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글과 함께 하단에 있는 '강의 듣기' 서비스를 통해 생생한 육성 청취도 가능합니다. 이번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선학태 전남대 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
갈등과 전략적 선택
독일은 합의제 정치시스템을 작동시켜 민주주의가 모범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실 전후 독일이 경제번영과 통일 대업을 달성한 게 이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이 우리의 주목을 받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독일 정치가 처음부터 민주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사회갈등과 분열로 바람 잘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그를 지지한 북부 독일지역과 가톨릭을 사수하는 남부독일로 양분된 독일의 분열상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 이념갈등, 노사갈등, 독일 북부와 남부의 지역갈등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종교적 이념적 계급적 지역적 갈등과 분열에 따른 독일사회 해체를 우려하는 나머지, 이에 권위주의 리더십과 철혈통치로 대응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갈등과 분열의 정치가 격렬하게 소용돌이 쳤으며 이는 히틀러 나치에 의한 반노동적 반사회주의적 극우 정권의 길로 이어지는 씨앗이 됐다.
이처럼 독일 정치사는 순탄하지 않았고 혼란과 난맥상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통치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독일이 어떻게 오늘날 정치안정을 구축하고 경제적으로 '라인강' 기적을 이룩하여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옛 서독의 합의제 정치시스템에서 그 동력을 찾을 수 있다.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은 역사적 뿌리를 둔 사회갈등과 분열을 조정 관리하려는 옛 서독 정치인들의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합의제 정치시스템이란?
민주주의를 탐구한 레이파트 학파는 정치시스템을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경쟁'과 수(數)의 논리로 정치적 승부를 가리는 다수제, 다른 하나는 '더불어 사는 상생'을 지향하는 합의제이다.
▲ ⓒ독일하원 |
따라서 그 안티테제인 합의제 정치시스템에 독일 정치인들은 주목했다. 독일 합의제 정치의 본질은 권력분점·공유에 있다. 즉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에 소수파 정당들의 참여를 허용하는 시스템에서 사회의 다양한 이익이 대표되어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통합과 화합을 다지는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2표 연동형 혼합 선거제도
합의제 정치를 작동시키는 첫 단추는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이다. 비례성 선거제도는 사회분열과 갈등을 대표하는 정당체제, 정부형태를 규정한다.
이 점에 착안한 독일은 연방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제도로 '2표 연동형 혼합제'를 선택했다. 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조합이다. 전체 하원 의석인 656석의 절반은 328개 각 지역구 유권자의 제1투표 결과에서 최다득표자가 당선되고, 나머지 절반 의석은 각 정당이 16개 주(州)별 당원들에 의해 작성된 후보자 명부에 던지는 제2투표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부연하면 각 정당은 정당명부 투표결과에 따라 의석을 배분 받은 뒤 각 주의 득표율에 따라 주별 의석수를 각 주 지방당에게 할당한다. 그리고 주에 배분된 의석수에서 지역구 당선 의석을 뺀 나머지 의석이 후보자명부 순서에 따라 비례대표가 결정된다. 결국 정당득표율에 따라 정당의 총 의석수가 결정되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각 정당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정책 개발에 앞장서고 자연스럽게 정당 간 정책경쟁이 역동적으로 연출된다.
통상적으로 독일 유권자 10% 정도는 선거 전략상 교차투표를 행사한다. 즉 그들은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여 지역구에서는 기민연, 사민당 등 거대 정당 하나에게 투표하고 연립정부 구성을 유도하기 위해 제2투표를 자민당이나 녹색당과 같은 소규모 정당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군소정당의 난립에 따른 정국불안을 막기 위해 정당은 지역 선거구에서 최소한 3석을 얻든가 혹은 정당투표에서 전국 유효투표의 최소한 5%를 얻어야 하는 '배제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정당 난립을 막아 독일 정당정치를 안정시켜 주는 주요 장치이다.
다당제 하의 보수·진보 정당체제
선거제도에 매개되어 사회갈등구조를 대표하는 독일 정당체제가 창출되는 데 보통 6개 정도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한다. 보수진영에는 기독교 교리와 자유주의를 포괄하는 기독교민주주의를 표방하여 중산층과 노년층,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기민연, 바이에른 주에서 지지기반을 갖는 지역정당인 기사당이 있다. 이 두 정당은 보수 자매 정당으로서 줄곧 연방의회에서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또 신자유주의 깃발을 내걸고 상층 자본계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이 있다.
진보진영에는 전통적으로 사민주의를 신봉하며 프로테스탄트, 노동계층, 중소기업인 및 상인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사민당, 1980년대 중반 이후 환경·평화·반핵 등 탈물질주의 가치를 기본 강령으로 내걸고 좌파의 젊은 층과 지식인층을 주요 정치고객으로 하는 녹색당, 사민당의 우경화에 실망하고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고 절규하는 순수 케인즈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주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옛 동독지역에 폭 넓은 지지계층을 갖는 좌파정당 등이 포진하고 있다.
물론 사회갈등구조에 따르는 정당지지 양상은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다소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사민당에 대한 노동자의 지지가 감소하고 가톨릭교도의 기민연에 대한 지지 역시 감소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독일의 정당체제는 대체로 여러 이념 가치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구도인 '다당제를 하부구조로 하는 보수-진보 정당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이로써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간 권력분점이 이뤄지고 특히 사회적 소수와 약자에게 일정한 권력 지분을 보장하는 정당 공간이 마련되어 계급·계층·이념 갈등을 조정하는 토대가 구축된다.
