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현실과 담을 쌓고 순결하고 고고한 타자로 존재할 때 비로소 예술이 가치있다 말하지만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예술은 없다. 또한 사람의 삶과 분리된 예술도 존재할 수 없으니 모든 예술은 현실과 삶의 묵묵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술 속에 현실이 곡진하게 담길 때 우리의 마음은 움직인다.
특히 당대의 사건이나 쟁점이 예술로 표현될 때 우리는 현실을 더욱 풍부하게 체험할 수 있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통해 우리는 참혹했던 학살을 오늘의 역사로 기억하며, <태백산맥>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피와 땀이 흐르는 시간으로 반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직설과 은유, 상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현실을 재창조해낸다. 때로는 명확하게 손을 들어 가리키며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직설이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은유와 상징이라는 돌아가기를 택하기도 한다. 은근하고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도 현실에 대해 언급하는 방법임을 물론이다.
그렇다면 젊은 뮤지션 타루(Taru)의 1집에 실린 <쥐色 귀, 녹色 눈>은 어떤 수사법을 사용한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제목부터 우리의 눈을 잡아 끄는 이 노래는 시작부터 지금의 현실을 강하게 거부한다는 의사를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화자는 '언제까지 우리를 지배하려는' '너희'에게 화가 나 '인형이 아니다'라고 밝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이어지는 현실 진단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위태로운 왕국'이며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명예롭지 않은 왕관'과 '행복을 강요하는 TV'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모두가 병들었어도 아프지 않을 능력'과 '눈과 귀를 가리고서 입을 틀어막을 권리'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저 순종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암울한 세상이 바로 뮤지션 타루가 보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녀만의 생각일까?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방송에서도 금세 교체되고, 서울 시내 어느 곳에서도 집회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오늘은 과연 이 노래의 가사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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