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만큼 불신 받고 인기 없는 직종은 없을 것이다. 간혹 신문에서 가장 신뢰받는 직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곤 하는데, 법관, 기업인, 대학교수처럼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직종일수록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정치인은 곧 시민이 선출한 민주적 대표이다. 정치인은 자신을 선출해준 주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시민을 위한 대리인이다. 현실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토록 불신 받는다면, 왜 민주주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던가. 그러한 자가당착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치와 관련된 언어와 담론의 피폐화를 주도했던 언론 공론장의 역할이 그 중심에 있다. 언론인 나름대로의 가치관, 언론(사) 자체의 사익과 목적 의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편견 등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은 그들이 공론을 말하기 때문에 공론의 대변자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사익적 목표가 공론의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될 뿐이다.
물론 모든 책임을 언론에만 떠넘길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시민의 대표로서 자신의 철학, 비전, 원칙을 말하기보다 그동안 사실상 정치를 지배해온 언론이 만들어놓은 담론의 틀, 언론이 제시한 정치적 어젠다, 언론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에 부응하기에 급급한 몰주체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율적 판단과 그에 따른 말과 행위의 주체로서 정치인을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언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정치인에 대해서는 더 비판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난 20여 년의 민주주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이 체제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와 절차들, 시민이 참여하는 대표와 정부의 선출 과정, 국가 기구들의 구조와 체계 등, 민주주의의 하드웨어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시민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익히고, 정책 의제와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 실제로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시민 스스로가 정부, 국회, 정당, 정치인을 포함하는 그들이 선출한 대표를 대표답게 만들 수 있는 지식 능력, 즉 민주주의의 소프트웨어를 발전시키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좋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민주주의 이론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 역시, 민주주의의 실천이 시민 대중의 지식을 확대하는 효과를 갖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종의 시민 지식을 어떻게 창출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는 정치 참여의 방법은 어떤 것이고, 그에 합당한 제도화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지식창출 민주주의(epistemic democracy)'라고 개념화한다.
이러한 이론적 관심이 갖는 함의는, 민주주의의 운용과 정책 결정 과정이 선출된 대표나 엘리트 전문가 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인 동시에 시민대중이 지식,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민주적 정책 결정 과정을 주도하는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천과 그 효과가 시민대중의 지식 습득과 창출을 가져온다면, 시민이 대표를 선출하고 그에 책임을 지우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대표성-책임성'의 관계 또한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 <정치 에너지>(정세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떻게 쓸까를 생각할 즈음, 언론에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사실상 그것은 정치인의 말을 야유나 상투적 논란의 소재로만 다룰 뿐, 이성적으로 다뤄본 적이 없는 언론의 습성을 재확인해주는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된 기사대로라면 이 책은 읽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정치적 공해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것은 정치 혹은 정치가의 말을 소재로 지식창출 민주주의의 심화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적어도 공론장에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나는 출판사의 시도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출판사 스스로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기획을 이어가는 긴 노력이 필요함을 먼저 충고하고 싶다.
이 책이 갖는 인상적인 대목들
출판사는 정치가에게 당신은 왜 정치를 하려 했고, 한다면 어떤 정치를 하려 하는가, 당신이 이루고자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그것을 위한 철학과 비전은 무엇인가, 당신은 정치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이 목적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은 그가 몸담고 있는 정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시민과 자기 당의 지지자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려고 노력하게 된다. 출판사에서 그 첫 번째 작품을 제1야당 대표로 선정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야당이 있는 체제"이다. 야당은 정부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존재만이 아니라 선거 승리를 통해 정부여당을 대체할 "대안 정부(alternative government)"여야 한다. 현 정부가 어떻게 하든, 야당이 부실하고 국정을 운영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정부여당의 독주 또한 견제될 수 없다. 야당이 우연한 기회로 집권한다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한국 사회와 정치가 발전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이 점에서 제1야당 대표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문제는 한국의 정치 변화와 발전을 가늠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정치인이 쓴 책이란 홍보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독자들이 그것을 찾아 읽는 것은 드문 일이다. 명색이 정치학을 공부하는 나도, 이런 종류의 책을 받아보고 뒤적여 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다. 논문이나 글을 쓰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적 가치도 별로 없다. 이유는, 그 내용에 저자의 진실성이 담겨져 있지 않고 고민하고 성찰한 흔적이 없다는 데 있다. 자신의 과거 경험, 생애를 말하든, 자신의 생각을 말하든, 당시의 정치적 환경에서 '무언가 하기로 되어있는 상투적인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 내용의 대부분이다. 정세균의 책, <정치 에너지>를 읽다가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접했던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자세를 바로잡고, 끝까지 정독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한 내용이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했나?
