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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가린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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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가린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 같아(그럴 재주도 없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으나 후폭풍은 거세고 풍향마저 복잡하다. 가수들 주연의 이슈가 많아 반가울 법도 하지만 아이돌그룹 계약문제와 지드래곤 표절논란처럼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적지 않다. 주류 가요의 화려한 부활 이면에 고질적인 한계가 여전하다는 현실을 드러낸 사례들이다.

2PM 재범의 '귀향 조치' 파문은 더욱 넓게 퍼져나갔다. 랩 실력에 대한 넋두리처럼 귀담아 들을 말도 있었지만 감정적인 반발을 살 만하긴 했다. 그렇다고 신속하고 강력한 '응징'이 적절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탈세와 탈루,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불법증여를 하진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버젓이 국회의원과 장관, 재벌총수가 되는 나라다.

재범 추방과 정수근 은퇴의 진짜 공통점?

한국 혐오에 대한 징벌이 오히려 한국 혐오를 증폭시키더니 자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인터넷에 충동적으로 글을 올리면 훗날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개입 당하면서'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물론 농담이다). 이 사건이 만들어낸 기획사와 팬클럽의 대립구도도 눈여겨볼 현상이다. 팬덤의 영향력 과시가 시위로 이어진 경우는 많았지만 근래엔 '동방신기 사건'처럼 회사를 상대로 한 소비자운동으로 변모하고 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는 것보다 어른 싸움이 애들 싸움이 되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와중에 나온 가장 단순한 관점이 무엇이었는가는 보수언론과 논객이 스스로 답해주었다. 왜곡된 인터넷 문화와 불순세력의 여론몰이를 지적하면서 별개의 사안들을 같은 문제로 돌려버리는 비상한 재주를 과시했다. 네티즌을 동일한 가상집단으로 설정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바탕으로 어디에서 흘러나온 물이건 같은 배수구로 빨아들였다. 몸은 테이블에 앉아있지만 정신은 지난밤 욕조에 고무오리와 함께 두고 온 것 같았다. 또한 연예뉴스 보도행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극단적인 경쟁사회의 폐해 앞에선 입을 다문다. 배우와 가수의 인권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인터넷 정화'의 명분을 세우려는 속셈임을 모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혹자는 삐딱함을 가장하여 이것저것이 뒤죽박죽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한 가수와 관련된 사건이 이 정도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무언가의 비늘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암호가 덜 풀렸다는 얘기다. 특히 음주소란 전력이 있었다고 해서 허위신고와 오보로 은퇴에 이른 야구선수 정수근의 사례는 재범 논란과는 전혀 달라 보여도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언론보도 행태만이 아니다. 질문이 명확해야 답이 나온다. 그래서 이어지는 글은 특정 이슈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그 구멍을 들여다본 것이다.

▲13일 오후 청담동 JYP엔터테인먼트 본사 앞. 2PM팬연합회가 벌인 '재범 탈퇴 반대 침묵시위'에 약 2000명(주최측 추산)이 운집했다. ⓒ뉴시스

대중스타는 독립투사가 아니다

우선 스타가 어떤 존재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류스타가 상징적이다. 대중예술인, 특히 시장에 한계가 있는 현실에서 음악인에게 해외진출은 권장할만하며 음악계를 위해서나 음악 자체를 위해서나 좋다. 그러나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구호와 우월감 충족을 위한 패권의식이 개입되어 교류가 아니라 정벌이란 말이 나오는 지경이다. 서구와 일본 이외 지역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무지와 착각이 심하다. 한국 가수들의 인기가 높다고 동남아 대중음악에 대한 오만함을 품는다면 우물 안 개구리라고 자랑하는 꼴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에는 긴 역사와 다양한 장르를 안은 음악 신이 있다. 다만 한국형 기획사시스템이 주류음악과 아이돌을 통하여 강점을 발휘했을 뿐이다. 개중에는 알맹이 없는 자랑거리와 스펙 쌓기인 경우도 있다. 대중문화가 산업의 첨병이긴 하지만, 스타를 국위 선양하는 외화벌이 일꾼 혹은 독립투사로 여기는 분위기에는 문제가 있다.

