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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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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이에요"

[키워드 가이드를 만나다] '독도' 김점구 씨

내심 조심스러웠다. '독도'를 평생의 키워드로 삼은 사람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본과 맞붙은 축구 시합에서는 절대로 지면 안 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래서인지 한일 관계의 가장 첨예한 쟁점인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거친 목소리만 나온다. 그런데 김점구 씨는 직업이 독도수비대 대표다. '이거 질문 잘못하면 날벼락 떨어지는 것 아냐.'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직접 만난 김점구 씨는 "독도 마케팅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도'라는 말만 나오면 열광하는 분위기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는 행태가 지긋지긋하다는 게다. "이젠 어지간히 자극적인 내용은 먹히지도 않는다"고도 했다. 사실 별것 아닌데,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것이면 괜히 부풀려서 보도하는 언론에게 책임을 묻는 말이다. 그는 독도 영유권 문제가 하루빨리 이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사람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는 혹시 '좌파'인 걸까. 한국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종종 엉뚱하게 쓰이지만, 원래 '좌파'는 민족주의적인 열광을 못마땅해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캐물었다.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도 꽤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마디로 그는 '좌파'가 아니다. 독도를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를 간추렸다.

▲ '독도' 키워드 가이드 김점구 씨. ⓒ프레시안

"'독도는 우리 땅' 노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프레시안 : 직업이 '독도수비대' 대표인데, 그걸로 생계가 유지되나. 40대 나이면 돈 나갈 일도 제법 있을 텐데….

김점구 : 식비, 교통비, 휴대전화 사용료 정도를 제외한 다른 생활비는 거의 쓰지 않는다. 독도수비대 회원 중에 돈을 모아주는 분들이 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다. 다른 활동 역시 비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계획한다. 이를테면 블로그(☞바로 가기)나 온라인 카페(☞바로 가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돈이 많이 드는 요란한 행사를 하지 않는 대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차분하게 연구해서 의제를 발굴한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고 싶은데, 우리나라에 독도 관련 단체가 몇 곳쯤 된다고 보나. 수백 곳이다.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이들 중에 실제 활동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 회원이 전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활동을 하는 곳은 어떨까. 크게 두 부류다. 독도를 내세워 기업에서 협찬을 받는 부류, 아니면 일본대사관에 쳐들어가겠다며 몸싸움하는 부류. 나는 둘 다 문제라고 본다. 둘 다 독도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독도 문제에 대해 물어보면, 5분 이상 이야기 할 거리가 안 나온다. 그냥 "세종실록 지리지 50쪽 셋째 줄"하고 흥얼거리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세종실록 지리지 50쪽 셋째 줄'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아느냐"라고.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 기업 협찬만 받겠다고 한다. 글쎄, 반쯤 사기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지금 시급한 것은, 요란한 광고가 아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차분한 분석과 정리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십시일반 모아준 후원금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하는 사람이 없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말이다.

그래서 독도수비대 회원들 사이에서는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금지곡이다. 물론, 정말로 이 노래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노래 가사가 워낙 세게 박혀 있어서 독도 문제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을 방해한다는 게 문제다.

"독도 영유권 문제, 조용한 대응과 포기는 다르죠"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4월, 주일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서 갑자기 독도 관련 내용이 삭제된 사실을 밝혀내 화제가 됐다. 얼마 뒤 관련 내용이 복원됐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한때 '이명박 독도'라는 말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점구 : 당시는 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독도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태도가 잘 드러난 사건이라고 본다. 큰소리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비슷한 일이 많다. 어떤 이들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소리 없는 대응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데,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정부가 독도 문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한 대응과 포기는 분명히 다른 것 아닌가.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학자가 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자료를 내놓는다. 그런데 실제로 확인해보면, 이미 알려진 자료를 다시 꺼낸 것이다. 한국 언론에 기사가 실렸는데, 그보다 앞선 시점에 일본 인터넷에 관련 내용이 올라와 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 사람이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비웃지 않겠는가.

"홍순칠 대장 수기, 독도에 대한 국제법적 지위 하락 근거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2000년 3월에 독도수호대를 창립한 뒤, 울릉도-독도 뗏목 탐사, 자료잡 발간, 사진전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최근에는 어떤 사업을 했나.

