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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딸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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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 딸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김상수 칼럼]그 시절,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딸을 버리진 않았다

며칠 전 나는 서울이 발신인 낯선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나에게 메일을 보낸 분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배광옥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문장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8월 25일 여기 프레시안에 칼럼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작가이자 이론가, 대학 강의와 전시기획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 국적의 한국인 '다프네 낭 르 세르장(Daphné Nan Le Sergent - 한국명, 배난희(裵蘭姬))에 대해서 글을 쓴바 있다.(관련 기사 : 정말 가난해서 저를 버렸나요?)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찾아 34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했다 "서울을 가면 저를 낳아준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서울에 홀트아동복지회에 영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봤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었어요."

나는 어떤 확신도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성장이후 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정작 부모나 일가친족을 만나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얘기를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34년 만에 딸이 생부를 서울에서 곧 만나게 됐다. 그간 있었던 배난희의 이버지 '배광옥'(64) 씨가 그의 딸 배난희를 찾았던 노력들이 이제 드디어 결실을 이루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프랑스 이름 '다프네', 원래 이름은 배난희인 그녀의 아버지 배광옥 씨는 나에게 보낸 이메일 편지에서 말하기를 "딸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겼는데,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바로 그랬다. 생부의 예상대로 이 노력이 주효했다.

그리고 34년 전 그는 비록 딸아이를 해외에 입양 보낼 수밖에 없는 당시 처지였지만, 그는 딸과 헤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한시도 딸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배광옥 씨의 메일에 즉시 답을 하면서 딸과의 만남이전에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와 딸이 소통할 수 있도록 딸의 프랑스 이메일 주소를 먼저 알려주었다.

▲ ⓒ김상수
그리고 나는 "난희 씨의 아버님께서 30년도 그 이전에, 어려운 사정에 처하여 아기를 해외로 입양시킬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나마 주소와 전화번호를 홀트아동복지회에 꾸준히 남겨두신 일은 참으로 훌륭하신 판단이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간답니다. 부모들이 아기를 복지회에 맡긴 이후에, 난희 씨의 아버님처럼 변경된 전화번호나 주소를 복지회에 계속해서 남기면 다행이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이런저런 사정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두 사람의 만남은 아버님의 성실함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이는 귀감이 되고 남습니다. 아기를 복지회에 넘겼지만 주소나 연락처가 변경될 때마다 계속 복지회에 연락처와 기록을 남긴다면 오늘 같은 만남의 기적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서신이 비록 개인적인 서신이지만 이 서신을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하여 수많은 비슷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고 메일을 보냈다.

곧 난희의 아버지로부터 답이 왔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지나간 날들이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 시간이었던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0년대 초반 업무 차 김포공항을 찾을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입양 차 떠나는 현장을 목격하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울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 난희가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난희에게 쏟아주신 관심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의 두서없는 글이 다른 입양인들에게도 귀감이 된다면 어디에 공개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의 난희를 계속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배광옥 올림."

나는 배광옥 씨의 정중한 개인 서신을 그 분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공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다시 찾아왔을 때, 배광옥씨처럼 연락처나 주소가 변경되어도 계속해서 자신의 처지를 아기를 넘긴 복지회 등에 기록으로 남겨, 언젠가는 반드시 귀중한 만남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김 상 수 선생님

나는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고 있는 배광옥(64세)입니다

나는 충청남도 광천에서 태어나 학업과 군복무를 마친 1973년 일자리를 찾아 단신 상경하여 지인의 도움으로 한강변에 위치한 아파트 건설현장의 경비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에 김순희(金順姬)를 아내로 맞아 달동네인 동대문구 면목동의 단칸방에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결혼 4년 전인 1970년에 맞나 그 동안 서로 인생의 반려자로 사귀었고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맺어진 결혼생활은 비록 도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낮선 서울이었지만 우리들만의 천국에서 지내왔던 시간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윗목에 놓아둔 물그릇이 밤사이 얼음으로 변해있었고, 300m가 넘는 산 아래 미끄러운 비탈길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 언젠가 잠든 밤에 연탄가스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고생한 생각, 비만 오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하여 부엌의 그릇이 총동원되기도 하였고, 그릇에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우리의 사랑을 축복하는 화음소리로 들으며 밤을 새웠던 추억, 여름철 뒷산에서 내려오는 모기떼와의 싸움, 다닥다닥한 방문 앞의 고약한 화장실 냄새 등, 정말 열악하기만 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이 있었기에 어떤 불편함도 극복할 수 있었고, 그 보다 더한 어려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쉬는 날이면 근교 산에 올라 먼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하였고, 가끔 동네 시장에 들려 아내가 좋아하던 순대, 떡볶이, 오뎅 등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밤이 되면 중랑천 뚝방에 앉아 물에 반사되는 불빛을 바라보며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 속에서 아내는 어느덧 아이를 갖게 되었고, 사랑의 결실, 우리의 귀여운 아이가 태어나는 날 만을 고대하며 우리는 아기를 위하여 무었을 어떻게 해줄 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 일과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6월 18일, 아침 무렵부터 아내의 출산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진찰결과 예상하지도 못했던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심각한 이야기까지 해 주었습니다. 임신말기 다리가 조금씩 부어오르는 증세는 임산부 대부분에게 발생되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의사들은 산모가 출산차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많은 진료비를 받아내기 위하여 관행적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유도한다는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바 있는지라 의사의 수술권유에 대한 불신이 당시에는 매우 컸습니다.

