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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고 죽어도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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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고 죽어도 죽자"

[인터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그는 얼큰한 해장국 같은 사내다. 그의 말을 삼키면 배가 든든해지고, 몸에 열이 오른다. 말이 구수하면서 매콤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따끔거린다. 그와 함께 눈물, 콧물 쏟다보면, 어느새 속이 후련해진다.

29일 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그와 점심을 함께했다. 모진 세월에도 시들지 않은 입담으로 배부른 자리였다. 이날 그는 "내 인생은 '아리아리'였다"고 말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으리라.

조금은 낯선 우리말 표현을 쓰는 그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다. '아리아리'란 "길을 낸다"는 뜻이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내려고 손끝으로 발끝으로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살아왔다"는 말로 자신의 삶을 요약했다.

이날 만남은 그의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겨레출판 펴냄) 출간을 계기로 마련됐다. 권력의 폭압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온 지난 76년을 돌아보는 자리였지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걸쭉한 신명이 넘실댔다.

"글 쓰려다, 꽁무니를 뺐어. 나는 좌절과 절망만 먹고 살았거든"

"무엇보다 촛불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역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그때 젊은이들을 봤더니 그들의 손가락, 몸뚱어리가 몽땅 촛불이더라고. 몸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니 누가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지."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가한 느낌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기자가 "그래서 희망을 봤느냐"고 묻자, 그는 "그럼 봤지"라고 답했다.

희망이 빛나는 이유는, 그가 지나온 긴 어둠 때문이다. 자서전을 쓰기에 앞서, 그는 "꽁무니를 뺐다"고 말했다. 설마 백기완이 '꽁무니'를? 그렇다.

"나를 키워온 것은 밥도, 글도, 깨우침도 아니야. 좌절과 절망이 나를 키웠지. 좌절과 절망만 먹고 살았으니 내 몸뚱이는 영양 상태가 고루 갖춰지지 못해 파행적이야. 그걸 글로 옮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그는 굳이 글을 썼다. 이유가 이랬다.

"젊은이들이 우리가 사는 바투(현실)가 지나온 길,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거지.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게 올바른 역사든 일그러진 역사든 그저 자꾸 잊어버리게만 해. 학교에서부터 남과 싸워서 이기라고만 강요하니까. 결국 남을 죽인다는 건데, 그래서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볼 틈이 없는 거지. 그래서 내가 글을 썼어. 좌절과 절망을 먹고 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어봐라, 그런 거지."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프레시안

"사전에 모아놓은 우리말은 한줌 밖에 안돼"

말하는 사이사이, 그가 만들어 낸 우리말 낱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식이다.

"땅이 젖으면 썩버섯(독버섯)이 먼저 번진다고, 우당(전쟁)으로 다 찢겨진 1950해께 눈물과 한숨에 젖은 서울 명동거리는 그야말로 썩버섯으로 아글아글 했다. 술장사, 사람장사, 옷장사, 신발장사, 사람 패는 망나니, 술망나니, 거짓말쟁이, 넋살(정신) 나간 굴랑이(예술가)들, 갈데없는 나그네, 불쌍한 빌뱅이들까지 그야말로 그때 명동은 던적(사람 몸에 들어와야 살아가는 몹쓸 병균)이 다스리는 따구니(악마)였다.…나는 거기에 땡닢 하나 없이, 아니 주먹 하나 없이 떡하니 나타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더냐. 떡하니 말뜸(화두) 하나만 들고 나타났다. '용의 군빛(환상), 용에 마주한(대한) 바램(기대)을 깨자'는 말뜸이었다."

말뜸(화두), 썩버섯(독버섯)처럼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예컨대 역사는 '갈마', 사건은 '짜통', 제국주의는 '검뿔빼꼴', 혁명은 '불쌈' 등이 그렇다. 이런 표현 가운데 일부는 잘 쓰이지 않는 옛 우리말을 찾아낸 것이고, 나머지는 그가 직접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 대부분이다. 그의 말이다.

"그늘에 가리고 땅에 묻힌 무지렁이들의 말이 많아. 사전에 모아놓은 것도 모래밭에서 한줌 쥐는 것만큼 얼마 안 되지. 그런 낱말들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일그러진 것을 모으기도 했어. 어떤 사람들은 어원이랑 안 맞느니, 내가 멋대로 만들었다느니 하는데, 우리말은 새로 만들어내면 안되나. 다른 나라에서도 갈마(역사)와 함께 새로운 말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고. 왜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꼬방'이 아니라 '달동네'라니까, '빨갱이'라더라고"

ⓒ프레시안
그가 만들어낸 우리말 표현 가운데는 이제 익숙해진 것도 꽤 많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이다. 이런 표현 하나하나에는 그의 삶이 끈적하게 묻어있다.

"달동네라는 말을 처음 쓴 게 1952년이야. 전쟁이 한창일 때였지. 채알(천막)을 하나 얻어서 산기슭에 쳐놓고 배움터를 열었어. 전쟁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가르쳤지. 처음에는 '채알 배움터'라고 했는데, 곧 '달동네 배울'라고 이름을 바꿨지.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종이도 '달동네 새뜸(소식)'이라고 했어.