무엇보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하는 것의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어떤 글이 진정성을 갖는다는 것은, 서술의 전개가 저자의 생각의 논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저자 인품과 인격성이 감성적 교감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을 때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에서 남달랐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한국 정치와 정치인에 관한 하나의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책은, 유년시절의 성장 과정으로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 개인사적 내용을 담은 1, 2장과 자신의 정치관을 담은 3장부터 9장까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바마를 대통령이 되게 한 두 권의 유명한 책이 있다. 하나는 정치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아버지로부터의 꿈>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정치적 비전과 프로그램을 담은 <담대한 희망>이다. 이에 비유한다면, 정세균의 이 책은 한 권에 두 주제를 모두 담고 있다. 앞의 주제는 두 개의 장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가난했던 농촌에서의 성장과 정치인이 되기까지 과정을 통해 그의 따뜻한 성품과 지적 자세의 형성 배경이 짧고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면 평범하다는 평을 벗어나긴 어려운 책에 그쳤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비전과 현실 정치 문제에 대한 관점을 다룬 3장부터 9장까지는 경제 발전과 노동문제, 현대사에 대한 이해, 민주주의와 그 제도적 틀로서의 헌법에 대한 관점, 운동과 정당의 문제, 박정희·김대중·노무현·이명박을 포함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가, 그리고 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다. 이 가운데 경제와 노동문제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 영역을 다룬 부분에 비해, 추상성의 수준이 더 높은 현대사에 대한 이해,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제, 그리고 운동과 정당의 문제를 다룬 정치적인 실천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 부분이 더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정치관과 인격성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나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내용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9장 '민주당의 길'은 특히 뛰어나다. 이 부분은 매우 감동적이어서, 민주주의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했던 외국의 유명한 명연설들에서 받게 되는 감동을 떠올릴 정도이다. 이 책의 결론, '새로운 연합을 향하여'에서 저자의 말은 청중들을 앞에 두고 하는 연설처럼 들린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일성으로 밝혔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각났을 정도로,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인들이 했던 말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설로 들린다.
글의 결론에 가까워가면서 정세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겠다 (…) 정부의 전횡을 견제하는 (…)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남은 선거에서 권력을 하나씩 찾아오는 것이다 (…) 그들과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250~251)"
이 문구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금까지 현 정부 비판을 위해 언표화되었던 무척이나 전투적이고 상투적이며 공격적인 언어보다 더 잘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포착하고 이를 집약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진보적 비판자들이나 야당은, 현 정부가 한국 사회의 최상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노동자와 서민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이고 비정한 보수정부라고 공격한다. 나아가 시민운동, 노동운동을 탄압할 뿐 아니라, 언론·집회·비판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구태를 드러내는 반민주적인 정부라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의 역진을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출신 미국 정치학자 쉐보르스키의 간결한 정의를 빌리면, 민주주의는 "여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체제"이다. 풀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의 훼손이 여론과 다음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통해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면 그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가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심판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최종적 본질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시민을 두려워하고 야당을 두려워함으로써 견제되고, 권력의 오만과 권위주의의 회귀에 대한 충동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게 하는 것은, 대규모의 전투적인 시위나 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야당이 집권할 전망을 증대시키는 정치 행위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힘과 권력을 갖는 집권여당이 그렇지 못한 야당을 두려워하는 원천이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과 통치를 위임했지만, 시민이 대표에게 책임성을 부과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가 강력한 이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본질을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저자 정세균이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합리적 판단의 범위 안에서 사고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은 자주 한국 사회가 허용하는 이념적 경계에 근접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노동문제에 대한 관점은, 한국 사회의 보수 편향적 지형에서 통용될 수 있는 한계선에 근접한다. 운동권의 급진적 지식인이 아닌,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성 정치인들 가운데서 이보다 더 진보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이다. 평소 온건한 그의 이미지와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정부여당과 이명박에 대한 평가 역시 무척 균형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헌법에 대한 이해, 헌법 개정과 제도 개혁에 대한 관점 또한 날카롭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주요 인물들, 즉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에 대한 논평은 흥미롭고 진솔하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저자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판단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산업화에 대한 박정희의 기여는 평가될 수 있다하더라도, 결코 과대평가될 수는 없다. 산업화는 기업가, 노동자, 농민과 같은 모든 생산자 집단의 땀과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도 평가될 수도 없다. 확실히 박정희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저자의 균형감각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파편적이고 의외로 빈약하다.
