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조만간 내년도 예산안 심의에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예산'을 '어렵고 골치 아프다'거나 '내 일이 아닌 그들의 일'이란 반응을 보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반응은 예산의 심의와 결정에 국민이 소외돼 온 까닭입니다. 그간 예산은 주로 권력자나 관료들의 영역일 뿐이었습니다. 국회가 국민을 대신해 예산을 결정한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정부가 짜 놓은 틀의 범위 안에서 계수를 조정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정부의 예산이란 본디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입니다. 월급쟁이의 소득세에서 상품에 붙은 부가가치세에 이르기까지, 국민이 지불한 돈들이 바로 정부예산의 원천입니다. 정부의 곳간을 채우는 주체는 이처럼 국민입니다. 그러니 곳간의 돈을 제대로 쓰는지, 어디에 쓸 건지 따지고 결정하는 권리도 국민에게 있습니다.
필자는 최근 '2010년 보건복지예산의 평가와 과제'란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연 토론회로, 국회심의를 앞둔 상황에서 나름의 의미가 적잖았으나, 한계가 명확하였습니다. 아니, 예산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재확인하는 자리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10여 명에 불과한 청중에다, 복지부 관료는 초청에도 불구하고 숫제 참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공이 국회가 넘어간 만큼 더는 할 말이 없다는 태도인지? 나라의 가계부를 그저 '그들'의 몫으로만 여기는 건지? 정부의 살림살이를 두고 정부, 시민사회, 학계 등이 진지하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이런 결과가 국회의 예산안 심의와 결정에 반영되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가요?
예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정부의 예산안이 예산 결정의 최종 지점이 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이유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자신의 살림살이를 남에게 맡겨두고 살림이 제대로 꾸려질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거둔 땀의 결과로 마련한 돈과 재산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쓰지 못하고 남에게 맡겨 처분대로 사는 것, 이거 억울한 인생 아닙니까?
예산안은 정부의 정책 방향의 시금석
예산은 흔히 '정책의 숫자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수치가 아니며, 예산안을 짠 해당 정부의 정책 기조와 내역, 나아가 철학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서민을 위한다며 목소리 높인다고 해서 서민정부가 아니고, 복지를 외친다고 해서 복지정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랏돈을 실제로 서민과 복지를 위해 사용할 때 이런 수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2010년도 이명박 정부의 예산안은 이 정부가 나랏돈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쓸 것인지 그 정책 방향과 의도를 읽을 수 있으며, 국회의 예산 심의는 바로 이를 놓고 어디에 얼마를 더 보태고 더 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이뤄지면, 이를 쫓아 정부가 돈을 쓰는 것입니다. 국회 심의는 내년도에 쓸 돈을 결정하는 최종 관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산 또는 정부 재정의 여러 분야 중에서 보통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복지 분야입니다. 왜냐하면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성장과 복지 등 가치 지향이 반영되는 치열한 담론 영역의 성격 때문입니다. 내년도 예산안을 보셨습니까? 이번 예산안은 현 정부의 두 번째 예산안인데, 집권 초 예산이나 추경예산과는 달리 온전히 이명박 정부의 정책의지와 특징, 특히 최근 들어 부쩍 주창해온 '친서민중도실용'정책의 실체를 엿볼 수 있습니다.
2010년 정부 예산(안)의 총수입 및 총지출 규모는 290조 원 안팎입니다. 이 가운데 기금을 포함한 복지예산의 지출 규모는 81조 원입니다. 정부는 이를 두고 복지 분야 예산의 비중이 전체 정부지출액 대비 27.8%에 달해 "복지 분야에 역대 최고의 예산 비중을 실현하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우선 수치만으로 보면, 정부지출액 대비 복지예산의 비중은 '2008년 26.2%, '2009년 추경 26.8%에 이어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증가율도 8.6%'에 이릅니다. 이것만 보면 정부의 평가가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증가, 그 실체는?
정말 그러한가요? 그 속을 뜯어보면, 정부의 이런 주장은 상당히 어폐가 있습니다. 전년 대비 복지예산의 순증가분은 6조 4000억 원인데, 그 구성을 보면, 공적연금 2.2조 원, 실업급여 0.2조 원, 기초노령연금 0.3조 원, 건강보험 0.2조 원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을 합치면 3조 원 가까이 됩니다.
복지예산 증가액의 상당액이 국민연금의 성숙에 따른 급여 증가, 기타 실업급여 및 공적연금의 급여 증가, 기초노령연금 및 건강보험지원 등 법정지출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에 보금자리주택 13만호 공급을 위해 2조 6000억 원의 추가투여분이 있습니다. 둘을 합하면 5조 6000억 원에 이릅니다. 순 증가분 6조 4000억 원의 대부분을 차지하죠. 그렇다면, 정부의 재량에 따른 순예산 증가는 기껏 8000억 원 정도라고 계산할 수 있겠습니다.
