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줄곧 글을 쓰거나 방송을 하면서 살아 왔지만 여전히 글을 읽고, 방송을 하는 게 두렵다. 거의 매일이다 싶은 하루하루의 마감을 위해 MS워드의 백지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을 때면 A4 새 복사용지 마냥 머리가 텅 빈다. 나를 향해 있는 카메라 탈리의 불빛이 반짝 들어 오고 모니터에 내가 원샷으로 잡힐 때도 그렇다.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힌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글쓰기가 어렵다. 할 말이 많아질수록 자꾸 방송에서 더듬는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요즘 내가 제일 쓰기 어려워 하거나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기획서라는 것이다. 파워 포인트로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해야 하는 기획서. 예컨대 드라마 기획서, 영화투자 기획서, 사업계획서, 프로젝트 투자개발 제안서, 마케팅 계획서 등등이다. 예전에는 이런 것을 글쓰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밥벌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 그러니 까짓것 왼쪽 눈 감고, 한손으로 뚝딱 하면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더 깜깜이다. 하면 할수록 더 쓰기 힘든 게 이런 것들이다. 지금 하려고 하는 프로젝트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형식이 무엇인데 거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고 또 얼마나 벌어들일 수 있는 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과 단순한 도식이 대귀가 이루도록 하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머리속에서 프레임이 잘 짜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류 작성이 잘 안되고 어려운 진짜 이유는 어쩌면 이 '따위'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상한 관념의 똥덩어리가 내 머리 속에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건 진짜 지식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 창작하는 사람들은 원래 이런 걸 잘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 이런 건 비즈니스하는 사람들이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 그런 똥덩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과 같은 잔인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진짜 예술은 돈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예술만 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똥 같은 일이다. 반면에 돈만 벌려고 하는 것 역시 돼지 같은 일이다.
▲ 바더마인호프 |
울리 에델이 만든 야심작 <바더 마인호프>를 보면서 중간중간 기묘하게도 픽픽 웃음이 나왔던 대목은 영화속 적군파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라입트로이)나 구드룬 엔슬린(요한나 보칼렉)이 핏대를 올리며 기성세대나 제도권의 관료, 은행가, 정치인들을 향해 개나 돼지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러긴 했다. 하지만 계급의 진짜 적과 동지를 기계적으로 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이른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1970년대 당시 적군파들의 모습은 차라리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래서 '좌빨'을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적군파 같은 극렬 좌파의 몰락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은 좌의 세상이 될 수 없다는 식의, 역설적인 우파 프로파간다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딱 이 시대가 좋아할 영화인 셈이다. 왜 저렇게들 유연하지 못했을까. 왜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을까. 뭐 그거야 어찌 됐든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세상 일이라는 게 이념,생각,예술의 과잉만으로든 반면에 자본의 과잉만으로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덥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른다. 워낙 땀이 많은데다 두한증(頭汗症)까지 있어 온 몸이 마를 날이 없다. 머리는 늘 축축한 채, 땡볕 아래에서도 뽀송뽀송한 머리칼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히 얄미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이런 더위의 와중에 세상은 더 뜨겁다. 빌 클린튼은 북한을 다녀왔고 조오련 씨가 갑작스럽게 죽었으며(아시아의 물개라 불렸던 그는 적어도 심장마비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그때문이다.)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가 간신히 재가동을 시작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툴툴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어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버렸다.
더 덥다. 세상을 생각하면 더 덥다. 지금의 세상엔 그늘이란 걸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간자들을 위한 그늘.
미디어법 개정 찬성의 선두에 서있는 한 선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미디어산업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는 현재 새로운 종편채널 설립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다분히 생존적이다. 그는, 사람이란 어느 쪽 생각을 가졌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게임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라는 것 때문에 오랜 기자생활을 한 후배 한명은 신문사를 때려 치우고 나왔다. 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종편채널을 준비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그런 상황들을 견디지 못해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지금 세상은 두 사람을 화해시킬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늘. 중간지대의 그늘. 클린튼과 김정일은 만나는데 우리는 왜 이러고들 사는 걸까.
헌법재판소에서 계류중이긴 하지만 사실상 통과된 것처럼 보이는 새 미디어법이 시행되면 정말 국내 미디어 환경이 좋아질 것인가. 현장의 목소리는 극히 회의적이라는 점, 법을 만들고 정책을 만드시는 분들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다. 예컨대, 이런 상황들을 잘 알고 계실까.
