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시절 일본 피겨계의 전설이자, 1989년 일본 최초의 세계 선수권자 이토 미도리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절대 강자로 군림했고, 시니어 데뷔 이후 김연아와 숙명의 라이벌 대결을 벌이고 있는 그녀가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시상식 코디움에서 사라져버렸으니, 일본 열도가 충격에 휩싸일 만도 하다. 그나마 코치와의 동거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던 안도 미키가 2차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일본 피겨 팬들에게 위안거리였겠지만, 에이스 아사마 마오에게 걸었던 일본 팬들의 기대와 희망은 순식간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국에서 김연아의 존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일본인들에게 아사다 마오는 '글로벌 재팬'의 상징적 존재라 할만하다. 그녀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스즈키 이치로,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평영 200미터(m) 금메달을 차지한 기타지마 고스케, 일본 축구의 자존심 나카무라 순스케와 더불어 '글로벌 재팬'을 대변하는 스포츠 아이콘이다. 일본 여자 스포츠 스타 중에서 아사마 마오만큼 글로벌한 주목을 받고 있는 선수가 과연 존재할까 할 정도로 그녀는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터로서만이 아니라 일본 여성의 글로벌 스탠더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90년생인 마오는 15살에 공식 무대에 데뷔한지 지금껏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는 총 2번 우승을, 시니어 무대에서는 세계선수권대회와 그랑프리 대회 등 총 7회의 국제대회 우승을 일구어냈다. 특히 그녀가 2008년 그랑프리 파이널 '프리스케이팅'(FS)에서 특유의 장기인 '트리플 악셀'(공중 3회전 반)을 세계 최초로 2번 성공시킨 것은 여자 선수로서는 당분간 깨기 어려운 기록으로 남아있다. 탁월한 점프능력, 어릴 적 발레로 몸에 익힌 우아한 연기, 수준 높은 '레이백'과 '스파이럴', '스텝 시퀀스' 플레이는 김연아의 아성 때문에 가려있지만, 여전히 정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최근 플레이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심지어 우울한 것일까? 라이벌 김연아를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체념한 것일까? 4개월이 채 남지 않은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피겨 2연패의 주인공이 자신일 거라는 꿈을 벌써 포기한 것일까? 아사다 마오의 예상 밖 부진이 이러한 심리적인 부담감과 이를 쉽게 이겨내기 어려운 내성적인 성격 탓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케이터 아사다 마오를 규정하는 일본인들의 독특한 심리가 과도하게 작용한 탓으로 볼 수 있다.
▲ 국제빙상연맹(ISU) 러시아 그랑프리 2차대회에 참가한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 선수. ⓒAP=뉴시스 |
알다시피 아사다 마오의 가장 큰 장점은 '트리플 악셀' 점프이다. 현존하는 여성 스케이터 중에서 유일하게 프로그램 구성 요소로 '트리플 악셀'을 포함시킨 선수가 아사다 마오이다. 가장 높은 기술적 수준을 자랑하는 '트리플 악셀'은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3-3 컴비네이션 점프를 이길 수 있는 마오의 유일한 콘텐츠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사다 마오가 공식 경기에서 이 점프의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다. 작년 김연아에게 완패를 당한 후에 마오는 트리플 악셀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 올해 대회를 대비했다. 코치 타라소바에게 "극복"이라는 좌우명을 전달받았을 정도로 그녀에게 '트리플 악셀'은 기술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사다 마오는 올해 1차 파리 그랑프리 프리 스케이팅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식 경기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더욱이 이 점프는 쇼트 프로그램이나 프리 스케이팅 초반부에 시도되는 것이어서 실패하면 경기 전체를 망칠 수 있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올 초 일본에서 열린 전 일본 선수권대회에서 일본 피겨 팬들은 마오의 한 단계 안정된 트리플 악셀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길만이 김연아를 이길 수 있는 필살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기 전 일본인 캐스터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말로 그녀의 트리플 악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과는 쇼트, 프리 프로그램 모두 실패였다.
