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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학자의 서재] 류은숙의 <인권을 외치다>

2008년 9월 26일 <프레시안> 창간 7주년을 맞아 선보인 서평 연재 '철학자의 서재'가 26일로 딱 1년이 되었다. 이 연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해 왔다.

그 동안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 펴냄)부터 <인권을 외치다>(류은숙 지음, 푸른숲 펴냄)까지 총 53권의 책이 소개되었다. 좋은 책을 원하는 독자의 호응에 힘입어 앞으로도 이 연재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


모름, 그리고 모른다는 것을 앎

'인권'. 요즘 여러 매체나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너무 흔하고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인권'을 말하는 것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흔하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낱말인 '인권'이 현 사회에서 얼마나 보편화되어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알려고 노력할까?

'안다'는 것은 참 어렵다. 나와 친한, 그래서 '잘 아는 친구'라고 남에게 소개하는 이를 내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앎이 참일까? 그보다도 나와 가장 친근한 존재인 바로 나 자신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앎이 이처럼 어려운 것처럼, 내가 그것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역시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당시 식자층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무지함을 깨닫고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데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것이나,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고 말한 것은 '앎'뿐만 아니라, '모름을 앎'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내 앎이 참된 것인지, 그리고 내가 무지하지는 않은지를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앎을 참된 것으로 믿는 순간 그것에 대한 나의 탐구는 정지한다. 반면 어떤 것에 대한 내 앎이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내게 계속 열려 있게 된다.

'인권'을 말하다가 '앎'에 대해서 장광설을 풀고 있으니 좀 뜬금없어 보인다. 인권이란 앎보다는 실천이 중요한 것 아닌가? 맞다. 인권이란 앎이나 구호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인권에 대한 왜곡된 앎, 또는 그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은 간혹 웃지 못 할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중일 때 간혹 발생하는 코미디가 있다. 예전부터 경찰은 시위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증거 수집을 위해서 사진기를 이용해왔다. 요즘은 성능 좋은 디지털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기도 한다. 운 없으면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서 옆에서 있다가 카메라에 잡혀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시위대 역시, 이러한 경찰에 대응하여, 부당한 진압이나 폭력적인 진압을 감시하기 위해서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 이에 간혹 진압 경찰이나 경찰 간부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경찰에게도 인권이 있으니, 초상권 보호를 위해 카메라를 치워 달라!"

단순하지 않은 '인권'

그렇다면 인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너도 나도 인권을 외치는 것일까? 인권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이나 활동가들마다 약간씩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정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우선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을 정의할 때에는 특히 시간성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다운 삶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되는 다양한 조건들을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사람이 살아있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살 집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노동해야 하고, 노동을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아플 때는 치료받아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이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필요(必要)'란 '반드시 요구된다'는 뜻이다. 즉 앞으로 천천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장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반드시 (당장) 요구되는 권리가 인권이다.

그리고 '최소한'이라는 말의 의미도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서의 '최소한'은 '최소한 이 정도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다른 한 편 '인권'에 포함되는 권리가 '최소한'의 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권은 사람이면 당장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는 인권에 대한 정의에도 이처럼 많은 고려 사항이 담겨 있다. 더구나 인권의 영어 표기인 'human rights'에서도 보이듯이, 인권은 하나의 권리가 아니라 다양한 권리들의 집합체이다. 그리고 다양한 권리들이 하루아침에 '인권'에 포함된 것이 아니며, 지금도 '인권'에 이름을 올리려고 대기 중인 권리들이 있다.

어쩌다가 '인권'은 이처럼 복잡한 개념이 되었을까? 하긴 이런 것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있다거나, '인권' 보호나 신장을 말하고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앞에서의 경찰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인권은 최소한의 것을 가지지 못한 자가 최소한의 것을 요구할 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막강한 힘인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대 앞에서 자신들의 인권을 들먹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즉 최소한의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인권'을 막강한 공권력을 휘두르는 자가 갖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경찰에서도 인권 교육을 시킨다는데, "경찰에게도 인권이 있으니, 초상권 보호를 위해 카메라를 치워 달라"고 말한 그 경찰은 인권에 대해 무지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인권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경찰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인권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 경찰에게도 이 책 <인권을 외치다>(류은숙 지음, 푸른숲 펴냄)를 권한다. 그가 '인권'을 알게 될 마지막 기회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인권'을 공부해보자

▲ <인권을 외치다>(류은숙 지음, 푸른숲 펴냄). ⓒ프레시안
이 책은 인권을 공부하기 좋은 교재이다. 물론 서점에 가보면 인권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있다. 그중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것들이다. 그에 비해서 이 책은 쉽게 읽힌다. 하지만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다. 가볍지 않은 내용을 평이하게 서술할 수 있는 것은 1992년 이후 줄곧 인권운동에 몸담은 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인권'과 관련된 여러 문건을 모아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하나의 문건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 의미,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 등을 설명한다. 이 문건들과 그에 대한 설명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 문건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권'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결국 현대의 '인권'을 만들어 냈으며, 미래의 '인권'의 가능성을 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뼈만 남은 인권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권'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하는, 그리하여 인권과 인권 아님을 구분하는 기준을 수립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꼼꼼히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은 부분은 '서문'이다. 일반적으로 책 서문은 잘 읽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6쪽도 채 되지 않는 서문에서 우리는 저자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견해일지 모르지만, 서문만 읽어도 인권에 대한 대강은 잡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문 말미에 저자는 "인권에는 분명한 저자가 있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책에서 소개한 문건들이 자신의 시대를 살던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구체적 고민과 투쟁의 산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서문의 제목을 '인권의 저자들에게 바친다'로 한 모양이다. 따라서 총 4개 장과 37개 절로 되어 있는 이 책을 독자들이 한 절씩 곱씹으며 읽었으면 한다. 투쟁하던 이들의 숨결을 느끼며 말이다.

몇 개 절 엿보기-발견과 연대

어떤 책이건 그 책을 읽은 이들에 따라 영감을 받는 구절들이 다를 것이다. 내게는 이 책의 '빈곤을 폭로하다'라는 절의 내용이 특히 와 닿았다. 저자는 앤드류 먼스의 '런던 부랑인의 절규'에 대해서 "1883년 영국에서 출간된 한 팸플릿은 세상을 경악케 하고 빈곤을 '발견'하게 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한다.

빈곤을 '발견'하다니?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문건이 나오기 이전에는 가난이란 개인의 문제였다. 즉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게으름 등 도덕적인 면에서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건을 통해서 가난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그로 인해 빈곤 문제를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즉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저자 말대로 우리에게 빈곤은 더 이상 '발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모자람에서 찾으며,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별하는 (…)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 발견되어야 할 것은 빈곤이 아니다. 발견되어야 할 것도 치유해야 할 것도 우리 사회의 양심이고 구조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 사회적인 것인데도 개인에게 떠넘겨진, '발견'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가? 아니 '발견'되지 않도록 '통제'되는 것들은 없는가? 용산 참사를 불러온 철거민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성 소수자 문제, 장애인 문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 '발견'을 넘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데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도록 하는 '통제'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개인화시키는 '통제'는 문제 당사자들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연대를 가로막는다.

이러한 '통제'를 극복하고 연대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들은 계속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며 이 당사자들은 계속 이 문제를 떠안는 개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때는 나치의 지지자였다가 나중에는 반대 운동을 한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의 '그들이 왔다'라는 글이 그것을 말해준다.

맨 먼저 그들(나치-서평자)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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