그리고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금전적인 부담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유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내도 수술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설마 아내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괜찮던 아내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지더니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근처 조산원을 찾게 되었는데 담당 산파는 오전에 병원에서 상담했던 내용들과 현재 산모의 상태를 살펴본 후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자기네 조산원에서 출산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또 조산원 2층에는 병원(산부인과)이 있어 만약 응급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조산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산고에 따른 신음의 간격도 빨라지고 또 그 소리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에 대하여 대신하거나 나눌 수 없는 나는 괴로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고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으로 현재의 심정이나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였습니다. 아내의 진통은 한동안 이어지고 이러기를 세 시간 여, "앙!∼" 하는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새 생명이자 나의 유일한 혈육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이때 병실의 시계는 밤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땀에 흠뻑 젖어있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출산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아이를 출산한 아내가 무척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보였고, 아무리 첫 아이라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심한 고통이라면 첫 번째 아이로 만족하고 말겠다는 마음속의 다짐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출산직후 계속 이어져야 하는 후산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조산원의 담당산파는 산부인과 의사와 전화로 무엇인지 상의하고 아내는 즉시 2층의 산부인과 병실로 옮겨지게 되었고 몇 병으로 헤아려지는 수혈이 진행되고 후산과 관련된 의사의 조치가 가해지는 순간, 아내는 많은 양의 피를 하혈하게 되면서 얼굴은 차츰 백지장처럼 변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의사는 자신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음을 판단했음인지 산모를 신속히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아내를 도심의 병원으로 이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앰뷸런스를 불러 환자를 이송한다는 것은 아내의 현재 상태나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급한 대로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였는데 자정이 넘은 시간(당시만 해도 자정에서 새벽4기까지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음)에 택시잡기가 용이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일을 마치고 차고로 돌아가는 택시를 세워 정황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한 결과, 고마운 운전사는 흔쾌히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고, 택시안 내 가슴에 안겨있는 아내는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현재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서 빨리 병원에 도착하여 무사하기만을 기원하고 있는 나의 심정과 아내의 위급함을 알았는지 운전기사는 나름대로 속력을 높여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져 나도 모르는 사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습니다.

산부인과를 출발하여 도심 병원의 응급실 병상에 도착하기까지 약40여분, 의사는 진단결과 이미 숨을 거둔지 10여분이 경과하였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이야기와 의료진 몇 사람이 달려들어 여러 차례 걸친 소생술을 시도하였으나 아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하느님!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어찌하여 저의 아내를"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세상이 뒤바뀌는 심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자동차에 뛰어들고 싶은 나의 충동을 알았는지 동행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항상 나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하는 아내는 나의 곁을 떠났고, 아내의 시신은 화장 후 평소에 자주 찾았던 북한산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아내를 바람 속으로 날려 보내며 이제는 고통과 시련이 없는 편안한 하늘나라에서 영면하기를 빌었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친 후 깜깜한 방안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어린 핏덩어리를 안고 3일간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나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냈구나 하는 죄책감과 아내 없는 막막한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나도 아내 곁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옆에서 우는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려주는 순간마다 비겁하기만 한 생각들에 채찍이 되어주곤 하였습니다.

아기는 나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내가 떠나면서 나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다, 그리고 아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아기만이 아내를 대신하는 유일한 나의 가족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의 아버지로써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이 아이를 부양해야 하나 하는 현실과 관련된 대책에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얻은 결론은 해외입양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발생된 고아나 미혼모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주선하기 위하여 종교단체나 입양기관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좋은 결실들을 보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해외입양에 대한 사회 인식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 입양을 보낸다면 성장해 가는 아이의 앞날도 훨씬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아기를 멀고 먼 해외로 보낸 후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들을 떨쳐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저 어린 핏덩어리를 어떻게 지금 보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입양의 실행에 있어 또 다른 문제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나 2년 이후로 입양을 미룬다면 그때 다시 입양 여부에 대하여 결정하여야 하는 새로운 괴로움이 따를 것이고, 이이를 키우는 동안 맺은 정을 떨쳐 버린다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입양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경우가 올 수 있다는 생각과 무엇보다도 남자 혼자 생업에 종사하며 핏덩어리에 가까운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내가 처한 현실로 보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해외입양을 결정한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최종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의 해외입양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홀트아동복지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 아이의 이름은 배난희(裵蘭姬)-

