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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는 어떻게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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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뉴질랜드는 어떻게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성공했나?

[정치개혁 강좌]<7> 선거제도 개혁의 조건

<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글과 함께 하단에 있는 '강의 듣기' 서비스를 통해 생생한 육성 청취도 가능합니다. 첫번째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지난 <5>편에서는 우리가 합의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가기 위해서는 그 첫 단계로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함을 강조했다. 기왕이면 비례성에 더하여 지역대표성까지도 보장해줄 수 있는 선거제도가 최선의 것임은 물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거제도가 바로 독일식 연동제임을 확인했다. 실제로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비례성은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그리고 그 지역대표성은 전면 소선거구제에 버금갈 정도로 높다. 선거제도의 개혁을 시도했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제도가 항상 도입 고려 대상의 최우선순위에 오르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도입에 성공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은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만이 아니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선거제도의 개편은 그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위 '자기 보존의 철칙'(iron law of self-preservation) 때문이다. 현직 국회의원들은 누구나 기존 선거제도에 의해 당선된, 말하자면, 현 제도의 수혜자들이다. 특정 제도의 수혜집단은 여간해선 스스로 그 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이라고 다를 까닭은 없다. 그들도 자기 보존에 힘쓰며, 따라서 위험하거나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회피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지역구 상대다수제인 선거제도 하에서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에) 당선에 필요한 정도의 안정적인 지지 그룹을 자기 지역구에 확보하고 있는 의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별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낙선의 위험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롭다. 자기 지역구에 특화된 일종의 '정치자산'을 상당히 쌓아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원들이 그 소중한 자산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새로운 선거제도의 도입에 쉽게 찬성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선거제도의 개편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어려운 개혁 과제로 분류된다.

결국 선거제도의 개혁은 국회 바깥에서부터의 개입이 이뤄지거나 압력이 가해져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체제 조건이 동일한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외부 압력은 당연히 국민의 개혁 요구이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개혁 요구가 국민으로부터 분출된다면 국회의원들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설령 기존의 선거제도가 객관적으로는 아무리 나쁜 제도임에 분명하다할지라도 국민의 개혁 요구가 그렇게 강력해지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8>편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정부에 대한 국민의 정책 혹은 제도 개혁 압력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야 비로소 충분히 강력해진다. 하나는 정치정보(political information)의 확산이다. 기존의 제도나 정책의 문제점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대안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을 채택할 경우 과연 얼마나 뛰어난 개혁 효과가 나타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국민 사이에 널리 알려져야 국민의 개혁 요구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쳇말로 '뭘 모르는데' 무슨 구체적인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개혁 여론의 동원과 결집이다. 조직되지 못한 대집단으로서의 일반국민은 설령 정치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더라도 자기 자신들만으로는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개혁 요구를 표출해내지 못한다. 소위 '집단행동의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앞장서서 그들의 요구를 하나로 결집해내고 그 여론의 구심점 역할을 해주어야한다.

그런데 이 두 조건의 충족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학에서는 이 어려운 일을 수행해내는 이들을 통상 '정치기업가'(political entrepreneur)라고 부른다.(주1) 그들의 정치기업행위에는 개혁 관련 정보의 제공 및 확산, 개혁 여론의 동원과 결집, 그리고 그렇게 집약된 국민 선호의 정치적 대변 등이 포함된다. 결국 선거제도 개혁의 성공 여부는 상당 부분 이러한 정치기업가의 등장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선거제도의 개혁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유능한 정치기업가는 쉽게 나오지 않는 법인 듯하다.

체제전환국이나 신생 민주국가가 아닌 경우에서 (상당 기간 민주적으로 운영돼오던) 선거제도를 개혁한 사례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우연히도 1990년대 중반, 뉴질랜드, 일본, 이태리 등의 세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선거제도가 개혁되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섞여있는 혼합형 선거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이 동시에 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는 독일식 연동제를 도입하는 데에 성공한 나라는 오직 뉴질랜드뿐이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다른 두 나라에서도 최상의 제도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막상 도입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본 편에서는 유일한 '성공 국가'인 뉴질랜드의 개혁 사례를 살펴본다. 우리를 향한 시사점을 찾아보기 위함임은 물론이다.