워낙 구호가 많긴 하다.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 귤을 까서 던져주는 친절을 '친서민 정책'이라 하고(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밧줄이다), 구조조정 속의 '일자리 창출'이라든지 녹색과는 거리가 먼 '녹색성장',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외치는 '법치 확립'은 적잖은 이들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모순(矛盾)의 유래를 굳이 고사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한창 유행했던 '두바이 처럼'은 요즘 두바이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아선지 갑자기 들리지 않아 섭섭할 정도이다. 구호의 시대라 할만하지만,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야구대표팀의 이승엽이 말한 "우리는 모두 아시아인"과 재벌과 정권의 "우리는 대한민국이니까"는 다르다. 전자는 위로, 후자는 기만이다.

그간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진지한 논의 덕분에 순화와 재인식이 이루어졌다. 누구에게 이용당하거나 도를 넘지 않는다면 유효하고 유용한 면도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목적으로 취한 집단과 이런 논의가 닿지 않는 구역이 있고, 엉뚱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안경 너머로 매서운 눈빛을 반짝이는 젊은 논객은 "박재범은 한국 국적을 포기한 미국인이다. 네티즌들은 미국인이 한국에서 돈을 벌어가면서 한국을 비하하는 것에 대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인터넷 정보 부채질하기, <조선일보>, 2009.09.18)고 썼다. 그는 전에 정부정책을 비판한 학자를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해 한국에 대한 충성을 모두 포기하고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서약까지 했던 미국인"(연예인 김민선 미국인 박경신, <동아일보>, 2009.08.15)이라 칭하며 기염을 토한 바 있다.

이러한 '지적 수준'과 일반의 풍토가 '조국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주는 스타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황우석과 심형래의 경우에 그랬고, "국민요정" 김연아를 향한 연정이 그랬으며, 아예 스스로 국민응원가를 부르는 국민아이돌까지 나왔다. 그러나 개인의 성공과 국가·민족의 능력에 대한 동일시는 지난 시대의 과업이다. 과거의 관점으로 미래를 투사하면 오류를 불러온다. 물도 얼음이 되면 깨어지듯이 과업이 고집이 되면 응고되고 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범 사건 때에 과도한 애국주의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우려한 것은 오버가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재범을 비난했거나 다른 스타에 열광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왜 둘 다 그럴만하다는 것일까?

시장논리가 사회윤리로

▲정수근은 대한민국 '집단'의 일원으로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소비자 '집단'의 인식이었다. ⓒ뉴시스
다시 야구선수 사건을 함께 떠올려보자. 투철한 신고정신과 일부 언론의 프로근성이 발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의롭고 충실한 활동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 하나는 대중으로서 당신을 스타로 만들어주었으니 고객으로서 대가를 제공받아야겠다는 소비자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가수 등을 제공된 상품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사생활과 생각의 차압을 당연시한다.

모두가 하나의 집단이기 때문에 팬이었건 아니건 상관없다. 진성당원 중심의 정당에서도 당비를 냈으니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받아야겠다는 태도를 가진 당원들을 간혹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두가 경쟁자인 사회다보니 자신보다 스타 역시 마찬가지로 여긴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가 붕괴되고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회 안에선 분노가 방향을 잃기 때문이다. 공격성을 해소하는 일탈 허용의 전통마저 없어져 기껏해야 졸업식 날의 사도마조히즘을 떠오르게 하는 난동만 남았다. 2002년 월드컵의 과열은 그래서였고, 이러한 환경에서 '소통능력의 부재'는 필연이다. 이 억눌림은 종종 소속 집단을 비난하거나 공동의 목표에 충실하지 못한 구성원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으로 분출되었다. 그리고 약자가 자기보다 더 약한 자들을 원망하는 슬픈 패턴이 만들어졌다. 더 크게는 애국주의로, 때론 민족주의로 표출된다. '압축'하여 변화해온 중국에서도 이러한 증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투철한 신고정신과 프로근성은 개발독재에서 파생된 집단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윤리를 대변한다. 몇몇 사건들은 억압적인 사회윤리와 극단적인 시장논리가 얼마나 체화되었는가 보여주는 파편들이다. 시장논리가 사회윤리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시장논리가 대중음악의 윤리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 점에서 재범을 위한 옹호론에서도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혀를 차며 시작하는 상투적인 첫마디는 어린 아이돌 가수의 말 한 마디에 과민반응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구멍은 '한 마디'가 아니라 '① 어린 ② 아이돌 ③ 가수'이다.

