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와 기술의 발달과 인연이 깊은 대중음악은 레코드의 출현에 의한 대량복제와 전축·라디오의 보급에 의한 대량전파와 함께 규정되었다. 지금, 음악을 만들고 전달하고 즐기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 음악을 꿈꾸는 청년은 자기 컴퓨터에 관련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녹음을 한 후, 여러 장의 시디에 복사하여 인터넷에서 팔면 된다. 만약 누군가 그 물건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면 음악인이라 불릴 수도 있다. 홈레코딩의 발달은 프로 음악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구성원들이 멀리 떨어져 사는 음악인 그룹은 합주실이 아니라 각자의 방에서 파일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한다. 새로운 멤버의 오디션을 유투브 동영상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연장이 연장되다
음악만이 아니다. 도구와 기술은 대중예술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스타워즈'와 '스타트랙' 시리즈에선 시간상으로는 과거가 나중에 제작되면서 후대보다 세련되고 화려한 세계로 그려진다. 실사영화가 거꾸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워낙에 그래픽이 많이 쓰여 온 탓에 '월E'에선 실사와 그래픽의 구분, 즉 "진짜 같다"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지 드러난다. 오리지널을 말하는 건 구습이 되었으며, 기계의 낭만화를 거쳐 기계의 인간화, 그리고 인간의 기계화로 진행된다는 예상이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었다. 이런 거창한 얘기가 아니더라도 종이 위에 글씨를 쓰다가 까매진 손날을 봤던 시절이 가물가물하다.
도구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의 단적인 예는 TV다. 미디어는 일상이 되었다. 영화마저 주인공과 관련된 사건이라든가 스포츠 경기를 중계방송을 빌려 전달한다. 코미디프로 '달인'은 TV시대와 유명인사가 되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가 만난 해프닝이다. 하긴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고 노래했다. 40여 년 전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의 첫머리에 <뉴욕타임스>의 '소녀와 고양이를 공격한 쥐' 이야기를 인용하며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혁명적 변화를 역설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TV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소통을 갈망하는 인간의 성향, 그리고 새로운 매체가 출현하면 과잉해석과 과잉기대 혹은 과도한 경계가 표출되기 마련이라고 말해준다.
인터넷에 거는 기대는 어떠할까? 휴대폰과 컴퓨터 없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사실 도구중독이라기보다는 연결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넋 빠진 얼굴이 되고, TV를 들고 지하철을 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물론 몸집만한 수상기를 등에 메고 어깨에 안테나를 꽂은 채로 인파를 비집고 다니는 것이 아니듯이, 전화문자와 메신저 때문에 대면관계가 축소되었다고 한다면 과장이고 이해부족이다. 대체가 아니라 추가이다. 평생 알지도 못했을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난다. 그런데 또 다른 결과도 가져왔다.
구전이 사라졌다. 뉴스와 유머를 직접 전달하는 대신 이제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봐." 유명 TV프로그램의 장면들 역시 유투브로 화제가 된다. 하지만 스스로 재가공하며 전달하는 또 다른 형태의 구전이 발생했다. 또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찍느라 어려웠겠구나, 현장에선 민망했겠구나, 할 정도로 기술적 이해도가 높아진 사람들은 온전한 몰입의 방해까지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 '연장의 연장'은 대중의 수용방식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네티즌들은 더 이상 뮤지션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화제가 됐던 'MR 제거영상'은 대중이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뉴시스 |
수입에서 개입으로
네티즌이 노래의 표절을 직접 폭로한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MR 제거영상'처럼 가수들의 가창력까지 기술적 조작을 통해 검증한다. 공연장면은 누구든 손수제작물(UCC)로 찍어 올릴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대중음악의 구조적 혁명과 새로운 수용문화의 창달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어서다. 전에는 자기 안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다. 일방적인 수입에서 능동적인 개입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 라디오 연설이라는 미디어 정치를 기획하고 실명제 운운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충실한 데이트를 위해 나름 고심하여 파김치와 마늘장아찌, 또는 삶은 달걀을 잔뜩 집어먹고 집을 나선 꼴이다.