이 책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평가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 면모를 이렇게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갖는 여러 좋은 점들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것보다 사적인 관계에 관한 부분을 통해 표현되는 데 그친 점은 아쉽다. 어쨌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무현에 대한 연민의 정과 아울러 그를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부분은 동시에 정세균 자신의 인품과 정치적 자세,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뛰어난 지도자는 아닐지 몰라도, 또 그가 여러 한계와 오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과 서민적 성정을 가진 비운의 정치가로 기억하게 한다.
정세균의 책에서 노무현에 대해 말하면서 유시민을 도입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저자는 노무현의 정치관과 행적에 대해 비판적 태도와 입지를 가졌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그와 썩 잘 어울리는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노무현을 직접 비판하기보다, 유시민의 정치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말한다. 반대로 그는 노무현을 변호하기 위해 유시민을 등장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것은 유시민에게 떠넘기고, 노무현의 정치적 책임과 실패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책에서 나타나는 노무현 그림자로서의 유시민의 이중적 위상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내가 실망하는 문제들
▲ 정세균 민주당 대표. ⓒ프레시안 |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었는지가 모호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질문을 제기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누가 "나는 왜 정치를 하나"라는 문제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정치권에서 일정한 입지를 갖게 된 정치 지도자들과 미래의 정치 지망생들에게 이 질문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효과에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목적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역사와 미래, 정치와 사회에 대해 어떤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비전을 갖는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책의 내용으로만 볼 때,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어떤 전체적 관점을 갖는지가 애매하다. 목적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고자하는 방법론 또한 분명치 않다. 자신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어떤 안정적인 이론 틀, 통일적인 비전을 갖지 않고 문제를 대면할 때, 그의 태도, 그의 관점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변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예상 밖으로 지배적 인식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정작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의 인식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책은 별로 말하는 것이 없다.
노동문제나 소외 세력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파업, 강남 논현동 고시원 참사, 용산 참사와 같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 대해 동정심과 슬픔을 말한다. 그는 노동문제, 도시 재개발 사업에 대해 말하고, 코리언드림을 안고 입국한 이주 노동자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농민에 대해 애정을 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정책과 사회 정책, 농촌 정책, 외국인 정책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정책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 미래 한국 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의 생각, 또는 비전을 포착할 수 없다. 그는 개별적 사건과 사안에 대응해 말할 뿐이다.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자신이 확고한 민주주의자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주주의는 무척 소박하고 안이하다. 사회경제적인 개별적 사안에 대해 개인적 수준에서 포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체제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정치와 연결되지 않는 한 그것은 개인적 미덕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충돌하게 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정치적 참여의 평등을 기초로 시민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사회경제적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체제이자 이념이기 때문이다. 자애롭고 따뜻한 지도자 상은 시민을 소극적 주체 내지 신민으로 보는 관점과 더 잘 어울린다.
나는 그가 경제 중심 부서의 하나인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정책, 사회 정책, 산업 정책, 고용 정책, 노동문제 등 주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아무런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했다. 그것은 이 책의 중대한 결함이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온정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갖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의 온정주의가 자혜심이 없는 비정함, 나아가서는 잔인함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온정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대립하고, 보수주의와 접맥되는 태도라는 사실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온정주의는 사회의 권위와 권력관계를 암묵적으로 수직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강자가 약자에 대한 배려나 온정을 통해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고 또 이를 통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경향을 부추긴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정치 과정을 통해 접근되고 해결되어야할 문제를 사사화(私事化)하여 인간적·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온정주의를 통해서는 저자가 깊은 인간적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고 말하는 문제들에 대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보수주의의 비인간성, 무도덕성, 비합리성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정세균은 확고한 민주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이 온정주의와 닿아있고, 그것은 중도 좌의 영역이 마치 온정주의의 영역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체계성 내지는 통일성의 중요성과 닿아있는 것으로, 좌-중도-우의 이념적 분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정치적 비전과 정향은, 사회 전체의 구조, 시장 구조, 권력 배분, 경제적 분배, 문화적 가치의 헤게모니 등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말할 때 비로소 그 내용과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철학적·정치적 비전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어렵고, 그의 정치적 좌표를 설정하기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말할 때, 이 책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는, 공간적(spatial)·시간적(temporal) 측면에서 범위가 좁고,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의 또 다른 약점은, 모든 좋은 요소들이 작용하여 야당이 집권했다고 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서 체계성과 통일성에 대해 말했듯이, 정치 지도자가 주요 이슈들에 대해 개별적 사안으로 접근하고 대안/대책을 제시하는 수준 그 이상을 요구한다. 즉, 왜 정세균과 그의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하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근 일본의 정권교체를 통해 부상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의 경우를 한 사례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총선 3일 전에 외국 신문에 실린 그의 기고문은 '일본의 새로운 경로'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한다.
