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원 송금하는데 1000원 수수료 붙는 세상
투기자본의 실체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둘러싼 논란이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먹튀'(먹고 튄다)가 은어가 일반에 익숙해졌다. 투기자본은 헐값 매각으로 기업을 인수해 구조조정을 앞세워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하고 유상감자와 고배당으로 투자 원금을 뽑고 새로운 자본에게 기업을 되파는 방식을 통해 단기간에 큰 수익을 노린다. 투기자본의 행태를 고발해온 투기자본감시센터(http://www.specwatch.or.kr)가 최근 창립 5주년을 맞았다. 지난 23일 저녁 회원들과 함께 창립 5주년 행사를 가진 자리에서 허영구 공동대표를 만났다.
▲ 허영구 대표. ⓒ프레시안 |
IMF 외환위기 이후 1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투기자본이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게 되면서 한국에서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그 피해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자본이 장악하면서 발생한 높은 수수료 문제 등은 투기자본으로 인한 피해가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투기자본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중장기 투자를 회피함으로써 장기적인 고용과 생산능력이 약화된다. 주주에 대한 고배당 뿐 아니라 회사유보금이나 자산까지 매각한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채 유상감자를 실시한다. 금융당국의 감독과 규제를 피하기 위해 상장을 폐지한다. 구조조정을 통해 임금삭감, 정리해고, 비정규직을 확대한다. 적대적 M&A 위협을 통해 주식가격을 상승시켜 매각차익을 실현한다. 이중과세방지협약을 악용해 조세회피를 시도한다.
허 대표는 이런 투기자본의 행태가 외국계, 금융자본(헤지펀드, 사모펀드, 투자은행)을 넘어서 국내, 산업자본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작년 함께 한 일만 해도 위니아만도, 하나로텔레콤, 파카한일유압, 쌍용자동차 등 계속 늘고 있다. 그는 "자본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행태가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외국계 투기자본의 수법을 국내 재벌들도 전수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최근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단독으로 뛰어든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금호그룹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대우건설을 다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재계 33위인 효성이 22위인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 들어 논란이 일고 있다. 두 기업 모두 망가질 수 있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효성의 조석래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정치적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뉴시스 |
"월가의 무릎 꿇은 오바마, 자본권력 이명박"
작년 세계경제위기는 금융자본의 투기적 행태가 원인이었다. 위기 직후 어떤 이들은 "영미식 금융자본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년이 지난 현재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의 월가 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 금융권은 다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금융위기를 초래한 고위험상품이 다시 활개를 치고 월가의 CEO들의 보수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허 대표는 딘 베이커 미 경제정책연구소(CEPR) 소장의 "월가가 오바마를 이겼다"는 말을 언급하면서 "월가가 이미 너무 커져 있어서 금융규제와 개혁을 약속했던 오바마도 월가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국가권력이 제도적으로 투기자본을 통제하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경제의 중심은 다국적 기업이다. 100대 다국적 기업이 세계 자산의 20%를 차지한다. GDP가 6대 다국적 기업의 연간 매출액을 능가하는 국가는 21개에 불과하다.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투자처를 찾아 떠도는 자금이 62조 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1년 GDP의 80배나 되는 금액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이윤축적을 위한 하부기구로 전락된 지 이미 오래됐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니 더 어렵다고 허 대표는 주장한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자본가의 이해를 대리하는 정권이었다면 이명박 정권은 자본이 정권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이번 세계경제위기에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 쌍용차는 2004년 상하이차에 인수될 당시부터 '먹튀' 우려가 제기됐었다. 결국 상아이차는 1조2000억 원의 투자와 고용 보장이라는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기술'과 '돈'만 빼갔다. ⓒ<노동과 세계> 이명익 |
파업이 끝나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던 회사가 다시 잘 굴러가고 있다. 이전에 8000명이 하던 일을 4000명이 다 하고 있다. 몇 년 그렇게 일하고 몸이 상하면 해고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하면 된다. 밖에 엄청난 수의 실업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버틸 수밖에 없다."
쌍용차 사태에서 이명박 정부는 '노사 자율'을 강조하며 사태가 악화되도록 내버려뒀다가 막판에 공장으로 들어가는 물, 음식물, 의약품까지 차단하고 노동자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결국 정부는 원하던 노조의 '백기투항'을 받아냈다.
"과거 골리앗 투쟁, 현대차 투쟁 등이 있었지만 이번에 쌍용차 사태처럼 전쟁을 치르듯 투쟁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싸워도 안 된다는 것을 보게 되니까 얼마전 금호타이어의 경우 사측이 정리해고를 들이대니까 노조가 사측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 싸워도 못 이긴다는 것에 대한 좌절과 공포가 너무 크다."
갈수록 '괴물'이 되고 있는 투기자본
이처럼 정치권력과 자본이 하나가 된 상황에서 자본은 점점 더 야만화될 수밖에 없다. 허 대표는 "이번에 쌍용차에서 형과 동생, 처남이 각각 '살아남은 자', 희망퇴직자, 농성자로 갈라졌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형제, 친인척 간에도 쇠파이프 들고 싸우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공포와 좌절을 통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서루 싸우게 만든다"고 말했다. 지금은 정부의 과감한 부양책이 거시경제 지표의 상승을 가져온 것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독일의 노동자들보다 연간 3-4개월은 더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허 대표는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출구전략'은 정말 어려운 과제다. 허 대표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답은 '자각'과 '연대'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쌍용차 사태 때 현대차, 기아차가 같이 싸웠다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은 국제적으로 이동하지만 노동자들은 개별 기업, 개별 국가의 테두리 안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결국 내가 바뀌고, 그로 인해 정치권력이 바뀌고, 이를 통해 자본의 행태가 바뀌는 길고 어려운 여정에서 지름길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길찾기'를 포기한다면 자본의 투기적 속성은 더욱더 커지고 야만스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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