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은 한편으로는 언론에 이전 가능성을 흘리고, 다른 한편에선 "결정된 바 없다"며 부인하고 나서는 등 '탐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유수의 대기업들이 세종시 이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정부의 '압력'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것보다 큰 동력은 정부가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특혜'다.
정운찬 총리는 17일 전경련 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세종시의) 자족용지를 대폭 확충하고 민간투자자에게 토지를 저가에 공급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고 상당 수준의 행정적, 재정적 인센티브를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평당 200만 원 깎아주고 법인세·소득세 등 3년간 면제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살았던 한 정치인에게 전해 들은 얘기다. 그는 감옥에서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재벌 총수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숨기기 어려운 법이다. 이 정치인은 감옥에서 보니 "재벌 총수들은 정말 원가 계산에 철저하더라"고 말했다. 일반인들과 달리 사소한 것 하나에도 계산이 분명했다고 한다.
기업중심도시 세종시에 삼성, 현대차, 롯데, LG 등 재벌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원가 계산'에 기반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결정돼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세종시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9월 정운찬 총리를 임명하면서 갑작스레 '수정' 방침을 밝혀 이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에 묻혀 있지만,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는 '수정안'의 핵심은 '기업 특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전경련 회장단과 만찬회동에서 활짝 웃고 있는 정운찬 총리(가운데). 왼쪽은 이 대통령 사돈인 조석래 효성 회장, 오른쪽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뉴시스 |
이명박 정부는 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종시 입주하는 기업에 산업용지를 인근 산업단지보다 낮은 수준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3.3㎡(평)당 227만 원에 달하는 땅값을 파격적으로 낮춰 3.3㎡당 30만 원대에 제공하는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찬 총리는 18일 "기업들이 땅값이 좀 비싸다고 한다"며 기업 유치를 위해 땅값 인하가 필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또 세종시로 이전하는 기업들에게 3년 동안 법인세와 소득세를 면제해주는 등 세제혜택을 부여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기존의 세종시 계획을 틀어 '기업도시'로 만들기 위해 제공하는 이 같은 특혜가 결국은 국민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세종시에 이전한 기업들에게 법인세, 소득세를 3년간 면제해줄 경우 세수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부자감세' 정책으로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 들어 급속히 악화된 재정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평당 200만 원 가까이 땅값을 깎아주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종시 규모는 2000만 평이다. 정부는 원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주거 용지와 공원.녹지 등의 면적을 축소해 기업들에게 제공할 자족기능 용지를 2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최소 400만 평의 땅을 평당 200만 원씩, 총 8조 원의 손해를 보고 기업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얘기다. 새만금 사업도 기업 및 복합용지를 70%까지 늘린 것을 볼 때, 세종시도 기업용지가 20%보다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기업들에게만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토지를 팔 경우 '형평성'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부가 감당해야할 손실은 훨씬 커질 수도 있다.
물론 땅값 인하로 인한 손실은 곧바로 국가가 떠안는 것은 아니다. 일차적으로 토지를 조성한 토지주택공사(LH)가 부담하게 된다. LH는 현재 고질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작년말 기준 LH의 부채는 총 85조8000억 원. 올해 말에는 21조4000억 원이 더 늘어 107조2000억원에 이를 전망으로, 부채비율만 467%에 달한다.
LH는 물론 자산규모(105조3000억 원)가 부채규모를 상회하지만 자산이 대부분 토지나 임대아파트 등 부동산으로 구성돼 있어 자산유동화가 쉽지 않다. 그래서 LH는 부족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공사채를 통해 조달하고 있지만, 지난 6일 1000억 원 규모의 채권이 응찰자 모집에 실패하는 등 이마저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4대강 사업 예산 중 8조 원을 떠안은 수자원공사의 부실이 결국 국가의 몫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세종시의 손실을 떠안은 LH의 부실도 국가가 감당할 수밖에 없다. 이 부담은 결국 납세자들의 몫이다.
정운찬의 거짓말…"아직까지 다른 지역 반발 없다"
정부가 세종시에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줄 경우, 이미 기업도시나 경제자유구역 등을 추진하고 있는 다른 지방자치단체는 피해를 봐야 한다. 17일 정 총리와 전경련 회장단 회동에서도 재벌 총수들이 "세종시에만 지나치게 많은 지원이 집중돼 다른 곳에서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해 달라"고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정 총리는 "아직까지 그런 불만이 제기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같은 정 총리의 발언은 분명 거짓말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17일 "정부의 세종시 수정 논의가 대구·경북 첨단복합단지와 중복되는 기능을 포함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부산일보>, <매일신문>, <무등일보> 등 각 지역의 대표적인 일간지들도 일제히 정부가 세종시에 지나친 특혜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민주당 박지원 정책위의장은 18일 MBN-TV에 출연해 "무안 기업도시는 10년째 허허벌판"이라면서 "지금도 채우지 못하는 전국의 기업도시와 혁신도시를 희생시켜 세종시 하나로 간다고 하면 전국적으로 반발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반발이 나면 그곳에 또 집중지원을 해야 하고 그러면 세종시 것이 다시 넘어가야 된다"며 "현재 정부의 정책은 마치 신용카드 돌려막기식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유급휴가 배제, 영리의료법인 설립 등 다른 특혜도 논란 거리
땅값 인하 뿐 아니라 정부가 밝힌 다른 투자유치 방안들도 문제가 있다. 정부는 ▲국가유공자와 장애인 의무 고용 배제 ▲근로기준법상 주1회의 유급휴가 배제 ▲외국인학교 및 영리의료법인 설립 ▲본국과 외환거래(과실송금) 허용 등을 검토 중이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세종시를 기업도시로 만들겠다면서, 그동안 논란이 돼 오던 정책도 한꺼번에 추진하겠다는 뜻이냐"면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좌초됐던 영리병원 등을 세종시 지원안에 은근슬쩍 끼워 넣은 것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이 의원은 "세종시를 핑계로 대통령과 정부의 오랜 숙원을 풀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세종시는 균형발전을 위한 것이지, 대기업과 외국자본에 특혜를 남발하라고 조성한 것이 아니다"면서 "균형발전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비전만 확인되면 기업들은 세종시 뿐 아니라 다른 지방도시로도 이전할 수 있는데 이를 건너뛰려다 보니 자꾸만 엉뚱한 대책만 남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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