그런데 얼마 뒤 경찰이 찾아 온 거야. 내 몸을 밧줄로 묶더니, 거꾸로 매달더라고. 그리고는 내 배시때기(배)를 발로 뻥뻥 걷어차는 거야. '왜 하꼬방이라고 하지 않고, 달동네라고 하느냐' 그러더라고. 내가 그랬지. '하꼬방은 왜말 아니냐고. 이참이 어느 때인데 왜말을 쓰라고 하느냐'. 그랬더니 '너 일본말 싫어하는 걸 보니까, 빨갱이구나' 그러더라고. 그러더니 다시 발로 냅다 질러대. 내 뱃속에는 고추장에 비벼먹은 깡보리밥이 있었는데, 그게 바닥에 쏟아졌지. 그때만 해도, 사람 잡아 패는 경찰서 바닥이 맨흙이었어. 쏟아진 깡보리밥이 금세 얼어붙더라고. 한겨울이었거든. 며칠 지나서 나와 보니, 내가 쳐놓은 채알(천막)과 아이들이 오간 데 없는 거야. 그땐 참 추웠지."


"젊은이들아, 역사가 요구하는 긴장을 먹고 살아라"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백기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프레시안
이런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밥상 한켠에서 어느 기자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백기완 선생님이 누군지 잘 모르죠"라고 툭 던졌다.

"잘 모르지. 그런데 말이지. 나는 모르더라도 갈마, 그러니까 역사는 알아야 해. 내가 몸부림치면서 길을 내온 역사 말이야.

갈마(역사)는 우리에게 긴장을 요구해. 역사가 요구하는 긴장을 먹을거리로 삼는 사람은 성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키가 안 커. 어려운 말로 하면, 발육부진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래. 내가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역사가 요구하는 긴장을 먹고 살아라'"

"내 나이에서 예순 해를 피눈물로 깎아버리자"

그는 자서전 끝자락에 이렇게 적었다.

"있는 대로 피를 내뱉고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참 어느 겨락(시대)을 살고 있는 건가. 지난 저 먼 옛날, 예순 해 앞서로 되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 나는 이참 지난 예순 해 앞서보다 더 치사하고 께끔하고 매톡한 이명박 막심(폭력) 앞에 맨 주먹으로 맞서 있다. 따라서 내가 젊어져야 한다. 그렇다. 내 나이에서 예순 해를 피눈물로 깎아버리자. 그리하여 늙은 젊은이가 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고 발을 구르며 다른 비나리 한귀를 떠올렸다.

누가 그랬던가. '한 늙은이의 나이테를 까부셔 젊은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돈이 아니다. 뚱속(욕심)도 아니요. 그렇다고 뚤커(용기)도 아니다. 깨지고 비틀리는 불림(진보)을 안간 힘으로 이끌어야 할 갈마털(역사적) 일목(과제)이다.'

아, 누가 그랬던가. 기완아, 그 말만 믿자! 그 말만 믿자!"


"쫓겨날 생각 좀 해봐. 붙어먹을 생각만 말고"

ⓒ프레시안
'늙은 젊은이'가 된 그는 이날 끊임없이 으르렁댔다. 몸은 젊지만, 마음은 늙어버린 이들이 못마땅했던 게다. 밥상 한켠에 있던 어느 보수 언론 기자를 가리켰다.

"나는 말야. 한 번도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까 쫓겨날 생각 좀 해보라우. 붙어먹을 생각만 말고." 그가 알았던 기자들의 이름을 꼽다 나온 말이다. 사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기자들을 향한 호통이었다. "부딪혀 봐. 그리고 쫒겨나는 거야"라는 말을 거듭했다.

일흔 여섯 나이에서 예순 해를 피눈물로 깎아버리기로 했다는 그는, 그래서 눈물이 많다. "옛날에 내 별명이 두 개였어. 하나는 쌍도끼. 나쁜 놈들을 보면, 그냥 주먹을 날렸거든. 또 하나는 울보야, 울보. 내가 워낙 잘 울어."

"용산에서 생사람이 죽었는데, 눈물도 안 흘리면…한 발자국만 더 밀자"

밥상을 치며 흥겨운 노래를 읊조리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쏟아진 눈물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하는 말. "한 발자국만 더,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자. 그러다가 죽어도 죽자. 한 발자국이 안 되면 단 한치, 단 한치 만이라도…" 그가 예전에 발표했던 시 '한 발자국만 더'의 앞부분이다.

그는 "용산에서 생사람이 죽어갔는데, 눈물도 안 흘리는 게 그게 사람이냐"라고 했다. '늙은 젊은이' 백기완이 젊은 기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자"는 것이었다. 원래의 시 전문이다.

한 발자국만 더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다가
죽어도 죽자

한 발자국이 안 되면
단 한치, 단 한치만이라도 더 밀어내보다가
쓰러져도 쓰러지자

아 어이타 이 놈의 세상은
밀어낼수록 캄캄한 수렁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는다고 하는 것은
패배보다 더 끔찍한 타락이다.

밤이사 칭칭 더세지만
한 발자국만 더 한 발자국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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