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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항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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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항명하다"

[박동천 칼럼] "더불어 현병철 묻혀선 안 돼"

믿거나 말거나, 나는 한나라당에서 누가 먼저 토건주의 전횡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낼지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목소리"란 국회의원의 것으로서,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국회에서 투표를 통한 의사표명을 뜻한다. 일전에 무슨 "쇄신" 운운하는 말들이 있을 적에, 나는 당 안에서 칭얼거리지 말고 국회에서 표결을 통해 스스로 쇄신을 실천하라고 촉구한 바 있었다 (☞ 바로가기). 나는 거기서 "원희룡이 될지 남경필이 될지 박근혜가 될지, 또는 저런 허명 뒤에 가려진 어떤 쓸만한 영혼이 광채를 발하게 될지는 몰라도, 한나라당에서 민심을 읽고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할 사람이 진짜로 나온다면, 당장 유력한 차기주자로 떠오를 것"이라고 썼다. 내가 바랐던 순서로는 "그런 허명 뒤에 가려진 어떤 쓸만한 영혼"이 첫 번째였고, 박근혜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은 제일 끝이었다. 그런데 제일 끝이 현실이 되었다. 어쨌든 앞으로 볼만한 광경이 펼쳐질 것 같아서 몇 마디 소감과 예상을 적어본다.
▲ 지난 15일 본회의 참석 당시의 박근혜 의원. ⓒ연합뉴스

1. 박근혜(대구 달성군) 의원은 미디어법과 관련해서 표결에 "참석하게 된다면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해 참석할 것"이라고 말한 모양이다 (☞ 바로가기). 맥락을 보니 자신의 참석을 안상수 원내대표가 공언한 데 대해 측근에게 논평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요지는 합의처리의 필요성을 강조한 데에 있지,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법안을 상정하고 한나라당이 수의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할 때 실제로 나가서 반대표를 던질지 말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어쨌든 저 정도의 발언만으로도 상당한 무게가 실리는 것은 틀림없으니, "차기"와 관련된 전략적 행보일지 아니면 순수한 우국충정의 발로일지가 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전략적 고려와 나름의 가치관이 섞여 있을 텐데, 우국충정보다는 전략적 고려가 더 많이 작용했기를 바란다. 지금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민심을 전략적으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 박근혜의 한 마디에 김형오 국회의장의 체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내년 6월까지 분권형 체제로 개헌을 제안한 모양인데, 미디어법을 둘러싸고 소용돌이가 치면 기타 안건들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서다. 김형오 씨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개헌 이야기를 꺼냈든지, 차기에 관해 막강한 선두주자인 박근혜에게는 마뜩찮은 소리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와 같은 경우에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은 안 한다"고 태도를 명확하게 밝히면 현행 헌법으로도 권력 분점은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김형오의 개헌론은 현재 이명박에게 편승해서 단물을 취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명박 이후로 유력시되는 박근혜에게 유사시 치이지 않으려는 보장책이라고 보는 해석이(☞ 바로가기) 매우 그럴듯하다. 국회의장에 만족하는 사람과 대권을 곁눈질하는 사람의 체급이 달라지는 지점이다.

3. 그런데 민주당의 마음이 또한 착잡하겠다. 얼핏 보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올 초에 이어 이번에도 박근혜가 2012년의 민심에 대해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가는 셈이기 때문이다. 정세균 대표도 단식을 통해 대중을 향한 노출의 고삐를 잡아보려는 모습이지만, 이명박은 늘 그랬듯이 여간해서는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현 대통령의 행태를 예측하는 첫 번째 열쇠는 누구에게든 밀리는 광경만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요구는 받아주지 않고 압력은 무시한다는 것이 17개월 만에 내 눈에 확인된 그의 소신이자 철학, 즉 언필칭 "실용"이다. 미안한 말씀인데, 정세균 씨 주위에서는 단식이 상당히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대비해야 할 것 같다.

4. 내기를 한다면, 나는 아직 청와대는 꿈쩍도 하지 않으리라는 편이다. 앞에서도 한번 말했듯이 (☞ 바로가기), 둔감할 뿐이면서 대담한 것이라고 채색하는 자아도취성 여호수아 모방증이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도 보이는 일을 안상수, 박희태, 그리고 김형오 등, 저 바닥 또는 그 언저리에서 수십 년을 버티면서 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못 볼 리가 없다. 즉, 미디어법 강행처리를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국회의장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직권상정으로 돌고, 박근혜의 불참과 야당의 아우성 속에 우리 헌정사에 "날치기"가 하나 더 추가될 가능성을 조중동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몰아갈 것이다. 물론 "날치기"를 벌이는 데도 넘어야 할 산은 옛날에 비해 훨씬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협상 시도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협상이 시작된다면 피상적인 눈에는 한나라당이 일보를 양보한 것으로 비치게 되어 민주당의 보폭이 몹시 좁아져 버린다. 청와대의 각별한 부하사랑 또는 인색한 인사정책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통하고 있는 것도 다 이유는 매한가지다.

5. 그러므로 박근혜의 제스추어는 사실 미디어법에 대해서조차 반드시 민주당에게 유리한 결말을 예비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는 이명박 식 밀어붙이기에 반대하는 것이지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세균의 단식을 이명박이 외면하고,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안 근처에서 협상 포지션을 잡으면, 민주당인들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디어법 강행처리를 반대한다는 박근혜의 발언은 이런 귀결을 가리키고 있다. 민주당이 이런 시나리오까지도 배척할 수 있을까? 나는 비관적이다. 정세균의 단식에서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6. 이 와중에 기꺼워할 사람들도 몇 명 있겠다. 여론의 주목이 부담스러운 사람일수록 미디어법 공방, 박근혜의 발언, 정세균의 단식 등으로 소동이 이어지면 즐거워지는 게 인지상정이겠다. 우선 현병철 인권위원장 후보가 있다. 그리고 신영철 대법관에서부터 한승수 국무총리, 유인촌, 김경한 장관 등으로 이어지는 개편대상 공직자의 케케묵은 명단이 있다. 케케묵은 사람들은 접어두고, 현병철 씨의 표절논란에 관해 논의를 덧붙인다.

