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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튼의 상상력, 뮬란의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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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튼의 상상력, 뮬란의 재주

[의제27 '시선'] 진보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꾼다

캥거루 엄마는 말한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 건… 없는 거야!"

캥거루 엄마의 자식사랑은 극진하다. 그래서 늘 자식을 품고 다닌다. 캥거루 엄마는 자식이 자기가 살았던 것처럼 살기를 바란다. 자식 교육에 열중인 캥거루 엄마는 자식이 보이지 않는 것에 홀려 잘못될까봐 몹시 걱정한다. 자식을 위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캥거루의 폭력성

그런 캥거루 엄마에게 아주 작은 티끌 속 '누군가 마을'의 외침을 듣는 호튼은 위험천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사랑이 극진한 캥거루 엄마는 티끌 속에 '누군가 마을'이 있고, 그 '누군가 마을'의 시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호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호튼에게 티끌을 버리고 다시 평화롭게 숲속 마을 친구들과 놀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 캥거루 엄마는 매우 자비롭다. 그러나 그 친절한 제안을 호튼이 받아들이지 않자, 캥거루 엄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튼을 징벌한다.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자신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사람들, 자신이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성을 만화영화 '호튼'은 보여준다.

티끌 속 '누군가 마을'에선 날씨가 급작스럽게 바뀌는데도 모두들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마을을 책임지고 있는 시장만이 근심에 차서 동분서주하다가 티끌 밖 거대한 세계의 호튼과 연결되면서 날씨변화의 원인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마을'에서도 역시 아무도 시장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의 거대한 세계가 코끼리 손 끝에 있는 작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그렇게 남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어처구니 없는 소수가 세상을 구한다는 만화영화 '호튼'의 이야기는 마치 유교나 불교 어느 경전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한국의 미'라고 배웠다. 자신들이 보는 것만을 믿는 이들이 휘두르는 폭력이 그 '한국의 미'를 망칠까 두렵기만 하다.

세계화의 화신, 뮬란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건, 만리장성이 아니라 뮬란입니다."
요즘 강연할 때마다 꼭 하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일부 청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뮬란을 모르는 탓이다. 뮬란은 디즈니랜드식 세계화의 표상이다.

한국의 증권시장에서 브릭스가 거론되기 이전에, 디즈니랜드는 만화영화 '뮬란'을 만들었다. 일본이 세계시장을 석권할 때 닌자거북이를 유행시켰던 할리우드에서 중국의 고전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3억 인구를 고객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웅을 캐릭터로 삼아야 한다. 교육적 측면에서도 이제 앞으로 중국 친구들과 자주 만나게 될 어린이들에게 중국인과 친숙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만화영화라면 금발의 공주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어른들과는 다른 세상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은 커가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은 보고 있다.

진리는 보고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만리장성을 만들었던 진시황은 그 만리장성으로 인해 망했다. 만리장성이 완성된 후에도 외침을 막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경제학적으로 따지자면 만리장성은 이득보다는 비용이 매우 큰 잘못된 공사였다. 진시황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으니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인지 모르겠으나, 중국 국민들에게는 결코 아니다.

어려울 때 중국을 구한 것은 뮬란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 진리는 불변이다. 오늘 세계 최강의 미국이 두려워하는 중국을 만든 것은 상하이의 마천루가 아니다. 1972년 등샤오핑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중국의 유학생을 대규모로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다른 나라의 유학생에게 돌아갈 장학금을 싹쓸이하며 중국의 유학생들이 대거 미국 대학에 진출했다. 그 고급두뇌들이 절반은 미국에 남고 절반은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오늘의 중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30년이 지나서 그 인력들이 중국경제를 세계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고급 인력을 바탕으로 중국경제는 한국경제를 넘어 일본경제를 지나 이제 미국경제를 넘보게 된 것이다.

