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몇 번 강간당했어요?"
질문은 대화 중간에 아주 자연스럽게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강간당한 적이 없다고 하자 아이는 놀라워했어요."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강간당한 적이 있는 줄 알았죠."(…)그 열 살 난 소녀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 당시 아버지는 67세였다.
아동 성폭력과 빈곤 사이에는 절대적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 가정 아동의 상당수가 성폭력을 당할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빈곤의 수렁 근처에 있는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여성이 성적 학대의 생존자다. 그들의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는 마치 거액의 빚처럼 그들을 두고두고 덫에 빠뜨린다. 그러나 그것은 빚과는 달리, 파산 선고로 소멸시킬 수가 없다. 그들의 미래는 과거에 의해 무력화된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저소득층 여성들은 성적 학대와 이로 인한 자아존중감 상실이라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빈곤의 대물림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가족 내에서의 심리적, 물리적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환경에서 이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제가 열두 살 때였죠. 아버지는 그 후로도 1년 이상 제 몸을 만졌어요. 아버지는 취해 있었어요. 전 문을 잠그고 제 방에 있었죠. 아버지가 제 몸 위에 올라탄 느낌이 들어 잠을 깼고 전 밀쳐 내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말하더군요. '원래 아버지하고 딸은 이렇게 하는 거야.' 제가 그 이야기를 엄마한테 하자 엄마는 '괜찮아. 나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같은 행동을 했었어. 네 아버지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했어요."
▲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인 데이비드 K 쉬플러가 쓴 이 책은 2004년 전미 비평가협회상 논팩션부문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선정됐고, 2004년 전미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레시안 |
"20년 전보다 80센트를 더 벌고 있을 뿐인 거 있죠."
1970년대 중반, 캐롤라인 페인은 버몬트에 있는 한 공장에서 시급 6달러를 받고 플라스틱제 담배 라이터와 질레트 면도기 날의 케이스를 만드는 일을 했다. 2000년, 그녀는 뉴햄프셔의 대형 슈퍼마켓 월마트에서 상품 진열과 계산대 일을 하고 시급 6.80달러를 벌고 있었다. "슬픈 일이에요. 20년 전보다 80센트 더 벌고 있을 뿐인 거 있죠." (…)
세기의 전환과 경제적 호황은 그녀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녀는 백인으로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는 태만한 동료나 친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스스로도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시간관념이 철저했고 좀처럼 일을 쉰 적도 없었으며 밤교대 근무도 싫어하는 내색 없이 감수했고, 일하는 태도도 성실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진하지 못했다.(…)
승진한 사람들은 캐롤라인에게는 없는 뭔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는 성한 치아가 있었다. 캐롤라인은 이가 없었다. 그녀의 치아는 빈곤 탓에 사라진 것이었다. 플로리다에서 생활보호를 받으며 지내던 당시, 그녀의 치아는 대부분이 충치를 앓거나 이미 곪아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두 시간에 걸친 힘든 수술을 받아 그것을 모두 뽑아냈고 그녀의 얼굴은 움푹 패여 들어가 언제나 풀이 죽은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플로리다 주의 메디케이드 규정은 틀니를 해 넣는 경우 치아가 하나도 없을 경우에만 보험이 적용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치아가 일부라도 남아 있는 경우에는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말 불행스럽게도, 메디케이드에 의해 비용이 지불된 그 틀니는 그녀의 구강 구조와 제대로 맞지 않아서 틀니를 껴도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틀니를 착용하지 못했다. 틀니를 조정하는 데는 250달러 정도가 필요했고 그녀에게 그런 돈은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녀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치아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만약 치아를 잃지 않았다면 계속 가난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캐롤라인의 이야기는 흔히 갖고 있는 통념인 가난과 게으름이 현실에서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남매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녀는 결국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싱글 마더로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인 그녀는 신용카드 대금으로 1만2000달러, 학자금 대출로 2만 달러(이 돈으로 취득한 준학사 학위는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빚만 늘렸다), 집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두 개의 모기지론으로 5만4000달러의 빚이 있었다.
그녀의 딸인 엠버는 장애를 갖고 있으나 제대로 된 치료나 그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친아버지에게 성폭력의 경험도 갖고 있다. 14살에 엠버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돌연 안도감을 분출하며 "잘됐다, 잘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더 이상 승진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파산 신청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파산 신청을 위해 필요한 변호사 비용이 없었기 때문.
"미국이 기회의 땅? 내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
미국은 이민을 통해 구성된 다인종 국가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지금도 국경을 넘어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미국의 제조업을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인력이다. 75센트를 벌기 위해 지퍼 100개를 달아야 하는, 법정 최저임금인 시급 5.75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한 시간에 767개의 지퍼를 달아야 하고, 최저임금만큼의 작업 분량을 하루에 다하지 못했을 때는 나머지 작업 분량은 회사에 갚아야 할 '빚'이 되는 기막힌 저임 구조가 유지되는 배경에는 이민자들이 있다.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미국 사회의 유동성에 기인한다. 미국 사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열려 있는 사회이고 계층 격차가 적은 사회라는 일반적인 견해는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20세기 초, 한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은 8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시급 8센트로 뉴저지 주 저지시티의 조선소에서 일을 시작해 후에 베들레헴 철강 회사의 증기선 생산 공장 사장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할아버지가 이룩한 일로 지금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민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자녀들이었다. 자신의 삶은 이렇게 열악해도 자녀들은 더 좋은 교육과 취업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그러나 이런 기대도 이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 됐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한국인 이정희 씨는 한인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의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기묘한 대답을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한국 이민노동자 단체를 통해 한국식당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운동해 왔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싸움에서 이기면 아이들의 생활은 더욱 좋아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 얘들이 식당에서 일하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녀는 한국에서 은행원이었다.
"부시를 좋아하지만 부자가 대통령이 되는 건 싫어요"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저자는 "서로 상승작용하는 일련의 장애들이 모여 생겨나는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저임금이면서 저학력, 장래성 없는 직업에다 제한된 능력, 넉넉하지 못한 저축과 더불어 현명하지 못한 지출, 나쁜 주거 환경과 더불어 악순환의 고리를 강화시키는 부실한 자녀 교육, 낮은 의료보험 가입률과 더불어 건강하지 못한 사정 상황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해결해 줄 만병통치약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해 돈을 쓸 의지가 있는가? 희생을 감수할 의지가 있는가? 부의 피라미드 구조를 재구성할 의지가 있는가?"
더욱이 가난한 이들이 '부의 피라미드'를 허무는데 가장 기본이 될 수 있는 선거를 통한 변화를 이끄는 것도 힘들다. 이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투표를 하러갈 시간도 없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캐롤라인은 공화당 후보인 부시에게 더 호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자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캐롤라인은 부시가 부자인 것을 몰랐다.
미국의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이들 '워킹푸어'의 삶이 전적으로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국에도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슴을 짖누르는 이 '무거운' 책을 읽어야할 이유다.
저자는 다층적 장애의 결과인 가난에 대한 이 방대한 책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빈곤의 경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번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행복은 사회 전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다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잊힌 사람들은 스스로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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