"탈냉전 시기에 있어 일본은, 일반적으로 세계화라고 불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운동과 시장근본주의의 바람에 지속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상황에 내몰렸다. 자본주의를 근본주의적으로 추구하면서 인간은 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수단으로 다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09년 8월 27일)
이 기고문에서 하토야마는 단순히 새로운 정부의 총리로서 취할 정책 방향을 천명하고 있다기보다, 일본이 처한 정치·경제·사회의 전반적 조건을 탈냉전 시기 미국의 절대적 우위의 쇠퇴에 따른 다원적 세계체제의 등장이라는 전체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면서 일본의 변화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고 그 역사적·시대적 비전을 선언하는 지도자로서 나타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적·공동체적 "유대"(fraternity)라는 포괄적 개념을 통해 대안을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 중심의 근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는, 고이즈미 전 총리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동된 바 있었지만, 인간을 단지 생산의 비용으로 인식하게 된 결과, 인간적 유대와 직장 및 지역 공동체의 결속력을 해체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위기를 가져왔다. 그것은 실업, 고용불안,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전통적인 공동체의 해체, 부의 재분배 악화라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가 이끌 신정부는 전통적 공동체로부터 유래하는 인간적,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고, 복지 체제와 의료보험의 재건, 환경보호, 교육과 육아에 대한 지원 확대, 분배 구조 개선을 지향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정치 및 동아시아 지역의 대외 관계에 있어, 일본은 미국 경제력의 쇠퇴, 그와 병행하는 다원적 세계 질서의 부상, 중국의 경제 대국화라는 변화에 대응하면서, 미일 관계에 있어 일본의 자주권을 강화하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경제 번영을 가져올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도한 민족주의의 흥기를 경계하고,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동아시아공동체와 약화되는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통화 체제 건설을 지향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떠맡을 것도 다짐하고 있다.
일본 신정부의 매우 창의적이면서 논쟁적인 이러한 정책 천명은 자민당 지배 반세기 동안의 정책으로부터 뚜렷한 방향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 파장은 세계 정치로 확대되고 있다. 예상대로 그것은 미국 정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 EU 의장인 마뉴엘 바로소는, 일본의 새로운 정책 천명을 유럽의 복지자본주의의 모델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한다며 적극적으로 환영했다(<파이낸셜타임스>, 2009년 9월 16일).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정세균의 노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노선의 연장선상에서 단지 이를 보완하겠다는 것인가, 또는 유럽형 복지자본주의 모델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다른 무엇인가.
