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이런 평범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더 치열한 물음이 된다. '우리 사회는 살고 싶은 사회인가 아니면 살기 싫은 사회인가?'
내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연봉이나 직업 선택이나 사회적 인식이라는 면에서 차별을 받을 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사는 것이 살 맛 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대학을 나와도 직업을 구하지 못해 몇 년간 실업자나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지닐 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고 싶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안정된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평온하게 살다가도 그동안 충성스럽게 일해 온 기업에서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해고통지를 받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통지를 받을 때 과연 우리 사회를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2009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이런 삶의 모습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의 위협에서 비껴서 있거나 아니면 이런 삶의 위협을 조장하며 더 큰 이익을 누리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이 부를 더 효과적으로 축적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화되고 그 삶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
1995년 9월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역사적인 호텔인 페어몬트 호텔에서 이런 사회를 그린 선구적인 사람들이 모였다. 거기에는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있었다. 2001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부시와 1980년대 내내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도 있었다. 세계적 언론 재벌인 CNN 방송사의 설립자 테드 터너도 있었다. 물론 금융계의 지도자나 유명 대학의 경제학 교수들도 있었다. 싱가포르나 아시아에서 온 자유무역의 밀사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린 사회상은 '탄탄한 중산층도 없고, 아무도 저항할 세력이 없는 부유한 나라'이다. 이런 사회가 바로 '20대 80의 사회'이다. 기존의 복지국가가 국민의 3분의 2를 포함하려고 했다면 새롭게 출현할 사회는 사회복지와 사회 지위가 20퍼센트(%)에게만 주어지고 80퍼센트의 인구가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사회이다.
세계적인 엘리트들이 이런 사회를 꿈꾸었다는 점도 큰 충격이지만 그런 꿈이 2009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큰 충격적인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내가 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과연 내 능력 탓이란 말인가? 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면 당연히 이런 처지를 일부 내 탓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로부터 내가 배제당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산다는 것은 사회를 형성하기 전보다 모두가 좋아질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전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에게 사회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사회에 참여하지 말고 따로 살았어야 한다. 따라서 그 능력과 기여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사회는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사회에서 생긴 부와 좋은 것들을 일정 정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를 이뤄 생겨난 좋은 것들을 일부의 사람들이 독점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배제당하는 20 대 80의 사회는 문제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세계화를 몰랐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사회가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기획되고 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모르게 진행되는 새로운 비전이 구체적 정책으로 실현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는 민주주의의 퇴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삶의 질의 악화와 민주주의의 퇴화가 세계 엘리트의 기획에 의한 작품이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역사에 등장한 '세계화'라는 글로벌 정책이 이런 기획 작품인줄도 모른 채 우리 사회가 아시아적 부패 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며 열광했던 우리 언론과 방송이 떠오른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세계 표준이 된 것이다. 우리는 불행히도 1997년 벌어진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구제 금융을 지원받는 대가로 IMF(국제통화기금)가 제시한 일련의 경제 프로그램을 무조건 수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우리에게 세계화의 문은 활짝 열린 것이다.
IMF 외환 위기 이후로 10년이 지난 우리는 구조 조정과 비정규직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있다. 2008년 미국 발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도 우리 경제가 가장 빠르게 회복세에 있다. 그런데 그 성장과 회복의 혜택이 고루 돌아가지 않는다. 20퍼센트에게는 혜택이 더욱 가속도로 돌아가지만 나머지 80퍼센트는 점점 고통이 심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세계화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화의 덫에 빠진 것인가?
2009년의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세계화의 덫임을 알게 됐지만 1997년 당시는 세계화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세계화는 기술적 혁신인 정보화와 더불어 새로운 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자들이 행한 보수혁명이다. 이로써 친자본주의적 사상이 세계의 사상계를 지배하게 된다. 진보주의자들이 더 이상 이슈메이커가 아니게 된다. 이는 1989년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정치 담론의 헤게모니는 진보 진영에서 보수 진영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프랑스의 진보 지식인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힘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심지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신자유주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슈뢰더든 블레어든 또는 조스팽이든, 이들 모두는 신자유주의 정치를 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에 대한 맹세를 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뒤틀려 있기 때문에 분석과 비판이 어려운 것입니다."(<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귄터 그라스 외, 이승협 옮김, 평사리 펴냄.)
우리 사회에서도 진보 정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모두 '좌파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도리어 더욱더 정치적 민주주의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결합하고자 했으나 이는 진보 정치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이 위협받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IMF 위기의 순간에 우리 누구도 세계화의 이런 파괴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다. 정보화의 더불어 세계화는 신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고 닷컴버블은 버블이 아닌 신경제의 성과로 해석됐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신경제란 말도 사라졌다. 이런 버블의 원흉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은 감소하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렸다.
