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도시로 옮길 때마다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신기하게도 도착하는 날의 하늘은 너무나 맑고, 떠나는 날에는 꼭 비가 왔다. 런던이 그랬고, 에딘버러에서, 맨체스터에서도 그랬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버스로 약 한 시간 반 거리. 맨체스터를 떠날 때 비가 왔다는 건 리버풀에서도 비가 왔다는 거고 그 얘기인즉슨 여정의 공통점이 깨졌다는 거다. 고속도로를 달려 리버풀에 진입할 때부터 빗줄기가 굵어졌다. 창밖에서 보는 리버풀은 말 그대로 쇠락한 도시였다. 허름하고 낡았으며 현재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예감이 안 좋았다. 리버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딱 두가지. 비틀즈(Beatles)와 축구뿐. 딱 1박2일 머물 도시지만 이 곳에서 실망하는 건 아닐까. 박물관에 들어가있는 비틀즈와 디스코클럽으로 바뀐 캐번 클럽 같은 박제들만 느끼고 떠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코치 스테이션(버스 터미널)은 시내 외곽에 있었다. 유스호스텔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속도로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코치스테이션 앞 길 역시, 많은 손님을 맞는 거리치고는 황량했다. 이제 겨우 6시가 되었건만 거의 모든 가게의 문은 닫혀 있었다. 런던이나 맨체스터, 에딘버러와는 달리 여기가 어떤 거리인지 알려 주는 표지판도 붙어 있지 않았다. 가기로 한 유스호스텔이 있는 거리, 즉 오프 와핑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머지사이드라는 지명을 보고 대략 머지 강쪽으로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워낙 작은 도시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사전에 체크를 면밀히 하지 않은 탓도 있다.
여정이 진행될수록 트레일러는 무거워져 간다. 인천에서 출국할 때 이미 25킬로그램 정도 나가던 게, 지금은 온갖 책과 기념품 등이 더해져 30킬로는 족히 나갈 것만 같다. 비가 그치기 기다린 후 트레일러를 끌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았지만,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지라 한달 가까이 돼가는 여행 끝에 진화한 위치 본능을 믿고 움직였다. 그러나 한 달은 역시 인간을 진화시키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인지 코치 스테이션에서 20미터 정도에 있는 첫 번째 사거리에서 갈팡질팡했다. 이 길을 건넜다가 돌아오고, 저 길을 건넜다가 돌아오고 하며 마치 갓 전입한 이등병이 막사에서 해매듯 어리버리한 상태로 있었다. 그 불쌍한 이등병을 발견한 주임원사가 있었으니, 누가 봐도 지역 토박이로 보이는 노인이 말을 걸었다. "어디 가니?" 리버풀의 액센트는 맨체스터와는 또 달랐지만, 거의 독일어처럼 들리는 맨체스터 액센트에 비하면 그나마 알아들을만 했다. "머지 강으로 가요." "오, 머지강은 여기서 꽤 먼데….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나을거야. 5분이면 갈 수 있어."
▲상상 속의 리버풀과 현실의 리버풀은 날씨 만큼이나 달랐다(?). ⓒ김작가 |
택시를 탈 생각이었으면 5분동안 코치 스테이션 바로 앞에서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걸어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데요?" 하며 지도를 내밀었다. "걸어가기에는 먼데….여기서 우회전을 해서 저쪽으로 가다보면 라임 스트리트가 나오는데…." 그 뒷말은 애써 들을 필요도 없었다. 라임 스트리트만 찾아가면 머지강까지는 어떻게든 갈 자신이 있었다. 지도상으로 보기에 리버풀의 메인 도로는 상당히 단순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인은 설명은 멈추지 않는다. 역시 지나가던, 약간 부랑자처럼 보이는 아저씨도 합세해서 계속 택시를 타라고 권유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트레일러를 끌었다. 다행히도 내리막길이어서 쉽게 갈 수 있었다. 노인과 부랑자가 알려준 길을 따라가니 번화가가 나왔다. 기차역 중 하나인 라임 스테이션. 불과 한 블록 차이로 번화가와 외곽이 갈리는 건 맨체스터나 리버풀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임 스테이션에서 라임 스트리트를 따라 계속 시내를 통과해서 걸었다. 그래도 역시 내가 가야할 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는 사실은 변화가 없었기에, 사거리가 나올 때 마다 갈팡질팡했다. 그 때마다 누군가 다가와서 "메이 아이 헬프 유?" 나 "웨어 아 유 고잉?"이라 말을 걸었다. 리버풀 사람들은, 정말이지 친절했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그 말을 최소 열 번은 들은 것 같다. 헤매고 헤맸다지만 고작해야 20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시내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역시 "메이 아이 헬프 유"라는 마법의 주문을 던진 할머니는 심지어, 내가 가야할 유스호스텔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다른 지나가는 토박이들에게 묻고 묻고 또 물어 결국 목적지를 알려주기에 이르렀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나 존 레넌(John Lennon)의 꼬맹이 시절처럼, 누가 봐도 악동처럼 생긴 중학생 또래의 소년들이 심한 리버풀 액센트로 할머니에게 그 곳이 어딘지를 설명해줬고, 할머니는 리버풀 액센트를 런던 액센트로 통역(?)해서 다시 나에게 일러줬다. 그들 모두에게 땡큐 베리 머치를 연발하며 결국 숙소 코앞에 이르렀다. 리버풀 주민들의 친절함은 끝나지 않았다. 골목이 두 개여서 약간 주저하다가 한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뒤에서 "헤이"하며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르렀다. 비틀즈 관련 장소와 리버풀 FC 스타디움을 제외하면 리버풀 제1의 관광지. 머지 강가의 알버트 독(Albert Dock)바로 맞은 편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을 배정 받았다. 