▲ ⓒ뉴시스

뉴질랜드 구(舊)선거제도의 문제

선거제도 개혁 이전의 뉴질랜드 민주주의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표본이었다. 민주주의의 유형을 다수제와 합의제로 분류하는 데에 성공한 레입하트는 뉴질랜드를 원조인 영국보다 더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의 원형에 가까운 나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5대 특성이 원형 그대로 나타났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정당체계는 중도 좌파인 노동당과 중도 우파인 국민당이 중심이 되는 양당제, 행정부는 단일정당 형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권력관계는 압도적인 행정부 우위,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익집단들 간의 경쟁은 다원주의적 패턴이 유지되는 민주체제였던 것이다.

뉴질랜드 민주주의의 문제들은 사실 다수제 민주주의라면 어디서나 발생 가능한 것들이었다. 크게 세 가지가 핵심 문제였다. 첫 번째는 "선거에 의한 독재권력"(elective dictatorship)을 행사한다고 비난받을 만큼 독선과 독주를 자행하곤 했던 막강한 권력을 가진 행정부였다.(주2) 말하자면 지지층이나 일반국민의 선호와 정부의 실제 정책 간에 심각한 괴리가 자주 발생한 것이었다. 국민 여론을 거스르는 행정부의 독선적 정책 수행의 예로 뉴질랜드인들이 가장 많이 꼽는 것은 1984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과감하게 진행된 뉴질랜드 정부의 신자유주의화 추진이다.(주3)

사실 이 사례는 그 이전에 이미 발생한 다른 (지지층의 선호와 정부정책 간의) 괴리 상황과 연결된 것이다. 그것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국민당 정부의 소위 '좌경화' 정책이었다. 1975년에 정권을 잡은 국민당은 (1970년대 초의 세계적 유류파동 이후 매우 심각해진) 뉴질랜드의 경제 불안 상태를 극복함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당시의 멀둔(Robert Muldon) 수상이 채택한 경제 난국 타개책은 기본적으로 케인스주의적인 국가개입 정책이었다. 국민당 정부로서는 그저 실용적인 정책을 택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었겠으나, 그것은 명백히 당의 우파적 전통에서 벗어난 정책 기조였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우회전 깜빡이 키고 좌회전 한' 사례였던 것이다. 경제계 및 농업 섹터를 포함한 많은 국민당 지지자들이 배신감과 불만을 토로했음은 물론이었다.(주4)

뉴질랜드의 신자유주의화는 거꾸로 된 상황이었다. 1984년에 비로소 집권한 노동당은 이전 세 차례(1975, 1978, 1981)의 총선 승리로 연속 집권한 국민당의 국가개입 정책과 통제적 경제운용 그리고 그에 따른 재정적자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좌파적 입장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채택했다. 그리고 1987년에 재집권해서도 그 신자유주의화를 계속 추진해갔다. 이는 '좌회전 깜빡이 키고 우회전 한' 역 사례의 발생이었으며, 이것이 노동당 지지자들의 불만을 초래했음 역시 물론이었다. 이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는 1990년과 1993년에 집권한 국민당 정부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국민당의 일부 지지 세력들에게는 환영받을만한 일이었는지 몰라도 일반국민에게는 별로 그러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약속했던 거시경제 개선 효과 등을 내지 못한 신자유주의화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이를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해간 것이다.