김점구 : 앞서 말한 것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 한다. 최근에는 1950년대 대한민국 정부 독도 경비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힘을 쏟았다. 홍순칠이라는 사람을 아는가.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이다. 국가보훈처는 1996년 독도의용수비대 대원 33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문제는 당시 국가보훈처가 근거로 삼았던 홍순칠의 수기가 온통 허구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일부 언론을 통해 불거지자 감사원이 조사를 했는데, 당시 국가보훈처의 공적 심사가 엉터리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1996년에 부여한 상훈을 취소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정부는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 덮어두는 거라고 본다. 이건 특정 개인의 명예 문제가 아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의 핵심에 맞닿아 있는 쟁점이다. 정부 입장대로라면, 홍순칠의 수기는 공신력 있는 기록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홍순칠의 수기대로라면, 한국전쟁 직후 한국 정부는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게 간단한 문제인가.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1950년대에도 독도에는 한국 정부의 경찰력이 미치고 있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순칠은 자신의 수기에서 1953년 7월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헤쿠라호를 격퇴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홍순칠의 공적이 아니라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의 공적이다. 1955년 외무부가 발행한 <독도문제개론>이라는 문서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밖에도 홍순칠이 왜곡한 내용은 많다. 독도영토표석을 세운 일, 경비초사를 지은 일을 모두 자기가 했다는 게다. 하지만 영토 표석은 1953년 외무부의 제안으로 건립된 것이다. 또 경비초사는 1954년 8월 경상북도 경찰국과 내무국이 울릉경찰서와 울릉군에 내린 지시에 따라 지어졌다. 홍순칠의 주장대로라면 민간인이 경찰을 지휘 감독한 셈인데, 이는 사실과도 다를 뿐더러 한국의 독도에 대한 국제법적 지위를 떨어뜨리는 근거로 이용될 수 있다. 영토를 둘러싸고 분쟁이 생길 경우, 가장 중요한 판결 근거가 실효적 지배 여부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삶을 뒤흔들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미 부여된 상훈을 취소하라고 하면, 당사자 및 후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으리라고 본다.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는데, 힘든 일이 많겠다.

김점구 : 인터넷 등에서 악의적인 비방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법적인 문제도 생겼다. 힘들지만 이겨내려 한다.

프레시안 : 이처럼 힘든 일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언제부터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김점구 : 20대 시절 외항선원 생활을 했었다. 그 무렵, 지식에 대한 갈증이 커서 다양한 책을 읽었는데,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내 삶을 뒤흔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파에 관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알게 됐다. 그리고 1999년쯤에 여행사를 차릴 생각을 품었다. 소비적인 여행 상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역사 탐방을 하는 여행사 말이다. 그 사업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가 이른바 '뉴밀레니엄'을 앞둔 때라서 행사가 많았다. '밀레니엄 해맞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준비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다른 곳에서 해 뜨는 시각은 적혀 있는데 독도가 빠져 있었다. 누리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걸 계기로, 해맞이 행사를 독도에서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내가 회원으로 있던 민족문제연구소도 다른 단체와 함께 이 행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내가 울릉도에 처음 가본 것도 그때였다. 그날이 1999년 12월 29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정 때문에 해맞이를 독도에서 하지는 못했다. 결국 2000년 초에 독도 해상에서 해맞이 행사를 성사시켰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평생 동지가 됐다. 그해 3월 이들과 함께 독도수비대를 꾸렸다. 당시 상근자가 3명, 비상근자가 2명이었다. 그런데 그때 상근자 한 명이 지방에서 행사를 마치고 오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는 지금 독도 앞 바다에 묻혀 있다. 그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독도수비대 활동에 전념하게 됐다.

"안용복이 조선 땅에서 '독도는 우리 땅' 외쳤나"

독도수비대는 창립 초기부터 일본 사람들을 설득하는 활동을 목표로 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백날 떠들면 뭐 하나. 일본 사람들 역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텐데.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과 논리다. 그리고 이런 준비가 돼 있으면, 일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다. 평범한 다수 일본 사람들이 사실에 바탕을 둔 주장을 굳이 배격할 이유가 없다. 조선 말기 독도를 지켰던 안용복을 떠올려 보라. 그가 조선 땅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고 다녔나. 그렇지 않다. 직접 일본을 찾아가 설득하고 담판 지었다. 지금 필요한 것도 이런 활동이다.

(☞키워드 가이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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