오히려 세계의 금융 시장은 부동산 버블을 먹이 삼아 크게 성장한 듯 보였다. 그러나 또 다시 2008년 미국 월가로부터 시작된 부동산 버블의 붕괴는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불러왔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결론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학습의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세계화는 애초부터 덫이었다
▲ <세계화의 덫>(한스 피터 마르틴·하랄드 슈만 지음, 강수돌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 ⓒ프레시안 |
이런 궁금증이 독일의 두 기자인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지은 <세계화의 덫>(강수돌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을 읽고 속 시원하게 풀렸다. 아주 비관적인 시나리오이긴 해도 그 책이 던져준 깨달음은 전율로 다가왔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퍼뜨린 신화는 다음과 같다. 세계화란 끊임없는 기술의 발전과 지칠 줄 모르는 경제성장의 결과이며, 이건 지극히 당연한 '자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 즉 범세계적인 경제 통합은 시장의 세계화로서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자본가들과 이들의 돈을 추종하는 정치·경제·지식 엘리트들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각 나라 정부와 의회는 온갖 협정서나 법률을 통해 자본과 상품이 국민국가의 국경선을 넘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없애는 데 노력했다. 특히 서구 선진국 정부들은 유럽 단일시장에서의 외환거래 자유화에서부터 '자유로운 세계 무역 질서의 확대(WTO)'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계화를 체계적으로 실현해 왔다.
따라서 세계화는 자연적인 진화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인 체제의 강제인 것이다. 마치 1세기 전의 근대화가 비서구 국가들을 식민화시킨 서구 국가들의 강제인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시장만능주의이다
세계화 과정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사상적 유령이 늘 출몰한다. 이에 따르면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나쁘다."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경제학자인 노벨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이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학파를 계승해 주창한 이론으로서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수상 대처와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이 적극적으로 이를 정책 기조로 삼았다.
국가에 의한 관리 감독보다는 탈규제화, 무역과 자본의 자유화, 공공 기업의 민영화, 세금 감면과 복지 축소, 노동의 유연화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기본 정책들이다. 이런 정책들이 시장주의자들의 정권이나 IMF나 WTO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차츰 실현됐다. 이런 정책들은 결국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한 싸움에 동원됐고 이로써 지구 위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이나 그 어느 누구도 시장의 수요와 공급 법칙이라는 냉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서 시장자유주의 정책이 주도권을 지니게 된 도화선은 소련과 동구권에서의 일당 독재체제 붕괴였다. 이른바 '노동자 독재'의 위협에서 벗어난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세계시장의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터보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생존 근거인 개별 국가의 역량과 민주주의적 사회 안정을 파괴하고 있다. 복지의 주체인 개별국가들은 세계화된 시장과 자본을 위해 안정된 사회 생활의 기초를 부수고 있다.
이는 범죄율의 심각한 증가로 나타나고 시민들이 사설 무장 경비에 지불하는 돈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사회의 결속력이 파괴되고 사회가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양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패자는 위협하고 승자는 방어한다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실제로는 승자가 위협하고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패자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해 생겨난 일인데도 말이다. 세계화는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등장하는 이중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IMF는 세계화의 대리인이었다
1997년 아시아의 외환 위기 당시 미셸 캉드쉬는 IMF의 총재였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자국의 부채를 갚지 못하거나 경제 위기를 더 이상 독자적으로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외국 금융 시장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IMF의 캉드쉬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1980년 후반 이후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의 큰 나라도 도움을 달라고 두 손 모아 비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1998년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도움의 대가는 가혹했다. 각국은 금융 지원을 받기 위해 엄청난 재정긴축 프로그램이나 정부의 과감한 축소를 위한 특별 조치를 의무적으로 제시해야만 했다. 1995년 이후 동남아 국가들이 외환 위기에 빠지고 멕시코의 경제도 구제불능으로 전환되고 있던 차라 IMF는 이들 나라들에 가장 큰 국제 금융 대출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러나 이는 캉드쉬가 주장하듯이 전지국적 파산을 구하기 위한 중차대한 결단이 아니라 '초국적 투기적 자본가들을 위한 대탈주극'으로 혹평받기도 했다. 바로 외환위기에 빠진 멕시코를 구출해 준 것은 멕시코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투기꾼들을 위해 엄청난 선물을 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강한 IMF가 투기 자본의 리스크를 헤지(hedge)하는 관리처가 된 것은 국제금융시장의 권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증권가나 은행, 보험업계, 그리고 투자기금이나 연기금업(年基金業') 등에 새로운 정치적 계급이 권력의 무대 위로 등장했다. 이 권력체는 범지국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외환 및 주식증권의 투기꾼들이다. 이들은 급증하는 거대한 자유투기 자본의 흐름을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세계화로 인해 빗장이 풀린 개별국가들로부터는 아무런 제재나 간섭 없이 한 나라의 경제를 흔들게 된다. 더구나 이들이 세계 경제까지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분명히 보여주게 된다.
IMF는 세계화로 인해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된 이런 투기꾼들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구제 금융의 대가로 받아들인 IMF 프로그램은 이러한 투기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었던 것이다. 그 조치의 효과들이 10년이 지난 우리 경제와 세계 경제를 멍들게 하고 있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이 위협받고 정치와 공공영역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했다.
이것이 우리가 10여년의 세월을 겪으며 알게 된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IMF와 세계화, 그리고 이를 추동하는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알기까지 매우 비싼 수업료를 문 셈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