이 긴 기간 동안 연속하여 발생한 이 일들은, 요컨대, 지지자들의 정책 선호와 무관하게 혹은 그것과 어긋나게 운영되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국민 여론과 괴리된 정책 기조를 고집하는 정부의 독선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들이었다. 흔히들 다수제 민주주의 장점은 한 정당이 단독 정부를 구성하여 안정적인 의석 기반 위에 주어진 임기 동안 소신껏 그리고 효율적으로 국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단점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다수제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행정부의 안정적인 승자독식적 권력은 집권당으로 하여금 정책수행에 있어서 여론의 추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하는 단일 집권정당은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정책 추진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이제 많은 뉴질랜드인들은 보다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부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 때 사회적 화제로 떠오른 것이 레입하트가 구분한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차이라고 한다.(주5) 시민들 사이에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며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갔다는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과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논쟁도 이 합의제 민주주의 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뉴질랜드의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발생한 두 번째 문제는 양당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양대 정당만으로는 다양한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태가 됨으로써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당지지 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각종 통계를 보면 1930년대부터 확립된 양당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사실상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약화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72년 총선 당시 노동당과 국민당 양대 정당의 득표율 합은 90%였다. 그것이 1978년 총선에서는 80%로 내려가 1987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1980년대 내내 그 상태가 계속됐다. 그리고 1993년의 총선에서는 마침내 70% 이하로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전통적 정당지지 구조의 약화는 결국 다른 정당들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978년의 총선에서 사회신용당은 16.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가치당이 획득한 2.4%를 더하면 양대 정당이 아닌 제3당들이 20%에 육박하는 지지를 얻은 셈이다. 1981년의 총선에서는 사회신용당이 무려 20.7%의 높은 득표율을 보여주었다. 이 추세는 1984년 총선까지 이어졌다. 뉴질랜드당이 12.3%를 확보하고 사회신용당이 7.6%를 얻는 등 이 때 제3정당들의 득표율 역시 20%를 넘어섰다. 비록 1987년 총선에서는 양당제로 회귀하는 듯한 양상이 나타났지만 1993년에 가서는 다시 동맹당(18.2%)과 뉴질랜드제1당(8.4%)의 득표율 합이 26.6%에 달하는 상황으로 돌아갔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1970년대 말 이후 시작된 양대 정당 회피 혹은 제3정당 희구 경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것이다. 양대 정당제를 특성으로 하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세 번째 문제는 바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최대 문제인 비비례성이었다. 그 문제가 뉴질랜드 사회에서 매우 뚜렷하게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970년대 말이었다. 상기한 대로 그 당시부터 새로운 정당을 원하는 유권자들이 증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하에서는 지역구 기반이 취약한 신생 소정당들이 도대체 그 염원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신용당이 1978년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은 16.1%였다. 그러나 의석은 총 92석 중 고작 1석(의석 점유율 약 1%)뿐이었다. 1981년 선거에서는 20.7%의 득표로 총 95석 중 겨우 2석(의석 점유율 약 2%)을 건질 수 있었다. 사회신용당만이 아니었다. 다른 제3당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84년의 총선에서 12.3%를 득표한 뉴질랜드당은 한 석도 차지할 수 없었고, 1987년 5.7%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 역시 의석수는 제로였다. 소정당들 모두가 심각한 비비례성이 초래하는 과소대표 현상으로 인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반면 양대 정당들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예컨대, 1993년의 총선에서 두 정당의 득표율 합은 70%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의석 점유율 합은 약 96%(총 99석 중 95석)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선거개혁 논쟁이 불거진 것은 제3당들의 과소대표 문제보다는 양대 정당들 사이에서 일어난 '제조된 절대다수'(manufactured majority)의 문제였다. 문제를 제기한 측은 노동당이었다. 노동당은 1978년과 1981년 총선 모두에서 국민당에 앞선 득표율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석은 오히려 국민당에게 더 많이 돌아갔고, 따라서 국민당 정권이 두 차례나 더 계속됐다. 1978년 선거에서 노동당과 국민당의 득표율은 각각 40.4%와 39.8%였으나 의석수는 각각 40석과 51석으로 국민당이 오히려 크게 앞섰다. 1981년 선거에서도 노동당의 득표율은 39%로 국민당의 38.8%보다 많은 것이었지만 의석수는 국민당 보다 5석이나 적었다.