7. <한겨레>는 이렇게 썼다. "국회도서관에 올라 있는 현 위원장 논문 21편 내용을 살펴본 결과, 1998년 학술지 <비교사법> 제9호(한국비교사법학회 발행)에 실린 '무효'라는 제목의 논문과 2002년 <법학논총>(한양대 법학연구회 발행)에 게재한 '무효에 있어서의 대항력의 문제'라는 논문은 제목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의 논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논문의 서론을 비교해 보면, 2002년 발표한 논문은 1998년 논문의 서론에서 첫 문단을 제외하고 이어지는 네 문단, 에이포(A4) 용지 1쪽 반 분량을 그대로 옮겼고 마지막 문단에 여섯 문장을 덧붙였을 뿐이며 11쪽 분량의 본론은 12개 문장을 새로 썼을 뿐, 나머지 부분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면서 "각주의 위치와 내용까지 동일해 사실상 같은 논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출처나 인용 표시는 없었다"고 했다 (☞ 바로가기).

7.1 이 보도가 맞는다면,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기표절이다. 논문에서 인용한 전거를 밝히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공로로 발견된 지식을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가로채면 안 된다. 자기가 쓴 글이라도 다른 곳에 이미 발표된 글이라면 그 점을 밝혀야 이번에 발표하는 글이 마치 새로운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상호확인을 통한 지식의 진보와 공유를 위해서 원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을 스스로 파고들어 확인할 수 있도록 편의를 최대한 제공하기 위함이다.

7.2 현병철 교수의 경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조차 대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거론하는데, 이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소치다. 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을 부분적으로 몇 문장만 손을 봐서 다른 곳에 발표하더라도 출전만 표시하면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전에 발표한 내용을 다시 (물론 출전을 밝히고) 사용할 수 있으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는 『위키백과』(☞ 바로가기)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a 두번째 저작을 통해서 새로이 기여하는 내용을 위한 바탕으로서 종전에 발표한 내용이 다시 개진될 필요가 있을 때.
b 새로운 증거나 논증을 논의하기 위해서 종전에 출판한 내용이 다시 제시되어야 할 때.
c 두 출판물이 겨냥하는 독자층이 워낙 달라서 공표하려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는 재출판이 불가피할 때.
d 저자가 느끼기에 전에 발표한 내용이나 방식이 아주 좋아서 다르게 말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을 때.

7.3 현병철 교수의 논문들은 중복의 정도로 볼 때, a와 b에는 해당할 수가 없고 c나 d만이 정당화 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비교사법』의 독자층이 한양대 『법학논총』의 독자층과 "워낙" 다르다고 보기는 어려울 테니까, 결국 내용이나 발표방식이 완벽해서 다르게 말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항만이 남는다. 내가 보기에 저 논문은 "완벽"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데, 혹시 그렇게 볼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현병철 교수 본인은 완벽해서 고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지 않고, "각 논문의 논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전 논문에서 필요한 부분을 갖다 쓸 수 있"고 "새 논문에 이전 논문을 원용했다는 점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7.4 전체 길이 14쪽 분량의 논문에서 문장 21개를 새로 써서 논지가 달라질 수는 없다. 따라서 "논지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갖다 썼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새 논문에는 이전 논문을 원용했다는 표시가 없다. 그러므로 "표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도 사실일 수가 없다. 나아가 이와 같은 경우는 설사 출전표시를 했더라도 자기표절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똑같은 논문을 서로 다른 두 개의 학술지에 실은 행위를 지식의 공유, 심화, 발전, 전파를 위해 정당화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순전히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7.5 현병철 교수는 인권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인권위원장으로 마땅치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나는 그가 과연 일반적으로 법학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법률지식이나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같은 논문을 두 개의 학술지에 싣고, 더구나 그 일에 관해 대답하는 태도에서 그는 표절이 뭔지, 자기표절은 뭔지, 업적을 참칭하는 행위는 뭔지 등에 관해 기초적인 이해도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금세 사실이 아니라고 드러날 주장을 펼쳤다.

7.7 이 분을 기어이 중용해야겠다면 차라리 검찰총장을 맡길지언정 인권위원장에는 완벽한 부적격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정상상태라면 검찰총장도 맡아서는 안 되겠지만, 이 정권 아래서 검찰은 정상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하물며 인권위원장은 전혀 비슷하지도 못하다. 인권이란 세세한 사정에 관한 치밀한 분석력이 없이는 감지할 수가 없는 주제다. 표절이 뭔지, 자기표절이 뭔지도 분간을 못 하는 사람이 공권력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미세한 균형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 없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8. 미디어법의 운명은 이제 이명박과 박근혜 사이의 줄다리기로 넘어가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만난을 무릅쓰고 날치기를 감행하든지, 아니면 박근혜 대안 근처에서 일단락되리라는 말이다. 민주당은 유감스럽더라도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대신 그 사이에 현병철 인권위원장 후보의 자기표절 문제가 묻혀버리지 말기를 나는 바란다. 법학교수들이 이 문제에 관해 학자로서 양심을 더 많이 표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도 문제에 관해서 바른 판단에 도달하는 데에는 법학에 관한 지식이 별로 필요 없다. 일반적인 수준의 지성과 상식이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이 자기표절의 사례로서 명백한 사회적 판정을 받는다면, 우리 사회의 정직한 미래를 향해 커다란 주춧돌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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