정부지출액 대비 역대 최고의 복지예산 비중이란 것도 알고 보면 세수 감소에 따라 초래된 반사효과란 지적도 나옵니다.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 교수는 "이는 세수 감소로 인한 정부의 총수입이 축소된 결과에 힘입은 반사효과"라고 평가했습니다.
복지예산 내역에 포함된 보금자리주택 예산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이걸 복지예산에 포함시키는 게 맞느냐는 반론이 우세합니다. 공공임대와 관련된 예산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공급될 18만호 중 공공임대가 아닌 일반 분양이 8.5만호에 이른다고 합니다. 8.5만호와 관련된 예산은 복지예산이 아닙니다.
속빈강정 보건복지가족부의 예산
복지예산 전체가 아닌, 보건복지가족부의 예산은 어떤가요? 기금(11조 6600억 원)을 제외한 2010년 복지부 예산은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하여 19조 4000억 원입니다. 전년 추경예산과 대비할 때 약 3000억 원, 1.5% 감소된 예산이며, 본예산 대비 9700억 원, 5.3% 증가된 예산 규모입니다.
하지만 정작 취약계층과 서민의 삶과 관련된 예산 배정은 미미하거나, 몇몇 사업은 되레 줄었습니다. 지난해 보다 늘어난 것을 보면 영유아보육의 확대 3500억 원,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확대 1600억 원, 노인장기요양보험 확대 1300억 원, 장애연금 하반기 도입 300억 원입니다. 친서민정부의 예산 치고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발표한 '우리나라 빈곤 변화 추이와 요인 분석'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빈곤층 비중을 보여주는 지표인 상대빈곤율은 2008년 14.3%로, 2000년(10.5%)보다 3.8% 포인트나 높아졌습니다. 이런 지경인데 빈곤층을 위한 예산배정은 미미하기 이를 데 없고, 더욱이 기초생활분야 사업 중 한시생계보호 사업은 아예 전액 삭감돼 사업 자체가 종료되고, 긴급복지 예산은 올 추경에 비해 도리어 삭감됐습니다.
경기가 좋아진다고 빈곤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 지원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3~6개월 지원했다고 해서, 경기가 좀 나아졌다고 해서 빈곤층의 삶이 당장 좋아지는 구조가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빈곤층이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게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의 분석을 보면 장애인, 노인, 아동복지, 청소년복지예산 등도 사실상 전년도에 비해 삭감됐습니다.
<표 3>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복지 예산
진정 서민을 위한 예산이 되도록 국회가 제 구실해야
▲ 4대강 공사가 오늘(10일) 착공된다. 이 사업에 쏟아 붓는 돈을 복지에 돌린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가능할까. ⓒ프레시안(조형·사진=손문상) |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지예산 기조의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예산이나 복지예산의 틀 안이 아닌, 전체 정부 재정의 큰 틀에서 복지재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절실합니다. 그 속에서 우선순위와 내용을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양극화, 저출산 및 고령화 등 사회적 위기의 정도가 깊어지고 요구도 더 높아지지만 우리의 복지재정 수준은 여전히 국내총생산(GDP)의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래가지고선 서민들에게 체감 있는 복지를 실현하기 힘듭니다. 지속적인 복지예산 확충의 목표와 설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 관료들과 보수 세력은 복지재정 확충을 외치면 '말은 좋은데 돈이 있어야지'라고 말합니다. 정말 돈이 없어 그런가요? 4대강 예산에 쏟아 붓는 돈이 얼맙니까? 22조 원이라고 하고, 32조 원이라고도 하는데, 하여간 천문학적 돈입니다. 또, 감세조치로 빠진 돈은 얼맙니까? 이런 돈을 복지에 쏟아 넣는다면? 아니 4대강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장애인복지 예산에 투입한다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중증 환자들에게 투입된다면, 아이들 급식에 투입된다면, 사교육비 절감대책에 들인다면. 4대강에 들이는 돈을 투입하면, 이 모든 게 당장에도 상당부분 가능해질 것입니다.
정부의 예산안은 향후 국회에서 16개 상임위원회 별로 예비심사를 받습니다. 이 심사가 끝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종합심사를 해서 예산안을 의결합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정부에 동의권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국회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이 과정에서 '정부의 시녀'나, '들러리, 거수기'란 치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이 심의과정이 국민의 삶의 질과 나라의 장래를 깊이 새기면서 이뤄지는 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정쟁과 이해관계 등으로 인해 예산심의는 번번히 법정시한 막판의 숫자 맞추기나 자신의 지역구 챙기기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행정부의 '선수'들이 만든 예산안에 손을 대는 비율이 거의 1%대를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누구 말대로 심의가 아니라 추인인 것이지요. 국회는 언제까지 들러리를 계속할 것인가요? 국회는 진정 '서민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깊이 살피는 주체적인 예산심의를 하길 바랍니다.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정책조정과 공론의 장으로서 제 기능을 온전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온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국회의 예산심의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