노동당이 이 두 차례의 선거 결과를 문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 선거제도 개혁 문제가 마침내 정치적 어젠다로 부상하게 되었다. 노동당 내에서 특히 이 문제의 공론화를 주도해간 사람은 법학교수 출신인 제프리 파머(Geoffrey Palmer)였다. 예를 들어, 그가 학계를 떠나 노동당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며 출판한 『굴레 풀린 권력?』(Unbridled Power? Oxford University Press, 1979)은 뉴질랜드의 정치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비례대표제의 도입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 책으로서 그것은 뉴질랜드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주6) 과소대표나 과다대표 등과 같은 선거 결과의 불합리성을 장기간 목도해온 일반 국민에게도 선거제도에 관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의 쟁점화는 비교적 쉽게 일어났다. 특히 노동당 지지자들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점차 강력하게 요구해갔다.

선거제도 개혁 과정

1978년의 어이없는 집권 실패 후 노동당은 바로 1981년의 총선 공약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위원회' 설치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상기한대로 1981년에도 역시 억울한 집권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자 다시 선거제도의 개혁 추진을 1984년의 총선 공약으로 발표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에 정권을 잡게 된다. 이제 6년에 걸쳐 지속해온 집권공약을 실행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Electoral System)였다.

사실 노동당 소속 의원들의 대다수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전면 개혁에는 반대했다. 주지하듯, 기본적으로 그 선거제도는 (국민당에게만이 아니라 노동당까지도 포함된) 대정당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선거제도의 도입보다는 기존 제도의 부분적 보완 정도를 원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에서 어긋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왕립위원회의 설립을 당시 법무장관을 맡고 있던 파머가 담당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선거제도 개혁 추진을 일종의 소명으로 여겼던 파머는 당이나 의원들의 개인적 이해관계 보다는 제대로 된 개혁을 더 중시했으므로 왕립위원회에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그 구성원들도 매우 유능하고 독립적이며 공정한 인물들로 엄선했다.

드디어 1986년 왕립위원회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도입 여부는 1990년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노동당 일반 의원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반 의원들뿐만이 아니라 지도부의 다수도 이 안에 찬동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예의 그 자기보존의 철칙이 작동된 것이었다. 결국 당시의 노동당 정부는 왕립위원회의 최종 제안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까지도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만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영역에서의 선거제도 개혁 운동이 시작됐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1987년의 총선이 다가왔다. 유세 기간 중 노동당의 랭(David Lange) 수상은 TV 인터뷰에서 재집권을 하게 되면 왕립위원회의 안대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비록 나중에 이 발표는 수상이 자신의 노트를 잘 못 읽은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어쨌든 그것은 노동당의 공약이 되었고 그로 인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국민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노동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권기간 내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하여는 여전히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노동당 내부 당론으로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불가하다는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 반면, 시민사회에선 개혁 여론이 계속 확산돼갔다. 왕립위원회의 제안 당시만 해도 국민의 거의 모두가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였으나 불과 2~3년 사이에 그 제도의 도입에 찬성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 1989년의 한 여론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45%가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찬성하고 다른 45%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사이에 개혁 여론이 어느새 찬반으로 양분될 정도로까지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국민당은 1990년의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 정부가 1987년의 공약을 위반하였음을 크게 문제 삼으며 자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국민투표를 반드시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국민당 의원들의 대다수도 노동당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폐기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이러한 공약을 내세운 것은 설령 국민투표를 실시할지라도 기존 제도를 유지하자는 쪽이 우세할 것을 확신했음으로 그 공약을 통해 그저 노동당을 비난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주7)

1990년 국민당은 만 6년 만에 다시 정권을 탈환한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국민당 정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권 직후에 실시한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65%가 비례대표제를 선호하는 반면 오직 18%만이 기존 선거제도의 유지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에 대한 지지가 크게 상승한 것에 당황한 국민당은 국민투표는 공약대로 실시하되 그 방식은 왕립위원회의 원안보다 까다롭게 수정하기로 결정한다. 즉 단순히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 여부를 단 한 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 묻는 대신 다음과 같은 두 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단계적으로 파악하겠다는 것이었다. 우선 구속력이 없는 1차 국민투표에서는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지지여부를 묻고, 이어서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는 유권자들까지도 포함하여) 단기이양식투표제(STV), 선호투표제(PV), 보완비례대표제(SM),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의 네 가지 대안 제도 중 하나를 택하게 한다. 2차 국민투표는 1차 국민투표에서 개혁에 대한 지지가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될 경우 1993년의 총선과 함께 실시하되 거기서는 1차 국민투표에서 가장 많이 선택된 대안 제도와 기존 제도를 놓고 그 중 하나를 택하는 양자택일 방식으로 최종 선거제도를 결정한다.

