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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위상에 관한 홍준표의 단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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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위상에 관한 홍준표의 단견

[박동천의 집중탐구]<66>의회의 위상을 어떻게 높일까

제6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제4장 의회개혁의 방향
제2절 의회의 위상을 어떻게 높일까


의회개혁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사항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대단히 치밀한 고려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치의식의 낡은 프레임을 고발하는 연재를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가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다만 나는 간접적인 개혁이라고도 할 수 있고, 기본사양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는 전환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행태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다음 절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강조할 사항이 하나 있다. 바로 국회의 위상과 권능에 관해 일반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방향과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국회에 대해서 막연하고 과도한 기대를 가지는 뒤끝으로, 필연적으로 실망과 좌절이 뒤따르는 악순환이 있다. 국회의원들이 엄숙한 국사를 앞에 두고 목욕재계라도 하고 나와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국익을 위해 심사숙고를 해주기라도 바라는 셈으로 보이는데, 이런 일은 군주정 시대의 궁정에서도 없었고 하물며 민주주의 시대의 의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국회는 무엇보다 상충하는 이익들이 서로 다투면서 경쟁하는 정쟁의 공간이다.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서 사사건건 이익의 충돌이 무력투쟁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국회라고 하는 정쟁의 공간을 마련하고 거기서도 주먹질보다는 말로써 다투면서 타협안을 찾는다는 데에 대의정치의 요체가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정치의식에서는 국회의 역할을 비현실적으로 설정하므로 곧 극심한 좌절을 맛보게 되어, 국회무용론과 같은 성급한 자포자기가 교차하는 경향이 매우 짙다. 이와 같은 과도한 기대와 미숙한 실망 사이에서 보다 현실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항들을 열거해본다.

첫째, 대통령제라고 해서 국회가 들러리에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주권의 원리 안에서 행정부의 구성방식을 두고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갈라질 뿐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미국의 대통령제는 군주정 또는 왕초정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대의정치의 한 형태이고, 대의정치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의원내각제와 마찬가지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독립과정의 독특한 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식 웨스트민스터 모델이 온전히 채택되지 않고 행정부 구성에 관해 수정이 이뤄진 결과인 것이다.

미국은 건국 전인 식민지시대부터 대의정치가 제한적으로나마 이뤄지고 있었고, 그 제한이 과중하다는 불만이 터져서 혁명이 일어났다. 따라서 혁명 후에 관심은 의회를 특정 세력이 좌지우지하게 될까봐 우려해서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쪽에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대의정치의 전통이 왕조시대 귀족들이 어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수준 이상으로, 다시 말해 바로 그 어린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견과 요구를 표명하는 수준으로는 형성된 적이 없었다. 몇 달 동안의 검토를 통해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의원내각제로 틀을 잡았던 초안이 막판에 이승만의 압력 때문에 대통령제로 바뀌었다는 사연은 이미 제헌당시부터 국회의원 대부분의 정치의식이 왕초정치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유진오가 항의하자 김성수는 "대통령으로 모셔야 할 단 하나밖에 없는 후보자"가 저렇게 떼를 쓰니 어쩌겠느냐며 달랬다고 한다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1980, p. 73).

프랑스에서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후 아주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결과는 판이했다. 독일이 패퇴한 후 프랑스에서도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대통령으로 모셔야 할 단 하나밖에 없는 후보자" 따위로 생각하자면 당연히 드골이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의 지도자로서 이승만이 누렸던 국내적 국제적 명망보다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드골이 누렸던 국내적 국제적 명망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제헌회의가 제3공화국의 체제를 계승하여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흐름을 보이자, 드골은 의원내각제 아래서 상징적 대통령을 맡지는 않겠다고 압박했다. 여기까지는 1945년 프랑스와 1948년 한국이 똑같다. 하지만 프랑스 제헌회의는 드골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드골은 1946년 1월에 정계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탄생한 프랑스 제4공화국을 드골은 집요하게 흔들어대다가 결국 12년이 지나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제5공화국 헌법을 성사시키면서 복귀했다. 제4공화국 체제가 자체로 허약했는지. 드골 때문에 무너졌는지, 아니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말로였는지, 기타 등등에 관해서 논란이 가능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골자는 한국에서 국회를 경시하는 프레임이 대통령제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런 프레임 때문에 대통령제가 국회를 경시하는 구실로 해석되어 왔다는 점이다. 독재자들이 국회를 경시한 것이 틀림없지만, 국회의원들 자신 및 지식인들이나 일반 시민들도 그 풍조를 거든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과거의 일에 책임을 묻자는 얘기가 아니고, 지금부터라도 국회의 위상을 존중해 가꿈으로써 드높여줘야 할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시민들의 건강한 기대를 통해 국회의원들을 자극하는 것만이 국회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선거식 민주주의를 아예 포기하지 않는 한(대안으로 어떤 것이 가능한지 내 상상력 안에는 없다), 국회가 대의정치의 기본축이라는 점은 시비할 여지가 전혀 없다.