이 개입의 활성화로 넓게는 지식질서가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종이에 베인 상처를 훈장으로 삼는 지식인이라 해도 자기가 인식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군중을 칭찬하거나,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고 단순화하면 계몽으로 비춰진다. '촛불', 'WBC', '월드컵'에 대한 훈계들이 그랬다. 남들도 다 알고 있으며, 생각 못 해도 될 부분이 있다는 걸 정작 자신이 놓치곤 한다. 거리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어제 나오지 않았던 이가 한탄하고, 마니아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음악을 지례 안 팔릴 거라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강박은 대중과 자신을 분리하는, 즉 대중을 자신을 제외한 무형의 군중으로 보는 습관 때문이다. 집주인은 그들을 위해 방문을 열어두고 팔짱을 낀 채 입구에 서있다. 나가라는 신호이다. 세상을 등진 전직 대통령에게 많은 이들이 '존경한다'보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정치지도자의 상도 바뀌었다. 지식인 또는 ○○가는 답안지를 불러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풀어가는 사람이다. 여유 없는 이들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동의여부를 판단에 맡기는 동등한 친구이자 대리인이다. 물론 실적은 존중해줘야겠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야후'가 독보적인 포털의 지위에 있었던 때에 개인홈페이지 제작 붐이 일었다. 야후의 까다로운 등록심사를 통과하면 공신력이라도 얻은 양 좋아하고, 남몰래 탈락의 아픔을 곱씹기도 했다. 그런데 열린 정보를 쌓아 제공해야할 포털이 뿔테안경을 쓴 심사관의 위치에 섰을 때 이미 몰락의 조짐이 보였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포털 역시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조짐은 말단 실무에서 드러난다. 어느 집단이든 성공의 지점에 머물면 행렬에서 뒤쳐진다. 인터넷의 주도권 역시 PC통신의 동호회, '다음'의 카페,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네이버'의 블로그 순으로 변해왔다. 예전부터 유독 기분을 상하게 하는 CF를 곧잘 만들었던 한국의 대표 재벌이 아직도 국가주의 캠페인으로 시청자의 의식수준을 깔보는 것도 몰락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발성은 증대되고 있다. 대중음악을 즐기는 방식 역시 연구가 아니라 놀이가 되었다. 놀이는 연대의 방법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방금 말한 긍정적인 예측이 기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시적인 유행과 변덕스러운 취향이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패드(fad)가 일반화되고, 교양 있는 TV프로그램마저 생략과 단순화와 과장으로 감동을 만들려 한다. 그것은 명쾌함과 다르다. 어떤 기타연주자를 극적으로 설명하려 "여섯 줄을 가졌을 뿐인 기타로 아름다운 음악을"이란 멋진 자막을 띄운다. 그런데 기타에는 많은 프렛이 있으며 줄을 조율하기에 따라 음역은 얼마든지 넓어진다. 필요 없는 음계 빼고는 다 낼 수 있고, 불필요한 소리까지 만들 수 있다. "여섯 줄을 가졌을 뿐인 기타"가 아니다.
보다 어려운 문제는 역동성에서 발생한다. 현대판 전망대인 베스트뷰와 랭킹에 올라타는 행위는 경제적이다. 다수가 선택한 정보에 대한 신뢰성과 편이성, 그리고 동참욕구까지 충족된다. 인터넷은 열려 있기도 하지만 극단적으로 고립된 공간이다. 현대의 어두운 단면들인 '고독한 사회'와 '죽음 권하는 사회'에선 노인과 아이만 고독하지 않다. 검색순위와 방문자수에 대한 집착은 고독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불안증이다. 하지만 음악과 영화, 책을 망라하는 검색어 순위는 깔대기보다는 채의 역할을 한다. '채'와 "나를 봐줘"가 한 몸이 되어 꼬리를 물며 맴도는 와중에 넓게 퍼진 방사형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다.
컬렉팅에서 커넥팅으로
또 다른 양상은 연결이 수집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참담한 성적이었을 음반판매고가 "선전했다"로 통한다. 수십만 장씩 팔리는 음반은 눈에 띄게 드물다. "음반은 죽었다" 내지 "죽는다"는 예단을 시인해주려는 듯이 길거리에서 만난 누구에게 묻든 모르지 않을 '소녀시대'의 음반판매량은 화제성이 무색할 정도로 작다. 여기에 소녀시대 대신 원더걸스를 넣으면 더욱 정당화될 수 있다. 물론 아이돌은 다른 차원에서 소비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편으론 음반시장이 2007년에 바닥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다 인디 씬의 전반적인 판매량은 상승하고 있어서 음반시장의 마지노선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컬렉션'에서 '커넥팅'으로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추세이다.