리버풀 FC유니폼과 모자를 걸친 캐나다인이 인사를 건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이 방에 한국사람이 또 있다며 다른 침대를 가리켰다. 또 한 달 일정 몽땅 예약해놓고 번개처럼 다니는 대학생 배낭여행족이려나 싶었는데, 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냈다. 그는 깜짝 놀라며 "한국분이세요?"라 물었다. 거의 매일 한국 사람들과 마주쳤던 나로서는 이상할 것도 없는데, 알고보니 그는 1년예정으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여행자였다. 한국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바로 출국해서 아프리카 여행을 하다가 영국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축구 때문에 오셨어요? 아니면 비틀즈?"라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뇨. 어제 리버풀에서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가 공연했거든요. 그거 하나 때문에 왔어요." 두둥,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루 차이로 펫 샵 보이스 공연을 놓치다니! 맨체스터에서는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주연의 오페라 <프리 마돈나>를 역시 일정이 안맞아 놓치고, 런던에서는 몇 십 분 차이로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공연을 들으며 하이드 파크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데! 티켓 마스터를 부지런히 검색하면서 다녔어야했지만, 뭐 글래스톤베리에서 천하를 느꼈는데 공연은 안봐도 그만… 이라고 위안하기에는 역시 펫 샵 보이스를 놓친게 원통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펫 샵 보이스의 공연 하나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건너올 정도의 한국 사람을 만났으니. 그러고보니 그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또래의 한국 사람이자, 처음으로 음악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허지훈.
▲에코 아레나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머지 강 위로 음악을 흘러보낸다. ⓒ김작가 |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해서 함께 싸구려 중국 뷔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초 계획은 머지강가에 앉아 멍하니 밤을 보내는 거였다. 에딘버러에서 사온 작은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다음 날 본격적으로 비틀즈의 흔적을 찾아다닐 마음의 준비를 할 작정이었다. 파리에서 사온, 이 숙소 저 숙소를 떠돌아다니며 만난 이들마다 함께 마실 것을 권유했으나 모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와인을 꺼내 머지 강으로 나갔다. 머지 강가에는 참 많은 문화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뭐랄까, 리버풀이 하나의 대로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이 과거 영광의 항구 도시 시절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라면 알버트 독은 일신우일신, 모든 건물에 현대의 분위기가 완연했다. 비틀즈 박물관인 비틀즈 스토리, 리버풀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에코 아레나 등이 그랬다. 오직 비틀즈 때문에 리버풀에 왔으면 비틀즈 스토리는 가보는 게 당연하겠으나, 13파운드를 지불하고 박물관의 박제된 비틀즈는 보고 싶지 않았다. 밤에 지나가면서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에코 아레나의 박스 오피스쪽에 있는 공연 라인업을 보며 침만 줄줄 흘렸다. 아니, 오늘은 지금 저 안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공연을 하고 있네! 아니, 11월에는 뮤즈(Muse)의 공연이? 그렇다면 곧 새 앨범이 나온다는 얘기로군! 그렇게 혼잣말을 계속하며 머지 강변에 앉았다. 템즈나 센이 강이라기보다는 좀 넓은 개천이라는 느낌이었다면, 머지는 진짜 강이었다. 검정색과 푸른색이 공존하는 리버풀의 밤하늘 아래 바다로 이어져있는 머지강에서는 바다의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척 베리(Chuck Berry)에 빠져 있던 리버풀의 악동들은 이 곳에 모여 기타를 퉁겼을 것이다. 머지 사운드는 그런 기타 소리 하나 하나가 모여 탄생했다. 그리고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라는 두 명의 천재가 이 별 볼일 없는 도시를 꿈의 장소로 만들었다.
와인을 꺼냈다.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던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런던에서는 밖에서 술마셔도 못본 척 하던데, 여기는 지방이라 안 통하나 싶어 살짝 겁을 먹었다. 경찰이 말하기를, 여기서는 술병을 들고 마시는 게 안된다고 했다. 지훈씨가 술병을 품에 숨기는 시늉을 하자 경찰이 씩 웃더니 "그렇죠. 그렇게 하면 돼요." 그러고는 좋은 시간 보내라며 사라졌다. 리버풀의 인심은 공직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하지만 이때 까지는 알지 못했다. 시민 한명 한명의 미친듯한 인심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를.
잠을 잊은 갈매기와 고층 빌딩 하나없이 고즈넉한 야경이 펼쳐진 강가에 앉아 우리는 와인을 비웠다. 펫 샵 보이스의 공연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지훈씨가 찍은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미비아 사막의 밤에 깔리는 별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그의 여행담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시간 가는지 모르고, 추운줄도 모르고 수다를 떠는 두 동양 남자의 뒤로 레너드 코헨의 공연을 보고 귀가하는 신사 숙녀들이 지나갔다. 그 행렬 틈틈히 멈춰서서 키스를 나누는 젊은 아베크족들을 보며, 우리는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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