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서 태어났으나 18년을 한국에서 보낸 미누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에서 노래하는 음악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결성되어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한국에서 공연을 해온 밴드였다. 길을 가다 무작정 찾아간 화장실의 손잡이가 잠겨있어도 거부당한 기분이 들어 괜히 원망스럽기 마련인데, 하물며 '공식적인 활동'을 10년이나 해오고도 자신이 단속(crackdown) 대상이었을 뿐인 현실에는 어떠했을까.
일본인 뮤지션 삼인방
▲사토 유키에. ⓒ사토 유키에 홈페이지 |
역시 곱창전골에서 활동했던 하세가와 요헤이는 지금 한국 록 음악의 일부가 되어 있다. '황신혜밴드'를 비롯하여 김C가 이끄는 '뜨거운감자' 등에서 연주했거나, 하고 있다. 우리 대중음악의 한 부분을 채우게 된 그는 김양평이란 이름까지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삼인방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하찌(가스가 히로후미)는 일본에서 꽤 두터운 음악경력을 쌓아온 뮤지션이다. 그는 강산에 등의 앨범에 프로듀서(음악감독)로 참여한 바 있고, '하찌와 TJ'라는 듀오로 활동하며 멋있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재미있게도 세 사람 모두 2009년에 나란히 작품들을 발표했다. 사토 유키에는 솔로앨범 [사랑스러운 그대]를 냈고, 부지런한 하세가와 요헤이는 '김창완밴드'의 [Bus]에 기타소리를 뿌려놓았으며, 하찌는 소탈하고 담백한 노래들을 하찌와 TJ의 두 번째 앨범인 [별총총]에 담아 건넸다. 굳이 성의와 환대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정도가 된 이들은 이미 우리 대중음악의 '인사이더'가 되어 음악동네를 좀 더 풍성하게 가꾸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러 조건 덕분에 일본의 음악인들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들과의 협력에 의하여 이상은은 존중받는 싱어송라이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고,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하지무 다케다가 이상은의 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한 [Mono]도 올해에 소개되었다. 장기간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새드 레전드(Sad Legend)의 나마 역시 자신의 밴드를 재개하기 전에 일본인 뮤지션들과 함께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방송 인터뷰에 따르면 술 먹다가 독도 문제로 싸우고 해산하는 사태를 겪었다고 하지만.
다양한 국적, 다채로운 음악
일전에 간략히 정리했듯이 많은 외국인 뮤지션들이 한국에서 활약해왔으며, 그들 중 여럿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을 떠나기도 했다. 몇 해 전에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간 린다 컬린(Lynda Cullen)은 브라질 출신의 발치뇨 아나스타치오(Valtinho Anastacio)도 함께 했던 '두번째달'에서 본토의 아이리쉬 감성을 바탕삼아 좋은 음악을 들려줬고, 한대수의 앨범에 독창곡을 싣기까지 했다. 이처럼 어떤 장르가 더 활성화된 나라에서 온 경우에 색다른 감각을 신(scene)에 보태주고 떠나기도 한다. '썩스터프'를 비롯하여 여러 펑크 밴드에서 연주한 미국인 기타리스트 폴 브리키(Paul Bricky)도 그런 예이다.
반면 드럼과 비브라폰 등을 다루는 타악기 연주자 크리스 바가(Chris Varga)는 미국 네브라스카를 떠나 한국에 정착한 음악인이다. 10년 넘게 무수한 재즈 음악인들과 작업했을 뿐만 아니라 '레이니 선'과 같은 록 밴드에서 연주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육중한 보이스와 역동적인 연주, 격렬함과 아름다움이 장중한 조화를 이루는 감동적인 헤비사운드가 기대되는 신인 밴드 테러마이트(Terrormight)의 드럼연주자도 크리스티안 클렘(Christian Clemm)이라는 벽안의 청년이다.
자그마한 클럽공연을 순회하다 보면 말 그대로의 인디펜던트 밴드인 '코즈모3'를 이끄는 로버트 오라스 주니어(Robert A. Oras Jr.)처럼 무명이지만 남다른 감성을 싸들고 온 음악인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아이 앤 아이(I And I) 장단' 역시 '윈디시티'의 김반장과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 프랑소와(Francois Rialland)가 중심이 된 다국적 프로젝트이다. 그들의 미니앨범 [Culture Tree]에 있는 문장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위해 인용해도 제법 어울린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나무에서 나온 나뭇가지 같은 존재들이다."
▲크리스 바가(프로필 사진임). |
우리 안의 이주음악인
80년대 말부터 한국 대중음악이 급성장하면서 이른바 '팝송의 시대'가 저물었다. 이후 해외음악에 대한 일반의 경험도가 현저히 낮아지면서 감별력이 저하된 측면이 있다. 일종의 대가였다. 대신 사회가 개방되자 이주음악인들이 많아지면서 다른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은 더 많은 음악인들은 현재 불안정한 신분과 제한된 기간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얻지 못한 채 이 곳을 잠시 거쳐 가야만 한다. 그렇게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경험한다.
'감동적인 영업사원분투기'처럼 포장되곤 하는 우리나라 가수들의 해외진출을 성원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도 관심을 가져야 공평하다. 자기의 생각과 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이의 성장이라면, 다른 이의 생각과 말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이 어른의 성숙이다. 진정한 문화예술의 나라를 꿈꾸려면, 혹은 20세기 전반의 파리처럼 다국적 예술인들이 북적이는 공간이 부럽다면 일정한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한국에서 음반과 같은 성과물을 생산해낸 예술인과 음악인들에게 문턱을 낮춰주는 방안의 마련이 괜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다른 경험과 기억을 가진 그들은 우리 음악에 다채로운 색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다시 함께 섞이면서 또 다른 색이 만들어진다. 사실 음악에서 국적은 부차적이어서 모두가 공통집단의 구성원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전제를 놓고 조금 좁게 말해볼 때, 의약품 혹은 화장품 브랜드 같은 이름을 가진 외국인 뮤지션들 역시 우리음악의 일부이다. '우리 안의 이주음악인들'의 음악은 'Unknown Artist(작자미상)'로 남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의미의 '우리'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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