둘째,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표를 뽑아서 간접민주주의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정치의식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에서 기원한 정치제도들이 실제적인 삶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실상을 보지 않고, 껍데기 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한 다음 그 번역어들의 피상적인 의미만을 짜 맞춘 결과로서, 아주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정치적 지향을 가로막는 왜곡이다.

우선,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지도 않고 최선인 것도 아니며, 직접민주주의를 한다고 해서 민의를 대변한다고 하는 과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에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는 예를 말하자면 스위스의 예가 흔히 운위되지만, 스위스라고 해서 모든 쟁점을 다 주민투표에 붙이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어차피 어떤 "중요한" 쟁점을 인민에게 직접 물어서 결정하는 방식은 사실상 모든 민주주의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일이다. 앞에서(제3부 제5장 제3절) 지적했듯이, "인민의 의사"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시시때때로 변화하며 무엇을 어떤 식으로 묻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수수께끼와 같다. 혁명과 같은 경우 가장 장기적인 함축을 가진 민의가 가장 강력하고 가장 분명하게 표명되는 것이지만,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또는 우리 역사에서 4월 혁명과 6월 항쟁에서 나타났듯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의사까지만이 확인될 뿐이고 장차 살아갈 방식에 대해서는 프랑스나 한국이나 지금도 계속해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직접민주주의라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간접민주주의라서 해결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일반 유권자들 사이에서 명백한 합의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국회가 외면하는 경우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사실 다음 번 선거에서 민의에 따르는 의원으로 갈아 치우거나, 기존 정치체제에 기대할 것이 전혀 없을 것 같으면 아예 혁명으로 판 자체를 엎어버리면 된다. 민중 사이에 일반적인 합의가 있기만 하다면 혁명적인 체제변혁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민중 사이에 일반적인 합의가 없기 때문에, 또는 있더라도 아주 미온적으로 말장난에 그칠 뿐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지, 간접민주주의이기 때문인 것이 아니다. "대의정치에 문제 있다"는 소리는 현실 정치를 어떻게 개선할지 상념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연막용에 불과한 것이다.

대의의 문제란 곧 정치의 모든 문제와 같다. 이는 앞에서 민족의 문제란 곧 정치의 모든 문제와 같다고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민족"이든 "공익"이든 "나라"든 "공동체"든 "바른 정책"이든, 모두가 집단적 목표를 표상(represent)하는 개념들인데, 바로 그러한 집단적 목표를 찾아내는 과제가 곧 대의, 즉 민의를 대변(represent)한다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일면 선거구 유권자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대변해야 하고, 일면 민족공동체 전체를 대변하기도 해야 한다. 국회는 나라 전체를 대변해야 하고 대통령도 인민 전체를 대변해야 하며, 판사들도 개별 판례들을 통해서 정의와 공정과 진실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하고 표상해야 한다. 촛불을 든 시위 군중이 100만 명이라고 해도, 오직 그들의 뜻이 4900만 인구 전체의 뜻을 표상할 때에만 민의가 되는 것이고, 심지어 설령 4900만 전체가 이명박을 지켜주거나 몰아내기로 결단을 내렸다고 할지라도, 돌아서자마자 자신의 결단을 후회하는 지경이라면 과연 민의가 대변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인민의 의사란 이처럼 직접민주주의만 하면 저절로 확인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언제나 대의라고 하는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만약 개헌을 한다는 전제로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 가운데 택일하라면 나는 의원내각제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개헌논의에서는 그야말로 시한을 두지 않고 충분한 공론의 숙성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의원내각제/대통령제 선택 또는 기타 어떤 구체적인 헌법조항보다 훨씬 중요하다. 논의하는 척하다가 시간이 길어지면 참을성 없는 무지한 사람들 입에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할 때, 더 이상의 논의는 대충 뭉개버리고 소수 작전세력들의 바람몰이에 따라 상황이 종결되는 것이야말로 대의정치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의원내각제든 대통령제든 기본적으로 대의정치의 원리에 따라 작동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다면 대의정치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지 직접민주주의를 안 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의정치란 곧 법치주의다. 그러므로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정치의 문제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시각 역시 얼마나 피상적이며 상황인식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지금까지 내 논지를 파악한 독자라면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의정치란 하나로 존재하는 인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과정이 아니라, 다양하게 갈라져 있는 개인들의 이익을 하나의 집단의사로 통합해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의적인 우연에 의해 강자의 처지에 놓인 측에서 약자의 처지에 놓인 측을 짓밟고 무시하게 된다면 대의정치는 끝나고 전제정치만 남는다. 물론 공동체를 위해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소수의 의견을 버리고 주류의 뜻대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치열한 논란을 부르는 쟁점들이란 거의 모두가 그렇게 급박한 문제들이 아니다.