콘크리트 물신주의와 소셜 디자이너

콘크리트 물신주의에 빠진 한국이 위험하다. 자신의 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폭력성이 도를 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10개 중 5개가 한국에 들어선다고 했던가? 불과 2년 만에 국토 전역을 덮고 있는 4대 강을 다 뒤집어 놓겠다고 했던가? 서울 전역을 콘크리트 아파트로 덮어버리겠다고 했던가?
▲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개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프레시안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이라는 하드웨어 개선사업과 버스요금환승제라는 소프트웨어 개선사업의 두 가지 업적을 인정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청계천 복원은 도시의 흉물이었던 청계고가도로를 허물어냈다는 의의가 있지만, 도심 한복판의 청계천을 생태가 도외시된 인공분수로 만들었다는 점은 후진적 콘크리트 물신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많은 국민들이 그나마 반긴다면 국민소득 2만불 시대 우리 모두 콘크리트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탓이거늘 누구를 원망하랴.

반면 이명박 시장의 또 다른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해 놓고도 그 의미를 몰라서 매일 청계천 이야기만 해 대는 대통령이나 참모들의 모습이 딱할 따름이다. 최소한 지식인이나 언론들이 청계천보다는 버스요금 환승제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몰락하는 두바이를 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댐을 뜯어내고 운하를 뜯어내고 더 이상 고층빌딩을 짓지 않는 선진국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안쓰럽다.

진보개혁세력조차 콘크리트 물신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이다. 눈으로 보이는 하드웨어보다는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 간단한 사실을 몰랐기에 세계 최고인 줄만 알았던 IBM도 아주 작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당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환경이 이렇게 척박하기에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의 작업은 소중하다.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세력은 그가 얼마나 큰 사회적 재산인지 알 수 없다. 콘크리트 물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개혁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것이 정의상 진보개혁세력이라면, 진보개혁세력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어둡다.

꿈꾸는 자가 세상을 바꾼다

여름이면 아파트에서 수건 들고 걸어 나와서 한강 백사장에서 썬탠하고 수영하는 모습을 그려보자. 그런 꿈을 꾸면서 다시 보면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 강인지 알 수 있다. 현실성도 충분하다. 저 흉측한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그냥 들어내면 된다. 교통문제는 노력만 하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도로를 지하로 넣는 콘크리트 물신주의자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교통량을 줄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한강 뿐이랴. 4대 강변에서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 4대 강 상류지역을 친환경지역으로 선포하고 관리하면 된다. 22조원이면 수질개선과 생태하천 조성에 충분한 돈일 것이다.

지식정보화시대 굳이 서울에만 몰려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낡은 생각이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 없는 세종시를 꿈꿔보자. 세종시 뿐 아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서울을 회복하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른 도시들은 지금이라도 제대로 계획하고 관리하면 곧 아름다운 도시로 바꿀 수 있다. 전국의 모든 시와 도를 미국이나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와 주택가를 능가하도록 만들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살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도록 첨단과 자연이 어우러진 새로운 미래도시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아름다운 강원도 산골이나 한려수도 해안가에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아파트를 지을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도로를 만들 필요도 없다. 있는 시설의 활용도를 높이면 충분하다. 고속도로를 열면 고속도로 주변에 작은 장터들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농촌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시와 농촌을 연계하는 방식의 개발도 가능하다. 콘크리트에 들어가는 돈을 아낀다면 새롭게 미래형 공간을 창출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새의 소리를 듣고, 도룡뇽의 소리를 듣고, 피라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미래형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사회디자인이다. 서두르지 말고 우리의 모든 역량을 인재 육성에 쏟아 부을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온다. 마치 놀이터와 같은 구글의 작업장이 보여주는 세계화와 지식정보 혁명의 놀라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라를 구하는 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는 인재들이다. 기성세대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새로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진보개혁세력에게 맡겨진 중차대한 과제다. 호튼의 상상력, 뮬란의 재주가 넘치는 세상을 함께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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