소장, 즉 소유의 지속성에 대한 욕구 대신 언제든지 편리하게 원하는 만큼 듣는 걸 택한다. 영화 몇 편 볼 돈이면 '합법적으로'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소장하지 않아도 다양한 루트로 접근할 수 있다. 탓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별로 똑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음반을 소장해야 안목을 가지는 건 아니다. 축적과 안목, 축적과 적용은 다르다. 그 부분이 발달하여 정보량이 적어도 안목과 적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
▲ ⓒ프레시안 |
산업적으로도 '음악은 죽었다'가 아니라 '음반산업은 작아졌지만 음악산업은 커졌다'가 상식이다. 음반·음원·공연시장을 합한 음악산업은 6,000억원으로 추산된다는 떡볶이 산업보다도 크다. 음반은 부가적인 매체로 재설정된 것처럼 보이는데, 음원의 반(反)영구성은 무한창출이라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왜? 좀 지겹지만 '불법시장 때문에 어렵다'는 주장을 한 번 더 짚어봐야 할 것 같다.
▲ ⓒ프레시안 |
통계자료는 수치를 외우는 것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근래의 최대흑자가 경기침체와 수입급감의 결과인 '나쁜 흑자'이고, 부도기업의 감소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상 부문의 불법시장이 합법시장의 2배에 달하는 것은 불법다운로드가 부가판권시장을 무력화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파일형태의 콘텐츠 제공에 조심스러운 출판계는 합법시장이 우위를 지키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한 불법적 이용률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 한다. 그런데 음원은? 불법시장이 합법시장의 10분의 1이다. 매우 싼 가격에 제공되는 음원서비스가 불법시장을 흡수한 것이다. 불법시장이 공범이긴 해도 주범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터넷 보급이 음반시장 축소와 때를 맞춰 이루어지긴 했으나 상황에 의한 지목이지 직접 원인은 아닌 것 같다. 해외의 경우 10년 동안 50%가 빠진 것에 비하면 한국은 급속히 추락했다. 현재 인터넷보급률이 80%에 달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초고속인터넷 가입률은 세계 6위라고 한다. 근거가 결론으로 향했다기보다는 결론이 근거를 만들어내면서 근거가 뿌리에 닿지 못하게 되었다. 기획사시스템의 흥망을 비롯하여 대중음악 전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서 대중음악을 '어른이'를 위한 대충음악으로 만들어놓고 인터넷 탓만 하는 것은 추석에 모내기해놓고 하늘을 탓하는 격이다. 닭살 돋는 뻔함과 소름 돋는 감동을 혼동해온 것에 대하여 지불해야할 금액이 적힌 청구서가 배달된 것은 아닐까.
수익분배의 문제가 '어렵다'의 원인이란 것도 상식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음원수익 비중의 확대는 성장을 의미하지만 한국은 경우가 다르다. 음원이 음반의 구매를 자극하거나 열성 팬의 유입경로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음반은 음악활동의 주요 동력이다. 멤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일본과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껌엑스'는 복귀앨범이 잘 팔리지 않자 국내활동을 거의 포기했다. 공연과 계약, 심지어 방송출연까지 음반판매고가 감안되고, 해외 음악인의 내한공연에도 음반판매량이 지표로 활용된다. 정서적인 문제도 있다. 좋은 음악을 알리고 싶다는 공유문화에 대해 한 음악인은 "주인공을 뺏긴 기분"이라 했다. 그렇다고 창작자들까지 만류하는 일부 법무법인의 과도한 합의금 약탈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음반을 제작하지 않으면 비용이 절감되지 않느냐고도 하지만, 디지털 제작으로 만만찮은 필름값을 아낄 수 있는 영화와 달리 음반의 프레싱 비용은 애초에 미미하다. 그래서 '뮤직마운트'와 '여행스케치'처럼 서점과 팬시점에서 판매하거나 이아립처럼 공들인 포장으로 다른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해외에선 월마트를 통한 판매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환율 때문에 EP와 중고앨범이라도 구입하려는 수집가들이 여전히 많지만, LP 생산 공장마저 사라진 한국에선 당연한 것부터 설명해야 한다. 음악적 시도와 이해가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레이니 선'은 음반으로 듣지 않으면 감지하기 힘든 소리와 '감'을 담으려 노력했다. 물론 음악인과 청자 모두 변화에 적응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합침이 아닌 겹침, 집중이 아닌 연결. 