상황이 실제로 그렇게 급박하다면 서로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라도 오히려 공감의 폭이 생성되어, 상대의 정책으로 하여금 한번 시행되어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공정한 기회 자체를 주지 않으려고 악착스럽게 방해하지는 않을 수가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한미 FTA, 미디어법, 기타 등등 지금 문제되고 있는 쟁점 법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합리적 토론을 하든 감정적 푸닥거리를 하든,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시간을 가진 후에 처리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큰 피해가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하물며 개헌과 같은 추상적인 조항들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개헌논의가 우리사회의 정치발전을 위한 계기가 된다고 하면, 훌륭한 헌법을 찾아내서 그럴 수 있는 의미보다는 분열되어 있는 공론장에서 타협과 흥정을 통해 합의를 생성할 수 있는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그럴 수 있는 의미가 훨씬 크다. 배려와 양보, 자제와 인내, 책임감 있는 주장 등등, 정치사회의 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배경적 조건들이 개헌처럼 중요하면서도 추상적인 논의를 시한 없이 끈질기게 이어나가보는 연습을 통해서 형성될 수 있다.

넷째, 국회의 위상 및 기능에 관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서 횡행하는 오해와 단견은 앞으로도 길게 목록을 이어갈 수 있지만, 검사 출신인 홍준표(한나라당, 동대문구 을)의 발언 하나를 예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논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박연차 추문 수사에 관해 대정부질문이 나오는 상황에 대해서 "국회에서 법무장관을 상대로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을 물어보거나 대법원 관계자를 불러 재판 상황을 물어보는 것은 헌법상 삼권분립주의에 위배되는 정치활동일 뿐 아니라 국회법 절차에도 어긋나는 질문"이라며, "국회의 잘못된 관행이 쌓여서 국회에서 삼권 분리를 무시하고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칠 수 있다는 접근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 바로가기). 이것은 한국사회의 법학계에서 비판적인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빠져있는 기계적인 권력분립론에 해당하는데, 두 가지 커다란 단견을 지적할 수 있다.
▲ ⓒ프레시안

우선,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에 관해서 국회에서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삼권분립을 위해서보다는 먼저 정부기관 사이의 상호 예의일 뿐이다. 삼권분립이란 견제와 균형을 위함인데, 만약 수사기관이나 재판부가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하거나 책무를 유기한다면 국회가 당연히 문제 삼을 수 있다. 국회가 문제를 삼아서 갈등의 소지를 여과하지 않는다면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설 위험이 있고, 그랬을 때 사회평화는 크게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국정감사, 국정조사, 해임건의, 탄핵 등등, 법률로 명시된 국회의 권한을 통해서 견제할 수도 있지만, 그런 조치들은 모두 수사나 재판이 종결된 다음의 일이다. 따라서 만약 사법기관들의 직무유기나 권력남용으로 인한 피해가 대단히 크고 절박하며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면, 국회는 마땅히 적극적으로 간섭해서 피해를 중단시킬 책무가 있다.

다음, 국회에서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칠 수 있다는 접근"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관행도 아니다. 한국 국회는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문제인 것이고, 온갖 문제를 다 파헤칠 수가 있어야 국회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수상이 자기 친구의 자동차판매회사를 배려해 달라고 재무부 고위관료에게 이메일을 보내 청탁했다는 보도가 나와 정부 지지율이 폭락하는 일이 있었다. 상원에서 청문회를 열어 조사한 끝에 가짜 이메일이었음이 판명되어 오히려 사기극에 넘어간 야당 당수의 리더십이 크게 상처를 입고 끝났다 (☞ 바로가기). 이처럼 정치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문제라면 바로 국회가 조사를 개시해야 하고, 조사를 할 때에는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비근한 예로서 두 말할 나위가 없고, 클린턴의 부동산 투기의혹을 파헤치러 시작한 특별검사가 (특별검사는 의회가 주도하는 조사기능의 일부다) 섹스 스캔들까지 파헤친 것은 그야말로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친 사례다. 앞 절에서 예를 들었지만, 용산참사의 진상을 국회에서 샅샅이 공개적으로 파헤친다면 한국 사회의 정치불신이나 계급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 수 있다.

대한민국 국회가 지금까지 언제 어떤 일에 관해서 "온갖 내용을 다 파헤친" 적이 있는지 홍준표 씨의 기억력이 나는 대단히 궁금하다. 청문회라는 것이 1988년 소위 5공청문회에서 시작되었을 뿐인데 광주학살의 진상은 여전히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회피 수준에 머물러있다. 한보청문회, 미국쇠고기청문회, 등등, 다른 어떤 청문회에서도 온갖 내용이 다 파헤쳐진 경우는 관행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종류의 조사는 시한을 정하는 순간 진상이 은폐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국회의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조차 아는 듯 모르는 듯 은근슬쩍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한 조사를 시한 정해놓고 한다면 어떤 범죄자가 날 잡아 잡수라고 조사에 협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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