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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톤베리 이브, 청춘은 불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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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톤베리 이브, 청춘은 불꽃이어라

[김작가의 음담악담] <글래스톤베리 특집②> '팝의 황제' 사망 소식을 듣다

맨바닥에 텐트를 설치하고 침낭 하나 깔고 잤더니 허리가 미친듯이 아팠다. 헐크 호건에게 허리 꺾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원,투,쓰.. 그 순간 벌떡 일어나는 프로레슬러처럼 눈을 떴다.

밤에 생각보다 비가 안내렸나 보다. 바닥은 축축하긴 했지만 악명높은 글래스톤베리의 진흙탕은 없었다. 대신 습기를 잔뜩 머금은 잔디가 듬성듬성 보였다. 명색이 농장인데 잔디가 쫙 펼쳐진 게 아니라 듬성듬성인 이유는 밤사이, 그리고 아침부터 계속해서 관객들이 입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착한 밤만 해도 꽤 한가했던 캠핑존은 이미 포화상태. 저 멀리, 그러니까 아주 멀리까지 있는 일반 캠핑존에도 푸르른 구릉대신 형형색색의 텐트촌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넓디 넓은 캠핑존 너머의, 광활하디 광활한 페스티벌 사이트 여기 저기서 음악이 들렸다. 본격적인 공연은 금요일부터 시작이지만 이미 글래스톤베리에 들어와있는 10만명 정도의 페스티벌 팬들을 위해, 공연을 제외한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공연도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공식 타임테이블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영국의 유력 음악지인 <Q>에서 마련한 퀸즈 헤드 스테이지에서는 목요일부터 특별 공연이 하루 종일 돌아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모든 공연을 부지런히 볼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그로기 상태. 옆 텐트의 부지런한 영국 청년들이 아침을 해먹느라 피워놓은 모닥불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축제 준비를 시작했다. ⓒ김작가

몸을 좀 추스린 후 페스티벌 사이트로 입장했다. 해도 떴다. 입이 딱 벌어졌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이미 페스티벌 사이트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마켓이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오기 전에는 한국이나 일본의 페스티벌에서 봤던 규모 정도일 것이라 짐작했다. 어림도 없었다. 이건, 거의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큰 시장이었다. 물건과 활기가 모두 넘쳐났다. 곳곳에 세계 각국의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온갖 마실 거리들이 즐비했다. 무엇보다 놀란건 먹을 것 이외에도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한, 즉 페스티벌 모드로 변신할 수 있는 모든 아이템이 다 있었다는 거다. 할로윈 축제, 혹은 가장 무도회에서나 쓸법한 괴상한 모자, 캠핑 장비를 제대로 못갖춘 이들을 위한 레저 용품 전문점, 독일 군복, 소방수복, 군화 등을 파는 구제 밀리터리 샵. 펑크 샵, 고스 샵 등등. 여기는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돈만 있으면 5분 안에 원하는 스타일로 변신할 수 있는 곳이었던 거다. 많은 사람들이 샵을 들락거리며 하나씩 변신해갔다. 이미 페스티벌 모드로 참가한 사람들도 물론 넘쳐났다.