일본 사케나 일본 소주를 좋아 하다가 문득 이걸 소프트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1년이 훨씬 넘은 얘기다. 실제로 기획에 들어간 것은 약 10개월 전. 그이고 결국 이 기획을 포기했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데는 도통 방송 편성을 따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편성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자금 여력이 있는 방송사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제작사의 돈은 계속 들어간다. 그동안 일본 이곳저곳을 답사하고 헌팅하느라 쓴 돈이 2,000만원 정도다. 경기가 극도로 안좋은 상황에서 협찬이나 지원은 전무한 상황인데다 환율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사전에 쓴 돈 말고도 앞으로 들어가야 할 제작비는 어림잡아 3,500만원 선을 넘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이 다큐를 납품할 방송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제작비는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결론은 버킹검이다. 이건 만들면 안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작사들로부터는 그 정도만이라도 '해피한' 일로 취급받는다. 외주제작사들이 방송사들로부터 그 같은 대우를 받는 일이야 이제 관행이 된 부분이고 그나마 방송 편성을 잡은 것이 어디냐는 것이며 어떻게든 협찬을 '땡기면' 공장은 돌아가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묻기 일쑤다. 제작사한다며? 그거 돈 돼? 안된다며? 살아지기나 해? 애들 월급은 주기나 하는 거고? 그러니까 왜 사서 고생을 해? 그만 때려쳐! 컨텐츠 프로덕션? 그거 한국에서는 꿈이라니까니!
법이나 나발이고 지랄이고, 밑에 상황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다. 개판 일보 직전인 것이다. 그러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한번 이 표현을 쓰나니, 사람들이여 관념의 똥덩어리는 이제 제발 그만 다 싸버리고 말았으면 좋겠다.
휴가철을 맞아 정치인들의 민생투어가 한창인 모양이다. 괜한 고생들 마시고 집에서 시원하게 영화나 좀 보시고 TV나 좀 보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영상산업 현장을 이해하는 데는 그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3.
모든 아빠는 화장실이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제작한 우루과이 영화 <아빠의 화장실>은 보면 그렇다. 이 영화에서는 유료 화장실을 만들어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아빠의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악독 같은 세관원에게 자신의 생명 같은 자전거까지 뺏긴 채 변기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군중을 헤매는 아빠의 모습에, 그동안 이 못난 아빠를 경멸해 왔던 딸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이 아이의 마음 속 태풍을 그 누가 달랠 수 있을까.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는 왜 아직 채 크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지옥도의 풍경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아빠는 기껏해야 화장실에 불과한 존재란 것을, 아니 어쩌면 화장실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앞으로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가게 될까.
▲ 아빠의 화장실 |
창녀만도 못한 세상이다. 아니 그런 말은 순수한 창녀들의 마음을 욕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루 열명 혹은 스무명의 '손님'을 받아가며 죽을 것 같은 고된 노동을 치르는 창녀들의 꿈은 정말 조그마한 것이다. 돈을 모아서 네일 숍에서 일할 수 있는 것, 오로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육체적인 것뿐이니 건전한 스포츠 마사지 일 같은 걸 하는 것, 빨리 돈을 모아서 복학하는 것, 그렇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결코 크지가 않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들은 창녀보다 못한 욕망으로 덧칠된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돈의 흐름은 건전한 문화사업을 육성하는데 도통 관심이 없다. 모두들 어느 자리에서쯤에선가 문학이 어쩌고 영화가 어쩌고 오페라가 어쩌고 할지는 모르지만 그 문화들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 자본의 끈기있는 뒷받침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내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들이다. 천박한 자본주의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꿈이 있었다. 앤디 워홀과 같은 '팩토리'를 만드는 것. 내가 앤디 워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에 그가 했던 것처럼 꿈의 예술공장을 만들어서 예술가가 되려는 사람, 그를 돕는 스탭, 또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그것을 만드는 것. 5명의 감독이 일을 할 수 있으면 100명의 스탭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생계는 유지해 가며 자신도 만족하고 세상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공장. 하지만 그 꿈의 공장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누군가가 나에게 얘기했다. 거 무슨 생시몽주의자도 아니고. 뭐야 당신?
이럴 때는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로 알려진 <그여자 작사 그남자 작곡>같은 영화만 봐도 눈물이 난다. 80년대에 가장 잘나가던, 2인조 보이밴드 멤버였던 주인공 알렉스(휴 그랜트)는 이제 놀이동산 무대에까지 서야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신세다.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 주인공 여자 소피(드류 배리모어)는 그러지 말라며, 당신의 노래는 언제나 훌륭했다고 말한다.