난초蘭- 계집姬-

蘭 : 난초는 온갖 풍상과 역경 속에 피어나는 우리나라 전래의 꽃임과 동시 꽃이 고아하고 향기가 그윽한 절개의 상징으로 조상들로부터 사군자 중에 가장 사랑을 받은 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姬 : 엄마의 이름(金順姬)중 마지막 姬자를 붙여주어 엄마를 기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뒷 글자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생년월일은 1975년 8월 18일- (홀트회에서 옮겨 적는 과정에서 6월 19일로 잘못 기재된 것으로 판단됨)

기타 태어난 장소 등 아기에 대한 나머지 정보들을 홀트회에 제공한 것으로 생각나지만 정확하게 어떤 정보를 어떤 내용으로 제공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늙으신 홀어머님이 당신께서 직접 난희를 키우겠다고 하시며 해외 입양을 만류하셨지만 저는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난희를 떠나보냈고, 이후 난희의 해외 입양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것도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홀트회에 문의를 하게되면 전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냉랭하고 사무적인 메아리로만 되돌아 올 뿐 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난희의 해외입양 생활에서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낸 후 괴로운 심정으로 한 달 정도를 술로 살았습니다. 날이 새면 아내생각, 그리고 술이 깨면 난희 걱정,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자책의 괴로움을 이겨낼 수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의 환영으로 잠을 이룰 수 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불러 댔고, 차츰 멀어 가는 아내를 따라가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폐인이 되어 가는 아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셨는지 늙으신 어머님께서 상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 몇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나와 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성과 냉정을 되찾게 되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나의 앞날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는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여 재혼도 하였고 새로운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게 되었습니다.

재혼 이후 열심히 노력한 20여 년,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었고, 해외입양을 떠나보낸 난희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하는 정신적인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다시 찾은 홀트회는 모습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우선 사무실의 규모도 그전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 같았고 담당직원은 종전과는 달리 나의 질문에 대하여 비교적 성실한 것 같았습니다. 확인된 것은 난희가 프랑스로 입양되었지만 나머지 사항들은 자신들로서도 알 수 없다는 답변과 프랑스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라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입양아의 현실과 난희나 양부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아무리 친부모라 해도 먼저 찾는다는 것은 아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충고도 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입양아들이 대부분 여름철에 고국을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여름철 씨즌이 오기 전에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아시는 신부님께서 프랑스에 방문할 일이 있으시다 하여 사정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마침 파리 시청에 아시는 분이 있어 프랑스 방문기간 동안에 한번 알아보겠다 하시어 난희의 인적사항과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회(당시회장, 미쉘 수스만스키)에 대한 알고 있는 정보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하셨지만 그러나 딸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난희를 볼 수 있을 것인가?

▲ ⓒ김상수
그러던 2009년 9월 7일, 뜻 밖에도 홀트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난희가 지금 한국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니면,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난희가 한국에 와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난희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일생 최대의 신선한 충격으로 자극되어 한없는 눈물이 나오기만 합니다.

난희와 나는 9월 28일 홀트회의 주선으로 상면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난희는 그 때까지 한국을 여행한다는 것이고 누구의 안내로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난희가 한국에 와 있는 현실에도 지금은 아버지로써 딸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홀트회에 문의해 보아도 난희와 관련된 정보 등을 알려 줄 수가 없고 상면 시에 직접 확인하라는 답변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이름까지도 말입니다.

컴퓨터를 열심히 뒤졌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쓰신 프레시안에 칼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있는 난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가슴이 벅차 있습니다. 그동안 꿈속에서나 상상했던 사랑하는 나의 딸 난희를 그려보며 직접 만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 동한 외로운 이국땅에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응어리진 것을 가슴에 앉고 있었을 난희의 원망스런 시선 앞에 나서서 용서를 빌기가 한없이 두렵기만 합니다.

나는 이것을 감수함과 동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 소통의 장벽 속에 난희를 떠나보낼 수뿐이 없었던 절박한 당시의 상황을 꼭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사 난희를 맞나보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난희의 훌륭한 모습을 이미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난희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 했고,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언어의 장벽으로 모두 전달되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몇 마디의 이야기로 전해줄 수 없었던 사연들은 진한 핏줄이 모든 것을 덮어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칼럼에 게재된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눈매는 나를 닮은 것 같지만 입 주변의 모습들은 엄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생시에 좋아했던 진달래색 립스틱을 난희도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난희의 모습을 선생님이 쓴 칼럼 속에서 다운로드 하여 지금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놓았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내고 난 겨울 석유난로가 전복되는 주인집 화재사고로 가옥 전체가 소실되고 방안의 가재도구도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이때 나의 사진들도 함께 불타 버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언제든지 귀여운 난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난희 엄마의 생전모습을 직접 본 것 같아 무척 행복합니다.

이제는 난희를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주시고 보살펴주신 프랑스에 계시는 양부모님을 찾아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대견스런 난희의 발전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두서없는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배 광 옥 올립니다."

오는 9월 28일, 34년간 그 기나긴 간난(艱難)의 세월을 지나 드디어 두 사람은 절절(切切)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분들의 상봉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베를린에서

김상수/ 작가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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