연립정부: 정당 간 권력분점의 제도화
독일 다당제에서 두 거대 정당인 기민연과 사민당 중 어떤 정당도 하원에서 절대 다수는 말할 나위도 없고 과반수 의석조차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패권 정당이 없다는 얘기다. 어떤 정당도 독자적으로 정권을 창출할 수 없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정책·가치 스펙트럼 상 동류에 속하는 정당 간, 아니면 좌파정당과 우파정당 간 연합정치가 선거 결과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연출된다. 예컨대 1998년 총선에서 승리한 사민당은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이른바 적·녹연정이, 현재는 기민당-기사당-사민당으로 구성된 '무지개' 대연정이 이뤄지고 있다.
연정은 주정부 차원에서도 다양하게 발생한다. 예컨대 연방 차원의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구성되었던 1998~2002의 기간에 베를린 기민연/사민당 대연정, 라인란트 사민당/자민당 연정, 바이에른 기민연/기사연 연정 등 주정부 차원의 다양한 연정이 이뤄졌다.
특기할 사실은 6~10% 정도의 지지율을 받는 자민당과 녹색당 등 군소정당이 연방 차원의 연립내각에 참여하여 일정한 권력 지분을 보장 받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1998년 이전까지 자민당은 기민연/기사연 주도의 연정 혹은 사민당 주도의 연정에 교대로 참여하여 외무부, 경제부, 재무부 등의 주요 각료직을 점유하곤 했다. 이로써 자민당은 독일의 경제정책과 외교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담보했으며 전략적으로 캐스팅 보터 역할을 통해 거대 양당(기민연, 사민당)의 정쟁이 정부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막고 국정운영에 탄력성을 제공하곤 했다. 바이에른 주의 유권자들로부터 절대적 지지(50~60%)를 받은 지역정당인 기사연 또한 기민연과의 연정에서 재무성, 교통성, 보건성, 농림성 장관을 점유하여 전국 차원의 정치적 결정에 참여한다.
통독 이후 연립정부에서 이러한 세력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연립 파트너 정당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이다. 특히 자민당은 환경테마 정당인 녹색당, 통독 후 급부상한 민사당에 위협받고 있다. 이처럼 군소정당들은 연정에 참여하기를 경쟁하는 가운데 거대 정당에게 흡수 통합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다.
독일 합의제 정치의 매력은 연립정부라는 정치적 참여제도가 사회의 분열된 이익과 가치를 조정 관리하는 정책레짐을 산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다수파가 반드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책 사안별로 연립정부가 유연하게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 특정 정당들 간 무한 대결을 피할 수 있다. 나아가 정당 간 연립정부는 곧 시민사회의 여러 집단 및 세력 간 연합으로 이어진다. 각 정당은 사회적 기반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도좌파정당(사민당)과 자유주의 정당(기민연 혹은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는 노동자의 실업과 파업을 막고 노사 갈등과 대립을 녹여내는 상생과 통합의 틀을 만들어낸다.
내각과 의회의 관계: 수상 우위의 이원정부제?
순수 의원내각제는 의회의 내각 불신임권과 내각의 의회해산권 간 서로 견제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의회와 내각의 권력균형이 유지된다. 독일 정부형태는 이러한 순수 의원내각제의 본질적 요소에서 다소 이탈하여 수상 우위의 이원정부제에 근접한 측면이 없지 않다.
첫째, 연방하원 의원과 이와 동수인 선거인단을 주 의회에서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연방회의에서 5년 임기로 선출되는 연방대통령이 존재한다. 그는 국군통수권, 계엄권을 갖지 않고 국민을 도덕적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연방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교권을 행사하며 연방하원에서의 다수당 대표를 연방수상으로 추천한 후 연방하원이 이를 연방수상으로 선출하면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정치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연방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정책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둘째, 연방수상은 연방대통령에게 연방각료의 임명과 해임을 제청할 수 있는데 연방대통령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인다. 연방수상은 권능이 큰 반면에 책임도 크다. 따라서 연방수상만이 의회에 책임을 지고 연방하원의 불신임 대상이 되며 연방각료들은 수상의 진퇴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한다. 이는 연방수상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대(對) 우위 현상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셋째, 연방수상은 의회해산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연방대통령에게 그것을 건의할 뿐이다. 결국 의회해산권은 연방대통령이 갖는다. 의회의 내각불신임 조치도 연방대통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내각과 의회의 상호 견제기능은 연방대통령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 때문에 독일 연방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넷째, 연방대통령이 상징적인 국가원수라면 연방내각은 국가의 실질적인 최고 정치행정기관이다. 이에 따라 연방수상 중심의 행정권이 의회 권한보다 우위에 있는데 흔히 이를 수상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는 연방헌법에 근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데나우어(1949~63)와 콜(1982~98)과 같은 연방수상 개인의 카리스마, 연방하원 선거결과, 분단과 통일과 같은 독일의 특수상황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서 지적한 '배제조항'과 더불어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작동시키는 주요 장치는 '건설적 불신임투표제'이다. 즉 연방하원은 의원과반수의 찬성으로 후임 수상을 선출한 후 연방대통령에게 현직 연방수상에 대한 불신임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제도에 따라 과거 수상이 교체된 경우는 1982년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연정으로부터 탈퇴하고 기민연과 동조하여 기민연의 당수인 헬무트 콜을 후임 수상으로 선출하고 슈미트(1974~82) 수상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사례이다.
오케스트라 화음(和音)의 정치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은 기능적으로 연계된 제도적 매트릭스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사회의 다양한 집단, 계층, 지역의 '동등하고 효과적인'인 정치참여가 이뤄진다. 특히 소수자, 시장의 실패자나 사회적 약자에게도 의사결정 과정에의 참여를 허용하는 제도적 인센티브를 갖는다. 이 같은 독일 절차적 민주주의는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신장하는 정책콘텐츠를 산출하여 실질적 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진다. 선순환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다양한 이익·가치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화합과 통합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양한 악기들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다사불란(多絲不亂)의 오케스트라 화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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