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회장은 지난 29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리 해비치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2009 제주 하계포럼' 개막사에서 "우리 정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문제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며 "어려운 경제를 살려나가는데 정치가 얼마만큼 우리에게 도움울 줬는지 물어보고 싶다"고 정치권을 정면을 비판했다.
재계가 정치권을 비난하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일찌기 1995년 "한국은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될 것은 '발언 내용'이 아니라 '발언 주체'다. 조 회장은 대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경련 회장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이기도 하다. 조 회장은 이 대통령 사위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의 큰아버지다. 이런 '특수관계'에 있는 조 회장이 현재의 한국 정치가 "문제를 만들기만 한다"고 비난했다. 현재의 한국 정치의 최종 책임자는 이 대통령이다.
조석래 회장, 대선 때 'MB 지지 발언'으로 구설수에
그렇다면 조 회장과 이 대통령의 관계가 전에도 안 좋았나. 아닌 것 같다.
▲ 조석래 전경련 회장 ⓒ뉴시스 |
조 회장은 한나라당 후보 경선이 한참 진행 중이었던 2007년 7월25일 전경련 주최 CEO하계포럼에서 노골적인 이 대통령 지지 발언을 쏟아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도덕성' 논란으로 이 대통령이 최대 위기에 처했을 당시였다. 조 회장은 "최근 검증 공방에 대해 외국인들은 '그런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런 사람이 행정을 제대로 하겠느냐'고 하더라"면서 "이런 논쟁에서 졸업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차기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 돼달라"고 말해,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 대통령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 선언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사돈 기대에 적극 부응한 이 대통령
이 대통령도 이에 적극 화답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내가 대통령이 되면 기업들이 적극 투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이 대기업 CEO 출신인데다 전경련 회장이 사돈인 만큼 기업들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집권 후에도 이 대통령은 대기업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않았다. 정권 초기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정책 기조로 내세웠고, 이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기업 총수들이 언제라도 대통령에게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을 개통하기도 했다.
지난해 8.15 대사면에서도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대기업 총수들을 대거 사면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SK 최태원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등 '빅3' 인사를 비롯해 손길승 전 SK 그룹 회장,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등이 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실제 정책에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적극 투영됐다. 법인세 인하 등 대대적인 감세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업이다. 재계가 요구한 '규제완화'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경제 5단체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총 267개의 규제개혁 과제를 정부에 건의했고, 정부는 이를 각 해당부처에 전달해 규제 완화 및 폐지를 적극 독려했다. 지난 2일 있었던 '제3차 민관합동회의'에서도 경영권 방어수단인 '포이즌필'(독약증권)을 법제화하기로 하는 등 '대기업 맞춤형' 정책이 쏟아졌다.
미디어법에 가려져 여론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난 22일 미디어법과 함께 직권상정을 통해 국회를 통과한 금융지주회사법도 대기업들의 주문 사항 중 하나였다. 금융지주회사법은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금산분리 완화를 위한 법으로, 이 법이 직권상정을 통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대기업들의 은행 소유가 가능해졌다.
조석래 회장, 연일 '쓴소리'…재계-정치권 역관계 보여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석래 회장은 29일과 30일 연일 정치권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조 회장은 30일 "대기업이 정부 정책에 호응을 해야겠지만, 투자는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고, 비즈니스가 돼야 한다"며 "정부는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니까 (대기업에게) 투자 안 한다고 하는데 2007년보다는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지난해 수준으로 투자를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투자를 종용하는 정부에 분명히 "NO"한 것이다.
또 비정규직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노동시장을 법으로 이래라 저래라 규제하면 일자리만 더 줄어들기 마련"이라며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노조가 있는 한 투자는 어렵다"는 발언도 했다. 투자를 원한다면 정부가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동유연성'을 확대하라는 또 하나의 요구 사항을 전달한 셈이다.
조 회장이 연일 정부 비판, 정치 비판 발언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감'이다. 재계와 정치권 사이의 역관계에서 중심축이 재계로 기울었다는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발언이다. 이처럼 권력의 무게추가 재계로 넘어간 이유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해진 탓도 있겠지만, 이 대통령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 탓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면서 시장경제의 룰(규칙)을 만들고 이를 엄정히 집행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을 포기했다.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감세정책, 규제 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 재계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주면 재계도 투자, 일자리 등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재계는 정작 정부의 요구에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투자에 나서기는 어렵다고 한다. 충분히 예상된 답변이다. 기업은 이익이 예상될 때에만 '지갑'을 연다는 사실을 CEO 출신인 이 대통령이 몰랐을까?
조석래 회장의 '쓴소리'가 보여주는 것은 이 대통령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의 예정된 비극적 결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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