국민당 정부가 국민투표 방식을 이렇게 복잡하게 수정한 이유는 당연히 기존의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차 국민투표에서 제시한 여러 대안 선거제도들은 사실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도 어려운 매우 생경한 제도들이었다. 유권자들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현상 유지 쪽을 택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었다.(주8)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유권자들의 독일식 비례대표제에 대한 선호는 명료하게 표출됐다. 1992년 9월에 실시된 1차 국민투표에서 투표자의 84.7%는 개혁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개혁 지지자들의 70.5%는 그 네 가지 대안 중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자신의 선호인 것으로 표시했다. 이것으로 구속력이 있는 2차 국민투표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를 놓고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2차 국민투표가 있던 1993년 11월까지의 약 1년 2개월 동안 뉴질랜드 사회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 논쟁으로 뜨거웠다. 찬반 여론이 시소게임을 벌이던 끝에 드디어 투표는 실시됐고, 그 결과는 53.9%가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찬성하고 46.1%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뉴질랜드의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전격 교체된다. 새로운 제도로 치러진 첫 선거는 1996년 총선이었다.

개혁 추진 세력

앞서 지적한대로 선거제도 개혁의 성공 조건을 갖추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가 적극 나서서 정치정보를 확산하고, 개혁여론을 동원·결집하며, 그 여론을 그대로 정치과정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제대로 된) 선거제도의 개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뉴질랜드에서는 누가 그러한 '정치기업행위'를 했을까? 물론 여러 사람과 여러 단체의 협업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로는 의당 노동당 국회의원인 제프리 파머가 꼽혀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뉴질랜드 다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파머는 상기한 바와 같이 1978년과 1981년 노동당이 다수제 선거제도로 인해 억울한 집권 실패를 거듭하자 아예 정계에 입문하여 저술뿐 아니라 의정 활동을 통해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정치기업행위를 펼친다. 또한 왕립위원회가 당과 정부 내외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롭게 업무수행을 할 수 있는, 그리하여 과감한 개혁안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사람도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그였다.

다음으로는 '선거제도개혁연합'(The Electoral Reform Coalition, ERC)이라는 시민단체를 꼽아야한다. 이 단체는 1986년 왕립위원회가 선거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한 직후에 출범하였다. ERC의 운동 목표는 간단한 것이었다. 즉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국민투표를 통해 도입하자는 왕립위원회의 제안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ERC의 초기 주도자들은 주로 노동당 활동가들이었으나 그들은 곧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는 개혁단체를 만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회원은 역시 소정당 소속 활동가들이었다. 특히 (사회신용당의 후신인) 민주당과 (녹색당의 전신인) 가치당, 그리고 신노동당 사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앞서 1986년 이후 수년 만에 개혁 지지 여론이 노동당 및 국민당 정부를 당황시킬 정도로 커졌다고 했는데, 그 같은 여론 확산은 상당 부분 ERC의 공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ERC는 1993년까지 '열성 회원'이 수천 명에 이르며, 전국 각 도시에 지부가 있는 대 조직으로 발전한다. 자금 부족 문제가 심각했으나 그것은 인적 자원 확충으로 보충해갔다. 수년에 걸친 다양한 차원에서의 지속적 모임을 통해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간다는 것이 ERC의 기본 전략이었다. ERC의 슬로건은 "make your vote count"였다. 직역하자면 "당신의 표를 셈에 넣게 하라"는 것인데, 이는 사표 발생으로 인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비비례성 문제와 그러한 문제가 없는 비례대표제의 장점을 동시에 부각하는 매우 효과적인 운동 표어였다. 말하자면 유권자들로 하여금 선거제도의 개혁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좌표역할을 한 것이었다. 1992년의 1차 국민투표 당시 많은 유권자들이 그 복잡한 여러 대안들 사이에서 별 혼동 없이 독일식 비례대표제에 몰릴 수 있었던 것은 수년에 걸친 ERC의 단순명쾌한 공식 입장, 즉 독일식 비례대표제에 대한 지지가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주9)

