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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어떻게 '대중경제'의 꿈을 훼손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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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어떻게 '대중경제'의 꿈을 훼손시켰나

신자유주의의 파고 넘지 못한 '보편적 복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석달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민주정권 10년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애도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실패가 재집권에 실패한 것이라면, 김대중 정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해 '민주정권 10년'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0년 만의 첫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임기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격변기'였다. 김대중 정권은 'IMF 관리체제'를 3년 만인 2001년 조기 졸업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대폭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는 김대중 정권 5년, 더 나아가 노무현 정권까지 '민주정권 10년'의 정체성을 뒤흔들었다.

외환위기, 어려운 출발선

'대중경제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작품이었다. 박정희식 성장주의와 수출주도형 경제를 정면으로 배격하는 '대중경제론'은 고 박현채 선생(1934-95)의 '민족경제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중경제연구소 명의로 발간된 '대중경제론 : 100문 100답'은 박현채 선생을 중심으로 당시 수많은 진보학자들이 참여해 창안한, 현실성 있는 대안경제 이론이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은 71년 대선에서 전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공공연한 선거부정에도 불구하고 90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박정희 정권을 위협할 만큼 폭발적이었다.

▲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는 미셀 깡드시 당시 IMF 총재. ⓒDJ로드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작 97년 12월 집권하면서 '대중경제론'을 접었다. 김 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 덕분에 50년 만의 첫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다. 국민들은 국가부도 위기를 초래한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을 원했고, '준비된 대통령'인 김 전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김 전 대통령에게 통치의 기회를 갖게 한 외환위기는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는 외부 변수로 작용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외환위기 직후 대선 과정에서 IMF가 김 전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었다고 증언한다.

"IMF의 개방 요구에 대한 수위 조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97년 11월 하순에 하고 12월 3일에 합의를 봤다. 합의 직전에 IMF측이 요구한 것은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가 모두 협정의 내용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IMF 요구안이 김대중 캠프에 전달됐을 때 조금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김대중 후보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게 됐다는 식의 왜곡 보도가 나왔고, 어쩔 수 없이 당선 전에 협정을 맺어야 하니까 IMF와 협정 내용을 따르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또 IMF 자금으로 외환위기의 급한 불이 다 꺼진 것도 아니었다. 12월 초에 IMF 자금이 일부 들어왔는데도 김대중 당선자가 당선 직후에 보니까 가용 외환보유액의 1-2일치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미국의 데이비드 립턴 재무부 차관보가 와서 당선자를 면접했다. 대통령 당선자가 일개 차관보에게 면접을 당하는 수모를 겪은 셈이다. 그해 12월24일 미 재무부에서 우리나라에 1600억 달러에 달하는 스탠바이 크레딧을 제공하기로 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현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단초라고 할 수 있는 정리해고 조기실시, 파견근로제 도입 등 노동유연성 확대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지를 넘어선 IMF의 요구 조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로 기존 경제시스템이 다 무너진 상태에서 과거 자신이 오랜 기간 가다듬은 '대중경제론'을 실현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위기극복전략 모색이 시급한 상황에서 기존 관료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됐고,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대응책을 썼다. 위기를 불러온 근본 원인이 제거된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만들어지지 못한 중요한 이유다.

김대중 정부의 위기관리체제는 외형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2001년 8월23일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하면서 IMF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했다. 또 김영삼 정권 마지막 해 7355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2626 달러로 늘어났고, 5년 동안 120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쌓았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는 7.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IMF 조기 졸업했지만…

▲ IMF 직후 김대중 정부는 '금모으기 운동'을 벌였고, 큰 호응을 얻어 위기 극복에 대한 국민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연합
이런 외형적 성장에는 분명 대가가 있었다. 바로 노선과 정체성의 혼란이다. 재벌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재벌들의 과잉투자가 지목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 정부가 재벌개혁을 주도할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집권 초 각종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을 완화시켰고 사외이사제도를 도입시켰으며 결합재무제표를 의무화시키는 등 재벌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개혁조치를 취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차인 99년 8.15 경축사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99년 부활했던 출자총액제한제도는 2년 만에 사실상 폐기되고, 재벌계열 금융보험회사의 의결권도 부활시켰고, 재벌의 은행주식 보유한도도 높여줬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외환위기와 재벌개혁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계속 개혁만 진행됐고, 재벌개혁 프로그램이 체계적이지 못하다 보니 즉흥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래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대중 정부 5년 평가와 노무현 정부 개혁과제>, 경향신문.참여연대 엮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벤처 정책도 결국 거품 붕괴로 끝났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벤처 열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상쇄하고 말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제 정보기술(IT) 분야의 발전 및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그로 인한 부가가치 창출은 새로운 경제틀의 한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한국사회의 역동성과 맞물려 왕성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던 벤처 분야에 대해 정부가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지원정책을 펴는 바람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같은 책에서 인용)

획기적으로 팽창한 복지

시장은 철저하게 경쟁과 자율이라는 시장원리에 맡기고,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은 복지정책을 통해 한다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원칙이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 복지정책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다. 경제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저소득층을 복지정책을 통해 끌어안으려는 시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복지제도에서 가장 상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다. 또 계층간, 지역간 부담의 형평성 결여 및 보험자간 구조적 재정불균형 심화 등 관리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해 지난 20년간 끌어온 의료보험 관리운영체계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 의료보험제도를 출범시켰다. 고용보험제도와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적용 확대, 전 국민을 포괄하는 사회연대형 국민연금제도의 확대, 의약분업 실시 등도 김대중 정부의 큰 성과다.

이런 노력으로 복지재정과 그 수혜자가 크게 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인 97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2조8510억 원으로 국가예산의 4.2%를 차지했으나 2002년에는 7조7750억 원으로 그 비중이 7.3%로 커졌다.

복지정책의 수혜자도 크게 늘었다. 기초생활보장 수혜자가 1997년 37만 명에서 155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빈곤한 노인에게 지급되는 경로연금 대상자 또한 27만 명에서 72만 명으로 확대됐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경제활동인구의 36%에서 48%로 약 240만 명이 증가했고, 1997년 전체 임금근로자의 62%에 불과하던 산재보험 대상자는 2002년 80%로 늘어났다. 공무원의 대규모 인원감축이 진행되던 상황에서도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은 3000명에서 5500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복지정책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도시근로자 가구에 있어 IMF 경제위기 이전인 97년 1분기 상위 20%와 하위 20% 소득계층의 평균소득 비율은 4.81%였는데 2002년 1분기에는 5.40%로 벌어졌다. 이태수 꽃동네현대 사회복지대 교수는 "김대중 정부가 과거 정부보다 빈곤층에 대해서나 서민층의 생활안정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정책에 있어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가운데 보완적인 측면에서 복지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소득분배를 개선하기는 어려웠다"고 평가했다.(위의 책에서 인용)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복지 확충의 흐름은 보수세력의 큰 반발과 저항을 불러왔고, 성장-복지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또 한번의 정권교체를 통해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다시 큰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할 뿐만 아니라 지난 10년간 계속 증가해왔던 복지재정을 축소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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