그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커넥팅이 온라인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진 않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공연장에서 놀 줄 모르는 재미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내한한 외국 음악인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심하게) 잘 논다. 현재 많은 대중음악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1999년부터 정례화 된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이후 부산국제록페스티벌(2000), 자라섬재즈페스티벌(2004), 광명음악밸리축제(2005), 펜타포트록페스티벌(2006), 그랜드민트페스티벌(2007) 등이 잇따라 열리기 시작했다. 월드뮤직과 포크 등을 주제로 한 페스티벌 역시 꽤 성황을 이룬다. 음악인과 음악인, 음악인과 수용자를 연결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음악축제의 성황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지자체의 도시마케팅이다. 개중에는 주최와 주관의 불분명한 구분, 내용에 대한 개입, 집객에 대한 압박 때문에 과시형 동네축제로 전락한 경우가 있지만, 상기한 축제들 중 여럿이 지자체의 예산으로 진행되었다. 다른 하나는 성장한 인디·언더 음악동네와의 결합이다. 이른바 국민가수와 인기가수들이 주가 되지 않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게 들이면서 음악적 내실과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하나는 참여적인 수용층의 형성이다. 이들의 기호에 맞춰 공연의 개념과 공연장의 구조도 변하고 있다. 90년대에도 음악 바와 음반매장에서 공연이 열렸지만, 그들의 기호에 맞게 펍, 카페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홍대 인근의 바 샤(bar Sha)는 고출력 라이브를 할 수 없는 카페의 여건과 어쿠스틱 공연이란 컨셉이 조화를 예를 제시했다.
하지만 트렌드에만 편승한 페스티벌은 안정적이긴 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타깃을 설정하고 인지도를 중심으로 무대를 배분하는 어느 페스티벌의 음악적 파급력이 작은 이유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다른 페스티벌이 큰 무대에 세워 화제몰이를 한 '장기하와 얼굴들'을 그 페스티벌은 구석 무대에 세움으로써 스스로를 화제선상에서 제외시켰다. 주된 관객과 음악적 결과가 대동소이하면 현상유지에 머문다. 시장성에 투항하면 보수적이 된다. 이렇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커넥팅을 제한적으로 만들고 있는 무엇이 드러난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음악잡지에 대한 추가답변을 할 차례이다. 기존의 독자를 위한 음악지는 월간이 아니라 주간지가 낫다. 예전의 형태로는 신속성을 따라갈 수 없으며, 가판대에서 집어 들어 부담 없이 훑어볼 수 있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월간의 형태를 고집하려면 우선 다수가 발간되는 미술잡지들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미술가와 업계 종사자, 학교를 통해 양산되는 학생과 선생이라는 집단을 바탕으로, 그들의 성향에 맞게 내용을 꾸리고 있다. 인터넷에 둥지를 튼 웹진 역시 기존의 방식만 고집하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지불했다. 인터넷 안에 제한되는 연결은 고립이다.
이처럼 도구의 변화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삶의 변화가 도구의 생명을 연장시키며, 새로운 도구가 옛 도구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환경에 대한 인식이 퍼지고 도시구조가 달라지면서 생명력을 얻은 자전거처럼 사람이 변동을 제어하기도 한다. 성질 급한 이들이 사라진다고 했던 라디오는 자가용의 보편화와 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물론 만담이나 흘러간 노래를 랜덤으로 돌리는 습성을 벗어나 TV와의 경쟁이 아닌 라디오의 독자가치를 갖는 게 관건이다). 발전에만 매몰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TV와 라디오는 모닥불과 북소리와 같고, 벽돌도 흙으로 굽는다. 그런데 더 큰 울타리가 있다.
그래서 음악과 도구와 시장의 연결은 두 얼굴을 가진다. 어린 시절에 꿈꿨듯이 로봇시대에 인간은 편해질까? 고급형과 보급형으로 구분된 자가용처럼 부자와 빈자는 다른 로봇을 사용하거나, 누구는 아예 갖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개입과 커넥팅은 개인가치 '비움', 정치경제가치 '나눔', 사회문화가치 '이음'이 강조될 사회에 대한 암시인 동시에 장애물을 드러낸다. 당장 멋져 보이는 변화라도 힘의 구조가 버티고 있는 한 소통에 대한 기대는 스케치북에 로봇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공상일 수 있다. '출입금지구역'은 서울시청 앞에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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