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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바람'이 '박지성 출전'보다 재밌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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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황제의 바람'이 '박지성 출전'보다 재밌는 이유

[정희준의 '어퍼컷']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의 현실

마치 1990년대 중반 서태지의 계시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여중·고생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요즘 축구 기자들 말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무릎을 다쳐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이후 그의 결장이 장기화 되자 축구 기자들은 그가 결장한 경기 수를 카운트하는 기사를 시리즈로 쓰기 시작했다. '7경기…' '8경기…' '9경기 연속 결장'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기사 쓰기 참 쉽다.

부상 논란 속에 지난 달 있었던 덴마크, 세르비아 전에 출전해 펄펄 날아다닌 후에도 박지성이 맨유 경기에 결장하며 연속 결장 경기 수가 '12'에 이르렀을 땐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박지성은 물론 기자들까지도 말이다.)

그러다 지난달 26일 유럽 챔피언스리그 베식타스와의 경기에 출전하더니 2일엔 토트넘과의 칼링컵 8강전에 선발로 출전해 90분 풀타임을 뛰었다. 그가 90분을 전부 뛴 것은 8월 번리와의 리그 경기 이후 104일만이란다. 기자들에겐 가뭄 끝 단비다.

이 경기가 끝나자 박지성의 출전을 알리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나는 이제껏 이렇게 '일사분란'한 기사 제목은 처음 봤다. 거의 100여 개에 이를 기사들의 제목이 몽땅 '풀타임'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풀타임'이란 단어가 이토록 각광 받기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사실 이제까지 박지성 관련 기사들은 그 유형이 뚜렷하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기사는 ①'출격 대기', '출전 준비를 마쳤다' 등 박지성의 출전 분위기를 띄우는 기사들이다. 그런데 특히 올해 들어 박지성의 결장이 잦아지면서 이런 기사들은 결국 수많은 박지성팬 내지는 축구팬들을 허탈하게 했다. 정말 많은 이들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보느냐, 자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면서 등장한 새로운 부류의 기사들이 바로 바로 ②매 경기 전 '뛴다, 안 뛴다'를 예측하는 기사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점쟁이 언론' '역술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듯 하다. 이와 동시에 등장한 부류의 기사는 ③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측정하는 기사들이다. 이러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 기자는 퍼거슨 감독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심술 저널리즘'의 탄생이다.

그렇다면 경기 후 기사는 어떨까. 그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경우 기사들은 대부분 ④그의 결장은 간단히 처리하면서 대신 다음 경기엔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출전이 '유력'하다고 쓴다. 그가 경기에 출전한 경우엔 ⑤그가 이번 경기에서 얼마나 중요했고, 얼마나 팀 승리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맨유팀의 일원으로서의 입지를 얼마나 '확실하게' 증명했는지를 증명하면서, 그래서 그는 다음 경기에도 출전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써나간다.

그러니까 그와 관련된 기사들 유형을 축약해 보면 ①그는 준비 됐다, ②그는 뛸 것 같다 ③퍼거슨의 의중도 그를 뛰게 할 것이다 ④이번엔 못 뛰었지만 다음엔 뛸 것이다 ⑤뛰었으니 다음에도 뛸 것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벗어나는 기사는 극히 드물다.

축구가 (정확히는 K리그가 국민들로부터 개무시 당하고 유럽 축구가) 인기를 얻으면서 축구 전문 매체들이 늘어났고 축구 기자들도 급격하게 늘었다. 얼마전 서울FC를 떠난 귀네슈 감독이 "한국에선 축구가 아닌 야구만 봐야 한다"고 일갈했다가 호되게 당했는데 일면 맞으면서도 사실은 틀린 말이었다. 유럽 축구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수많은 유럽 축구 매니아들이 이 분야를 '열공'하고 있고 그 중 수많은 이들이 축구 전문 기자를 꿈꾸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포함해서 박지성 관련 기사를 써대는 대다수 기자들은 그 전문성에 좀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박지성의 부상이 논란이 됐을 때 이제 경기에 출전해도 좋을 정도로 나아졌다는 감독 허정무의 말과 그가 전하는 박지성의 말, 그리고 아직 아니라는 감독 퍼거슨의 말이 충돌했을 때 모든 기자들은 이를 '진실 게임'의 양상으로만 몰고 갔다. 정치인 뇌물 수수나 전 국세청장과 국장 간의 '그림 공방' 같은 '초절정 진실 게임'조차도 기자들은 취재하고 파고든다. 그러나 박지성의 이름 석 자로만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해서인지 이쪽 기자들은 양쪽의 말을 전하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독자도 헷갈리고 기자도 헷갈리고. 독자도 모르고 기자도 모르고. 이게 유럽 축구 기자들 수준인가. "헷갈리냐. 나도 헷갈린다." 이게 우리 스포츠 저널리즘 수준인가.