일행 중에는 프랑스에서부터 함께 움직인 루비 살롱의 리규영 대표가 있다. 그는 신체적인 이유로 늘 착용할 수밖에 없는 모자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몇 만원씩 하는 거라며 5파운드 짜리 구제 독일 야상도 두 벌이나 샀다. 한국에서 프랑스를 거쳐 글래스톤베리까지 장화를 낑낑대며 매고 온 나와는 달리, 해골 무늬가 프린팅된 4파운드 장화까지 샀다. 야금야금, 그도 페스티벌 모드로 변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모아온 여러 종류의 밴드 티셔츠로 무장해 있던 탓에 옷에는 눈길도 안주고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검정 밀집 모자를 샀다. 워낙 머리가 큰 탓에 한국에서는 맞는 모자를 구하기가 힘들었으나, 서양인들의 머리가 그저 작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글래스톤베리에서 깨달았다. 물론 모자를 하나 걸쳤다고 페스티벌 가이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후줄근한 밴드 티셔츠와 평범한 반바지 정도의 동양청년은 누가 봐도 음악 오타쿠…정도 였을 것이다. 목에 걸린 프레스 목걸이, 어깨에 둘러맨 대포같은 DSLR이 그런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절대 반지였을 거라고, 자위하고 있다.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 근처의 잔디밭에 앉았다. 여기가 햇볕 좋은 날의 하이드 파크라도 된 양, 역시 숫자를 논하는 게 부질없는 이들이 웃통을 벗고 일광욕을 즐겼다. 맥주를 사려는 이들이 늘어선 바에서 기네스 생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짙고 짙은 베이지색 거품과 검고 검은 기네스가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순간, 여기가 바로 글래스톤베리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엄마 등에 업힌 갓난아기부터 황혼을 한낮처럼 살아가는 노인들까지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두 모인 곳이었다. 사지 멀쩡한 이들 뿐 아니라 거동이 극히 불편한 이들까지도 글래스톤베리의 태양 아래서 여름의 시작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국과 다른 의미로, 영국의 여름 역시 뜨겁게 시작했다. ⓒ김작가

그 어디에도 그늘은 없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도,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지붕과 테이블도, 그리고 일말의 근심과 걱정어린 표정도.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접속자 폭주로 다운돼버린 홈페이지를 끊임없이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며,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티켓을 거머쥔 십만명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것 같았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이들이 그런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음악과 여름과 축제와 39년의 전통이 그들을 바로 이 곳, 글래스톤베리라는 이름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듯한 거대한 설레임이 바글바글댔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가, 조금씩 조금씩 현실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밤 10시가 될 때까지 저물지 않는 태양 아래서, 페스티벌 사이트를 누비고 다녔다. 살인적인 영국의 물가를 파탄난 재정으로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단식 수준의, 허리띠 졸라매기를 생활화 해야한다는 당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까의 잔디밭에 놓고 왔나보다. 몰라 몰라, 나에게는 마이너스 통장도 있고 건강한 장기도 있어. 피도 아직은 쓸만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잔에 7천원씩 하는 맥주를 계속 홀짝홀짝 거리며 시작도 하기 전에 절정을 맞은듯한 글래스톤베리의 열기를 만끽하고 다녔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스테이지와 댄스 캠프, 그 사이 사이에 들어찬 온갖 종류의 이벤트 부스, 또 그 모든 곳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마냥 신나하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은 글래스톤베리 그 자체였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밤에나 활기를 맞지만, 글리스톤베리의 이브는 낮부터 밤까지 끝나지 않았다. 하늘도, 사람도 끝간데 모르게 뜨거웠다. 모든 종류의 음악이 모든 곳에서 울려퍼지는 글래스톤베리 안에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직 공연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팝의 황제는 하늘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해가 저물면 세계 최대 대중음악(Pop) 축제가 시작된다. ⓒ김작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피곤했지만 전날 밤과는 완연히 다른 들뜬 마음을 놀라게 한 건, 역시 텐트 안에서였다. 어둠을 뚫고 어느 텐트에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Michael Jackson is Dead!!!!" 취침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텐트 밖에서 밤하늘을 보던 나에게, 전날 밤 쏟아지는 비 사이로 청춘의 가열찬 교성을 전해주던 (것으로 짐작되는) 또 다른 옆 텐트의 스코틀랜드 청년이 말했다. "이봐, 들었어? 마이클 잭슨이 심장 마비로 죽었대." 여기 저기서 "오 마이 갓!" "언빌리버블"하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와중이었다. 팝의 황제는 세계 최대의 음악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 밤, 홀연히 사라져 팝의 만신전으로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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