하토야마의 노선은 창의적 정치 리더십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창의성이란 커다란 위험과 대담함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일본 민주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오늘날 한국의 민주당보다 더 다양하고 혼합적이고 폭넓다. 자민당의 이탈자들을 중심 세력으로 하고 중도보수적인 신당 사키가케를 포괄하는 것인 만큼 보수적인가하면, 구 사회민주당 역시 포괄하기 때문에 또한 진보적이다. 이 넓은 스펙트럼에서 하토야마는 일본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노선을 신정부가 나갈 방향으로 정의했다. 이것은 리더십의 비전과 대담함이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실제로 그 정책 노선을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차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과 목적의식이 없다면 정책의 성패 여부라는 문제는 제기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자신의 정당이 대안 정부가 되고, 선거에 승리하여 실제로 정부가 되어야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정치 세력, 정당에 대한 객관적 자기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가 앞선 민주정부들에 대해 반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다시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과거에 대한 성찰로부터 배우는 기회는 가질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왜 보수파만 이롭게 하냐"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로지 내 편과 네 편이 있는 진영 간 대결 구도에서는 권력을 취하고 공직을 잡겠다는 제어하기 어려운 욕구만이 있을 뿐, 합리적 대안의 창출과 이성적 공론, 공공선의 추구 같은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내용의 실질적 변화 없이, 권력을 갖는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이 엮어내는 권력의 순환 논리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힘 있는 대안정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 이른바 "민주정부 10년"과 그 시기 당과 지도자, 정치인들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이 금기시되거나 억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세균의 책은 이 점에 대해 별로 말이 없다. 자기성찰 없는, 정치적 경쟁자나 적대자에 대한 평가는 힘을 가질 수 없다. 저자가 이명박 정부를 향하여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를 강조하고 민주주의 후퇴의 위기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커지기 어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를 새롭게 정의하고 스스로의 로드맵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 IMF 위기 이후 시장근본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의 방향이 오늘의 한국 사회의 주요 긍정적이고 또 부정적인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한 평가 없이 새로운 경제 정책의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임시 이들 대통령들이 아무리 큰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후 정치 전통과 세력의 계승은 무척 초라한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정치인들이 하나의 자율적 행위 주체와 판단의 준거로서가 아니라, 특정의 지도자와 가까운 거리로 측정된 무슨무슨 "계"니 어느 파의 "가신" 내지 "직계"니 아니니 "친노"니 "반노"니 "친DJ", "반DJ"니 같은 비하적 말만 있을 뿐이다. 정당 내부에서 민주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이러한 권력은 지도자의 임기가 끝남과 더불어 지속되기 어렵다. 선거 때만 되면 직업 정치가가 아닌 정치 밖으로부터 참신한 인물을 "수혈"하자는 주장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한국 정치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민주당의 지도자가 넘어서야할 문제는, 앞선 두 대통령, 김대중, 노무현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비전과 "희망의 담대함"을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며
약점과 한계를 비판했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에서 그리고 문화적 토양과 지적 환경에서 이 정도의 책이 나왔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선진 민주주의국가들에 있어 주요 정치인들의 자전이나 정치적 비전을 담은 책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환경에서 한 인간의 자기성장과 정치 경험을 결합해 성찰하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진실되게 말하고자 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내용은 풍부하고, 결코 그 수준은 낮지 않다. 이 책은 이런 성격의 영역, 장르에서 앞으로 나올 모든 책들에 대해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또한 당장 후마니타스의 다음 정치가 책에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음 저자들이 좀 더 진보적인 입지에서 책을 쓴다고 할 때 그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과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중도 좌 이상의 정치적 공간을 사고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 과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중도 좌, 또는 진보의 미래는 다만 진보파의 급진적 활동가들이나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한 부분(101~104쪽)에서 저자는 다분히 다음에 책을 쓸 진보파 정치인을 염두에 둔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보의 가치가 소중한 만큼 일부 진보 진영에서 보여 온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장이 선명하고 확실한 대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진보를 일궈 갈 방도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 가져올 작은 변화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확 바뀌지 않으면 그게 그거라는 식일 때가 많다. 이의를 제기하는 데 능숙한 반면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찾는 데에는 소홀하다.
(…) 민주화의 성과를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있다. (…) 입장의 선명성에 의존하다 보니 일에 대한 헌신을 중시하지 않는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력과 인내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말은 거친데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 정치적 역학 관계 등의 현실적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면 보수로 몰아붙이고 개혁 의지를 의심한다. 그런 토론에서 언제나 그들은 승자다. (…) 스스로 선구자인 양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이 자신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섭섭해 한다. 복잡한 문제를 '신자유주의' '보수 기득 세력' '냉전 수구 세력' '분단 체제' '성장 지상주의' 등 몇 개의 추상적 개념으로 손쉽게 재단한다.
(…) 자기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싫어하면서, 남의 말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많지만 책임지고 일해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 우리 현실은 보수 헤게모니가 워낙 강하다. 진보에게 주어진 작고 드문 변화의 기회를 살리려면 좀 더 책임성 있고,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 정직과 신뢰, 노력과 보상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논리와 언어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 옳을 뿐 아니라 가능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정세균의 문제제기에 대해 이제 진보파 정치가가 답해야 할 차례이다. 그 응답이 흥미롭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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