마침 비교되는 상황이 하나 있다. 정말 '재수없게' 걸려 들었다. 타이거 우즈 말이다. 밤중에 와이프랑 싸우고 나와 운전을 하다 아차 하는 순간 사고를 냈는데 이게 결국 꼬리에 꼬리를 몰고 놔주지를 않는, 엄청난 뉴스가 돼버렸다. 이른바 '황제의 바람'이 미국을 휩쓸고 있는데 이게 사실 '프라이빗 라이프(private life)'의 영역이라 언론도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 박지성의 이름 석 자로만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해서인지 이쪽 기자들은 양쪽의 말을 전하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침 비교되는 상황이 하나 있다. 타이거 우즈 말이다. ⓒ뉴시스

어쨌든 황제의 바람, 이 사건이야말로 '진실 게임'의 대표적 사례다. 본인과 당사자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럼에도 이 뉴스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다양한 면을 전하려 하고, 또 말만 전하는 게 아니라 이를 분석하려 한다.

우선 기자들은 우즈가 입을 다문 상황에서 황제의 외도의 대상이었던 제1, 제2, 제3의 여인에 대한 취재에 들어가 사실의 상당 부분을 밝혀냈다. 또 불륜을 들추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그 사회적 파장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미국 유일의 전국지이면서도 대중적인 <USA Today>는 '잘못의 시인과 함께 프라이버시가 날아가버린 우즈(Woods finds privacy elusive with 'transgressions' admission)'라는 기사에서 우즈의 일탈에 동정하는 선수와 이를 꾸짖는 선수, 팬과 나이키, 게토레이 등 스폰서들과 마케팅 전문가의 의견, 프라이버시 논쟁의 찬성과 반대 입장을 가진 변호사와 홍보 전문가, 심지어는 미국 스캔들의 대중사 연구자의 의견까지 구한다.

같은 날 이 신문 인터넷판은 우즈의 일탈 뿐 아니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해명 글의 도덕적 몰상식을 비판하는 칼럼, 그리고 왜 이런 스캔들이 벌어지는지를 분석한 '섹스 스캔들: 왜 남자들은 바람을 피우는가(Sex scandals: Why do men cheat)?'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우즈 사건 기사와 박지성 기사는 그 상황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 미국의 사생활 들추기식 파파라치 언론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언론 또는 기자의 기본적 자질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스포츠 분야의 '뉴스의 생산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수십 개의 기사가 어쩜 그렇게 한결 같고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 하느냐 말이다. 제목까지도 말이다. 혹시 서너 명이 여러 개의 필명으로 수십 개씩 써보내는 건 아닌가.

유럽 축구가 인기를 얻으니까 국내 상당수 언론사는 현지에 기자를 특파원으로 보내기도 하고 현지인들을 리포터로 고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여기 있는 기자들이 책상머리에서 하듯 현지 언론 번역하고 앉았다. 거기까지 나갔으면 그래도 좀 다른 '차원'의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현지 기자조차 '취재'를 하기보다는 그곳 신문이나 뒤지고 있으니 유럽축구 기사는 그야말로 '하나 보면 다 본 것'이 되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답답하니 축구 기자들도 이를 따라가는 것인가. 선수들은 개인기가 없더라도 기자들은 맘껏 개인기를 발휘했으면 한다. 그래도 축구 기사가 축구보다는 수준이 높아야 우리 축구도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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