"가수의 말 가지고…" vs "감히 가수가…"

하나,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은 어리지 않다. 인생관과 세계관이 완성되는, 혹은 완성되어야 할 시기다. 물론 나이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지만, 대체로 스물을 넘긴 이후엔 지식을 늘리고 방법을 더 알게 될 뿐이다. 둘, 아이돌은 주체성 없는 상품이라고 합의되고 있다. 연습생의 인권 제한을 당연시하고 그런 형태의 스타발굴프로그램까지 방송되며, 회사 소속 음악인들의 사회적 의사표현은 철저히 통제받는다. 우리 대중음악인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은 것도 기획사 중심이라는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재범 논란을 두고 소속사가 가수들에 대한 교육과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한겨울에 생배추 씹는 기사까지 읽어야 했다. 셋, 특히 가수 혹은 대중음악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다.

어느 편에 있건 마찬가지다. 2009 하이서울페스티벌에 참여한 윈디시티가 공연 중에 "진정한 페스티벌은 촛불이 아니었겠느냐,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철거노점상을 기억하자"고 말하자 공연이 '시간관계상' 중단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관료가 직접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행사 진행자들, 즉 일반인들마저 가이드라인을 의식하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그 일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선례가 될 것이다. 예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삼청교육대라는 록 밴드가 어느 페스티벌에서 극우성향의 발언을 했지만 공연 중이나 후에 불이익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다양한 '경고효과'를 볼 수 있으며, "그 입 다물라"내지 "연예인 정화"같은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낮은 수준이 되어버렸다.

음악은 사람과 사회의 내면을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예감하고 암시한다. 다시, 음악인은 사람과 사회의 내면을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예감하고 암시한다. 등 돌리고 앉아 발언하는 음악(인)은 의식한 것 이상으로 많은 걸 해낸다. 심지어 모르는 것까지. 대중예술과 민주주의 선행국들에선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다양성이 있다고 꼭 좋은 사회는 아니지만 다양성이 없다면 나은 사회가 될 수 없다. 동의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생각을 위한 자리가 넓을수록 성장한 것이다. 이제 점심시간에 짜장이냐 짬뽕이냐 갈등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짬짜면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진 것 같지만 "가수의 말 가지고…"와 "감히 가수가…"는 바라보는 방향은 달라도 딛고 선 발판은 같다.

'눈 가린 자들의 도시'

소비를 위한 소비에 익숙하다. "그 영화 봤어?"란 물음에 답하려 화제작을 챙겨본다. 지폐 몇 장과 할인카드를 넣어둘 명품 백을 사서 들고 다니고, 지출로 열등감과 자존심의 가격을 매긴다. 카페에 앉아 행인을 구경한다기보다는 차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자신을 디스플레이 한다. 소비로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효율적인 시장과 합리적인 경제주체'가 환상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속마음은 착하다'며 자위하는 매 맞는 아내, 자기 라이트 불빛을 쫓으며 경쟁하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생활과 질주, 그리고 앞서 말한 사건들은 빛깔은 달라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잎사귀들이다.

질문을 늘어놓았으니 답을 얻을 차례다. 맑은 샘물에서 시냇물이 나온다. 하지만 시냇물만으로는 강이 되지 못한다. 흙탕물도 삼키며 바다로 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물길에 '보'가 건설되었다. 그 안에 갇힌 물의 소용돌이를 광기라 부를 때에 거부감을 느낄 법하다. 하지만 광기는 완정을 찬 모습이 아니라 순수하고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는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한 개인의 행동과 집단의 조각으로서의 행동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길을 정비하고 소용돌이를 구경하는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불기소되고 있다. '눈 가린 자들'은 대중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시' 역시 우리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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