. 이에 따라 OECD의 타국에 비해 경제성장률도 높았으며, 경제성장에서의 기술혁신의 기여도도 크게 높아지는 추세였다.

일각에서는 그 10년간에 설비투자가 연평균 2.6%(실질) 증가에 그쳐 성장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비판한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 이전의 투자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오히려 지난 몇 년간의 투자율지표는 한국경제의 투자가 더욱 건전화되고 투자효율성이 증대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한 면에서 '반시장적 좌파정권'이라고 정체불명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상당히 '악의적'이거나 '무식한' 발상이다. 적어도 지난 민주당 정권이 '반재벌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반시장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강행된 각종의 재벌규제 완화 정책은 시장의 독과점화를 더욱 촉진시킬 뿐이다. IMF 경제위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조장하며(총액출자제한 해제), 금융과 언론까지 재벌의 손에 장악하게 하는 것(금산분리 완화, 신문방송법 개정)은 건전한 시장경제 형성을 저해한다. 국민경제 전체가 재벌의 '볼모'가 되고, 재벌의 파산이 국민경제의 파탄으로 직결되어 갈 위험성이 무척 높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경제의 공정성과 효율성 측면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현행법의 틀 안에서도 재벌에 대한 '견제'는 상당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법부가 재벌대기업에 대한 '배려'가 너무 많은 나머지 법실행의 형평성이 크게 저해된다. 재벌의 불공정거래, 권력승계를 위한 불법행위(삼성의 에버랜드사건 등)에 대해 철저한 실형위주의 법집행만 이루어져도 불법행위는 상당히 근절될 수 있다. 한국경제는 경제학자가 고민하면 된다. 사법부가 고민하는 '월권'은 삼가야 하는 것이다.

6. '신뢰'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은 경제성장이란 것이 단순한 양적인 성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성장은 바로 사회 전체 시스템의 정비의 결과이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인적자원, 자본 그리고 기술의 요인들은 생산함수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노동과 자본 그리고 기술을 결합시키면 당연히 생산활동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이들 세 요소의 성장이 바로 경제성장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경제성장과정이 가지는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시켜 버린 것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정된 돈과 사람 그리고 기술을 조직화하는 사회적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능력을 우리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부른다.

사회자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구성원 간의 '신뢰형성'에 있다. 그러나 현정부는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책의 투명성, 민주성, 정직성에 심각한 기능장애를 보여 왔다. 금산분리완화, 감세, 환율정책, 4대강개발 등 민감한 정책사항에 대해서 제대로 된 공청회도 열리지 않았으며, 단지 자신의 논리에 대한 일방적 선전만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말'의 징후 또한 농후했다. 작년6월 통렬히 반성했다는 대통령의 담화가 귓전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선회했으며, 국민적 저항을 모면하기 위해서, 공기업 민영화는 공기업 선진화로,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개발로 무늬만 바꾸어 가는 형국이었다.

정책의 신뢰성을 확보하려면 정치가 정책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권화되고 보수화된 관료집단의 정책입안 및 정책실시 과정을 정치의 힘에 의해서 제어해야 한다. 또한 정치와 관료를 NGO 육성을 통해 견제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지식인 집단의 정책역량을 끌어들이기 위해 과감한 국책연구기관의 개혁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연구예산의 상당부분을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정권의 단순한 '마우스 탱크'로 전락되어 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어쩌면 예산의 상당 부분을 기업연구소, 학회까지 포함한 민간의 독립적 연구기관에 이양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비판적 시민사회 단체와의 의견소통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시민사회 단체는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서 생성된 귀중한 정책생산의 자산임을 명심해야 한다.

7. 비전 있는 개방이 필요하다.

한국경제가 한미 FTA와 같은 '악수'를 거듭하고 있는 이유는 한국의 대외경제전략이 전형적인 '무전략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장기적인 한국경제사회의 비전, 국제협력의 비전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전략이 없이 추진된 것에 기인한다.

거기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아시아 외교'를 한다고 한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과 FTA을 맺고 아시아 FTA의 중심축으로 발돋움한단다. 아세안+3, APEC 정상회담을 통해 신아시아 외교를 적극적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면 동아시아 전체에서는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적어도 나에게는 상상할 방법이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신아시아를 관통하는 '정신'과 '제도'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신아시아의 '신'의 의미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는 다른 세계관을 의미한다. 적어도 그것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동아시아의 새로운 과제이며, 모든 국가들이 고민해야할 주제였다. 그런데도 한손엔 한미 FTA를 부여잡고, 다른 한손엔 신아시아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에 대한 대응정책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만약에 신아시아를 이야기하고 싶으면 한미 FTA는 재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였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동아시아판 FTA가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모델로서 기능하도록 설계했어야 했다.

지금의 역사적 화두는 '무작정 개방'이 아니다. '어떠한 개방'인가 이며, 시장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어떻게 적절히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제이다. 경제에 있어서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금융, 농업, 약품, 투자(ISD) 등과 같은 분야에서의 개방수준을 상당히 '낮은' 단계로 설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과 함께, 금융위기 대책으로서의 '동아시아통화기금',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동아시아환경청', 낙후지역에 대한 개발원조를 담당하는 '동아시아발전기금' 등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칭 '동아시아경제사회연대협정'(East Asian Socio-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이라는 형태로 묶어나가는 자세가 진정으로 필요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비전인 것이다.

그러나 고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여전히 자유로운 자본과 시장 타령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우매함이거나,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고하는 오만함이거나 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국민에게는 재앙이다.

8.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잘사는 사회

내일은 성탄절이다. 2000년 너머 오늘 가나안땅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희망을 주러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한다. 평소 친한 어느 선배에게 들은 말이다. 멋있는 말이다.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한국 땅에도 따스한 희망이 필요한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우리 모두에게 올해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청 앞 광장, 봉하마을, 그리고 용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규하고 눈물을 흘리며 분노를 삭였던 것인가? 적어도 오늘 밤만은 그 모든 고단함이 위로받을 수 있는 포근한 밤이었으면 좋겠다.

수고하고 지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깃든 아름다운 밤이 되도록 진정으로 기원하며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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