알렉스 노래의 첫가사는 이렇다. "오랜 세월을 뭐가 옳고 그른지 모르고 살았어요 / 직장도 없고 / 때론 주저앉아 울어버리죠." 왠지 이 장면은, 언제봐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누군가 또, 나에게 이런 얘기도 했다. 당신은 능력에 맞는 일을 해야 해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니까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것이에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누군가에게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을 뭐가 옳고 그른지 모르고 살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빠는 다 화장실일 뿐이라고. 그래서 그 어떤 일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고. 누가 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4.
결국 집을 내놨다. 지난 번 드라마를 만들면서 생기게 된 빚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해도 방법이 없다. 어차피 드라마로 인해 담보까지 잡혀있는 상태다. 공연히 헐값에 넘어가느니 맘 굳게 먹고 매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디 적당한 월세을 알아보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일단 마음은 가라 앉았다. 그러기 전까지는 드라마 제작 때 기용했던 프로듀서나 감독 모두에게 매일매일 가슴 속 비수를 날렸었다. 제작비는 크게 오바했고 작품은 엉망으로 나왔다. 제작관리를 하지 않은 프로듀서와 작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자기주장만 강했던 감독. 중간에서 이쪽저쪽을 왔다갔다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일삼았던 슈퍼바이저 등등.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마치 <거룩한 계보>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장기수로 복역하고 있는 순탄(류승용)이 된 기분이다. 순탄은 무등산 뭐라하는 상대파 보수의 허벅지를 일곱번 찔러 불구로 만드는 등 조직의 온갖 허드레 행동대장 일은 다 한 후 막 감방에 들어 온 동치성(정재영)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난 이제 원망이고 뭐고 없다. 여기선 그런 거 싹 잊고 산다."
하지만 난 성자가 아니다. 중간중간 아무래도 화가 치솟는다. 무엇보다 평소에 그렇게 '깎듯하게 모셨지만' 일부 매체의 사장님들이 작품값을 편당 100만원도 쳐줄 수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판매대행을 맡고 있는 측에게 불끈 화를 내기 일쑤다. "여보쇼! 편당 1억이 들어간 작품이요. 무슨 개똥값도 아니고. 아 안팔아. 절대 안팔아. 내가 이걸 그냥 무덤까지 가져가더라도 그 값엔 안팔아. 아니 못팔아. 그러면서 무슨 개뿔! 다들 콘텐츠를 개발한다 어쩐다, 미디어산업을 부흥시킨다 어쩐다 지랄들인지 원." 틀린 말인가? 편당 1억원짜리 콘텐츠가 아무리 하위 매체라 한들 편당 100만원에도 매매가 안되는 현실에서 무슨 위성방송이고 인터넷 프로토콜 TV고 뭐고 하는 지랄들이 필요하겠는가. 이럴 바에는 모조리 다 붕괴하는 게 낫다. 세상이 확 뒤집어지는 게 낫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천만 감독' 윤제균도 이번 영화 <해운대>로 그리 크게 벌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터뷰마다 무슨 곶감마냥 끼어드는 질문이 이번 영화로 '얼마 벌었냐?'인데 그때마다 윤제균의 대답이 다소 우울하게 느껴졌던 건 나뿐일까. 그는 초지일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크게 번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1,000만 관객이면 매출 규모로 900억원이다. 이 수치를 생각하면 감독이나 누구나 이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은 '몽조리' 돈을 벌었을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윤 감독의 말대로 현실은 다른 모양이다. 이번 <해운대>의 진정한 위너는 CJ엔터테인먼트다. 사실상 이 영화는 CJ 제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윤 감독이 운영하고 있는 JK필름이 아니고. 당초 제작비는 물론 작품 개발비조차 없었던 JK필름 측으로서는 CJ로부터 비용 전액을 지원받는 대신 작품 지분을 상당량 양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익의 대부분이 CJ로 귀속되는 모양이다. 이건 정말 예전과 참 달라진 모습이다. 과거에는 투자사와 제작사가 지분을 5:5로 나눴다. 손해를 보면 투자자가 '독박'을 쓰되 이익이 나면 반씩 나누는 구조. 그때는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이 맞다. 윤 감독이야 아쉽겠지만 이번 <해운대>의 계약관계는 정상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돈을 많이 낸 사람이 이익을 많이 가져가는 게 맞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칫 이러다가는 영화제작의 근간이 되는 제작사들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천만 감독' 윤제균조차 '쉽지 않은' 지경이라면 이건 또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다. 늘 하는 얘기지만 균형을 찾을 일이다.
(*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에 실린 글을 재편집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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