김연아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가 말했듯이 모든 피겨 선수에게는 특정한 점프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고 한다. 김연아는 작년 고질적인 '트리플 룹' 점프 실수 때문에 탁월한 쇼트 프로그램에서 항상 오점을 안고 있었다. 작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NBC의 한 해설자가 김연아의 트리플 럿츠 점프를 '교과서'(textbook)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점프는 높이, 속도, 착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후진 방향에서 스케이트의 '인 엣지' 상태로 뛰어야 하는 '트리플 룹' 점프는 옥의 티로 남아있었다.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는 고민 끝에 이 점프를 빼기로 결정했다. 문제가 될법한 싹을 미연에 잘라버려 프로그램의 오점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사다 마오는 성공률 20%도 채 되지 않는 트리플 악셀 점프를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아사다 재팬'이 안고 있는 특유의 맨탈리티이다. 일본 피겨 팬들은 마오의 '트리플 악셀'이 세계 최고의 기술입국인 일본의 세계 극복 정신의 아이콘으로 생각한다. 전 세계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초일류의 기술로서 '트리플 악셀'은 일본인들의 세계 극복을 위한 상징적 기술이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초극정신'(超極精神)은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 못해 바보스럽다. 비록 성공률이 낮더라도 초일류의 기술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기술입국 일본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아사다 재팬'의 심리는 때로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근대정신의 각성으로, 때로는 라이벌 김연아와의 '피겨 전쟁'에서의 패배를 위로받기 위한 구실로 삼는 듯하다.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 기술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일본 피겨 계를 곤경에 빠뜨려버린 김연아의 절대 지존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한 일종의 주술문이자 초극정신을 위한 부적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가장 서양적인 스포츠의 전형을 갖고 있는 피겨스케이팅에서 일본은 1980년대 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피겨 최강국 중의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스폰서 없이는 이제 세계 피겨대회가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은 피겨스케이팅에 올인한다. 세계 피겨스케이팅의 판도가 미국과 러시아에서 아시아로 이동한 지금, 일본이 피겨에 오히려 집착하는 것은 '기술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서양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리고 글로벌 일본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문화적 탈아시아' 마인드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아사다 재팬'은 여자 피겨의 아름다운 점프 기술을 통해 기술입국인 일본의 자기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리, 개인적 성취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지리적 경계를 지워버리려는 일본의 정신 세계를 표상한다.
이미 모든 걸 갖춘 채 여유롭게 올림픽을 준비하는 김연아에 비해 아사다 마오는 지금 난제인 트리플 악셀을 계속 고집할지, 아니면 과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안정된 플레이로 전환할지 심리적 패닉상태에 빠져있다. 만일 트리플 악셀을 포기할 경우 김연아의 최악의 실수가 없는 한, 그녀의 올림픽 금메달은 불가능하다. 트리플 악셀은 실낱같은 우승의 희망을 이어가는 생명줄이자, 일본의 기술입국의 정신 세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 김연아에 대한 한국인들의 과도한 관심과 김연아를 통해 재생산되는 애국주의가 공공연하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아사마 마오를 향한 일본인들의 기대와 희망은 숨겨진 채로 그들의 정신 상태 안으로 침잠한다. 한국은 '피겨 퀸' 김연아를 통해 떠들썩한 내셔널리즘에 취해 있다면 일본은 숨겨진 내셔널리즘의 히스테리에 빠져 있다.
일본의 <니칸 스포츠>는 그랑프리 2차 대회가 끝난 후 아사마 마오의 참패의 원인을 '트리플 악셀' 고집 때문이라고 논평했다. 성공률 낮은 트리플 악셀에 대한 지나친 고집 때문에 프로그램 전체의 균형이 무녀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고질적인 난제에도 불구하고 트리플 악셀 점프를 고집할 것이다. 이것만이 '세계 극복', '연아 극복'을 위한 그녀의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아사다 재팬'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기술적 수준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은 때로는 장점이 되어 일본의 탈아시아, 글로벌 재팬의 엔진이 되었지만, 기술 극복만을 유일한 탈출구로 여길 경우 다른 탈출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아사다 재팬'의 딜레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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