세 번째로 지목하고 싶은 것은 소정당들 간의 선거연합이다.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국민당이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를 선호한 것과 달리 소정당들은 당연히 독일식 비례대표제에 커다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민주당, 녹색당, 신노동당 등을 포함한 5개 소정당들은 드디어 1992년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공동 목표로 하는 선거연합을 구성한다. 많은 나라에서 비교적 흔히 목격되는 '정책연합'이 아니라 '제도연합' 방식으로 정당연대를 구축한 것이었다. 첫 성과는 1992년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인 오클랜드 지방 선거에서 나타났다. 참여 정당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는 지방의회 의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제도연합체는 1992년의 1차 국민투표 당시에도 조직적 지원을 적극 제공함으로써 개혁 달성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그 외에 노조와 언론매체의 개혁 활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뉴질랜드 노동연맹과 그 후신인 뉴질랜드 노조위원회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적극 지지했으며 ERC의 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언론의 정보 제공 기능이 없었다면 뉴질랜드의 개혁 성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적극적으로 개혁을 지지한 언론매체가 뉴질랜드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보수 성향의 일간지인 뉴질랜드 헤랄드(New Zealand Herald)와 그 자매 주간지인 리스너(Listener)였다는 점이다. 이 신문들은 사설이나 기획기사 등을 통해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개혁 운동을 지원했다. 정통 보수로서 공정성의 가치를 강조한다는 것이 지지의 변이었다.

선거제도 개혁 이후

끝으로, 본편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지만,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총선을 치르게 된 1996년 이후 뉴질랜드의 민주주의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비례대표제에 의한 선거정치가 양대 정당제가 아닌 온건 다당제의 정당정치를 가져왔으며 정부형태도 단일정당정부에서 연립정부로 바뀌어갔다.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도 힘의 균형이 잡혀가고 있다. 요컨대,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뉴질랜드의 자본주의 유형에도 일정한 변화를 주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지속될는지는 아직 더 두고봐야하겠지만, 뉴질랜드의 자본주의는 분명 더 이상 과거의 자유시장경제체제인 것은 아닌 듯하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뉴질랜드 정부는 노동, 조세, 복지, 공공부문 등의 제 영역에서 과거(1984-1996)의 신자유주의 노선과는 정반대되는 개혁정책들을 채택했다. 어쩌면 <2>편에서 설명한 합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조정시장경제 사이의 상보성이 서서히 작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찌 부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합의제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그것이 다시 합의제 조정시장경제의 발전으로 이어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온 열정을 불사르는 정치기업가의 등장을 바라마지 않는다.

주1) 영미권 정치학계에서 고안된 'political entrepreneur'라는 개념을 '정치기업가'로 직역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에서는 '정치'는 물론 '기업가'라는 단어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고민은 <8>편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주2) R. Mulgan. 1992. "The Elective Dictatorship in New Zealand." in H. Gold ed., New Zealand Politics in Perspective (Auckland: Longman Paul, 1992)

주3) Jack Vowles, 1995. "The Politics of Electoral Reform in New Zealand," 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6, no. 1.

주4) 후술하겠지만, 이후로도 좌경화를 계속해간 국민당은 결국 1978년과 1981년의 총선에서 노동당보다 적은 득표율을 기록한다. 다만 선거제도의 비비례성으로 인해 의석을 더 많이 차지함으로써 재집권에 연속 성공했을 뿐이었다.

주5) Jack Nagel, 1994 "What Political Scientists Can Learn from the 1993 Electoral Reform in New Zealand" PS: Political Science and Politics vol. 27, no. 3. p. 527

주6) Vowles(1995, 100)

주7) Vowles(1995, 103-104)

주8) Vowles(1995, 104)

주9) Nagel(1994,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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